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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보았노라 / 민 13:30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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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우리는 보았노라 
본 문 :  민수기 13장 30절 ∼ 33절 


  여러분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 앞으로 여러분 생애에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어느 병원의 입원실에 두 환자가 있었습니다. 한 환자는 바깥을 잘 내다볼 수 있는 그런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환자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 저 구석의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이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환자가 매일 아침마다 밖의 풍경을 이 보지 못하는 한 환자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김선생님, 오늘은요 어제 그렇게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낙엽들을 아름다운 연인이 밟고 지나갑니다. 김선생님, 오늘은 잎사귀에 서리가 맺혔습니다. 날씨가 상당히 쌀쌀한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바깥의 풍경을 전해주었던, 그리고 힘을 주었던 그 환자가 나중에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던 그 환자가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던,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그 침상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대했습니다. 단풍잎이 떨어진 그 낙엽길, 그리고 서리맞은 잎사귀들을 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단풍나무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솔길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회색 콘크리트 벽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을 보십니까? 아니,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여러분 안에서 혹시, 하나님의 꿈을 보십니까? 하나님의 소망을 여러분 안에서 느끼시고 그것을 분명히 보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본 사람들, 두 부류가 나옵니다. "우리는 보았노라" 라고 분명히 외치지만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31절에 보시면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합니다. 가나안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입니다. 그들의 신장은 큽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았습니다." 하지만 잘못 보았습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 "리아 네가티바" 부정적으로 보고한 사람들의 그룹이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14장 중반부에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고하는 보고가 따로 있습니다. "리아 파즈티바" 긍정적인 시각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가나안 땅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 말자.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밥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분명히 같은 사물을 보았습니다. 같은 땅을 보고 완전히 정반대의, 180°다른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메뚜기와 같은 자의 모습으로 연약한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았노라. 보긴 보았는데 무엇을 보았습니까? 요새 메뚜기는 상당히 좋은 의미도 있습니다. 저도 '메뚜기' 하면 어렸을 때의 좋은 추억이 생각납니다. 철사를 쭉 길게 뽑아가지고 거기에 메뚜기를 잡아서 하나하나씩 꼽습니다. 그리고 장작불에 돌려가면서 노릇노릇하게, 군침도는 분도 계십니다,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쿠키에다 메뚜기를 갈아넣어서 파는 쿠키가 있습니다. 아주 비싼 그리고 영양이 아주 좋은 쿠키입니다. 메뚜기의 이런 좋은 이미지가 있지만 성경본문에서 말하는 메뚜기는 황충입니다. 여러가지 안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뚜기와 같은 나입니다"라고 말하는 그 신앙이 없는 그의 고백을 통해서 한 번 저희들도 메뚜기와 같은 어떤 속성이 그렇게 만드는가 한 번 비교해 가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메뚜기는 하늘을 덮습니다. 까맣게 하늘을 덮는 모습을 가지고 옮겨 다닙니다. 모세의 재앙 때에도 그랬습니다. 메뚜기가 하늘을 덮어서 마치 낮이 밤처럼 컴컴한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모습, 바로 메뚜기와 같은 속성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지식, 우리가 가진 여러가지 소유물들 그것이 얼마나 큽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하늘의 뜻을 가리는 속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하고 그것을 내 마음에 간직하고 나날이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 땅에 이 지구에 하나님 나라를 분명히 보고 그것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 1%만 있다면 이 세상의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 부정의와 불공평과 그런 추악한 모습들이 없어질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사람이 0.5%만 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습은 완전히 180°바꾸어질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먼저 여러분 삶에 앞세우십니까? 무엇이 여러분 앞에 여러분 앞을 끌고 가는 그 추진력이 무엇입니까? 욥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내가 이 천지를 창조할 때에 너는 나와 함께 있었느냐? 그 때 내가 너에게 심어놓은 큰 꿈이 있단다. 내가 너에게 심어놓은 큰 꿈, 그것을 보지 못하느냐?" 여러분 안에, 여러분 가족들 안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여러 친구들 안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심어놓으신 위대한 꿈이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소망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꿈을 그 소망을 보고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목회자로서의 특권 중의 하나는 사람의, 한 사람의 삶을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죽을 때까지 그 삶을 돌보고 또 관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공교롭게 어느 한 날, 이 세 가지 일이 저에게 다 한꺼번에 왔습니다. 아침 오전 6시에 발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같이 울면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점심때는 결혼 주례 예배 안내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부부가 탄생되는 그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는 한 호텔에서 어린아이의 첫 돌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하루동안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여러 가지 실망도 하고 행복도 느끼고, 여러 가지 변화 과정을 거치고 그리고 죽습니다. 이 모든 변하는 과정 중에 제가 돌 예배에 그 아이를 안고 같이 축복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변하는 과정 중에서도 우리를 안으시고, 모든 변화하는 파도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변치 않는 인도하는 힘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입니다. 변하는 것을 보시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보시겠습니까?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무엇을 보려 하십니까?
두 번째로 메뚜기의 속성 중에 하나는 계속 갉아먹는 속성이 있습니다. 배부른 것도 모르고, 만족함도 모르고 계속 갉아대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파괴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족하지 못할 때 내가 있는 은혜에 만족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런 메뚜기와 같은 그런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내 자녀에게서 업적주의적인 계량적인 그런 것을 보려고 하는 그 마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계속 갉아먹게 됩니다. 도리어 더 망치게 됩니다. 우리가 직계 즉, 아들이나 딸이나 이들에게는 상당히 큰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들을 양육하는 과정 중에 더욱더 우리의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을 살펴보면 이 손자들에 대한 기대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같이 놀고 있는 그대로 enjoy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그런 꿈을 같이 꾸고 즐기고 보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 또 부군, 사모님들, 친구들에게 어떤 것들을 보려고 하십니까? 계량적인 것? 경제적 지표? 물량적인 것으로 보려고 하십니까? 한 영업부에 판매실적이 계속 오르지 않아서 이 영업부장이 강연을 한 번 했습니다. 그 사원들이 계속 나가기도 하고, 이렇게 나가면, 영업부가 문을 닫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강연을 했습니다. 사원들에게 흰 백지를 보여주면서, 점을 하나 딱 찍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여러분, 이 종이에 무엇이 보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몇 번을 계속 물어보아도 "점만 보인다. 점이 보인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점보다 더 큰 백지가 있습니다. 하얀 공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찍힌" 조그만 점들, 오점들, 실수들. 이런 것들에 매여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크게 버려야만 넓게, 높게, 깊게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욕심이 가득 찬다면, 여러분의 욕심의 추가 멀리 보지 못하게, 깊게 보지 못하도록, 넓게 보지 못하도록 그것이 잡아당깁니다. 여러분, 지금의 것들을 많이 놓은 후 욕심을 버릴 때에 하나님의 꿈이 하나님의 소망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 자녀들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보여지게 됩니다. 여러분 무엇을 보십니까? 무엇을 보시려고 하십니까? 메뚜기의 속성 중에 세 번째로 떼로 모여 다닙니다. 항상 개개별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때로 모여 다니면서 항상 하는 소리가 머머링(murmuring)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평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항상 온 회중들이 부르짖으며 곡하였더라. 그리고 나중에는 이렇게 곡합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불평의 소리입니다. 리아 네가티바. 네가홀릭입니다. 워크홀릭, 일에 중독 된 자입니다. 알코홀릭, 술에 중독된 자입니다. 네가홀릭, 부정소리 불평소리 원망의 소리에 중독된 자들입니다. 계속 이런 믿음과 희망을 전한 것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을 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물을 볼 때에 여러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프로이드 같은 분은 인간의 모든 것을 성적인 에너지로 보았습니다. 리비도. 다윈은 물질 에너지로 보았습니다. 인간을 볼 때에 물질로 보았던 것입니다. 물질로 보는 시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보는 분들은 상당히 딱딱합니다. 그리고 항상 계산적입니다. 그리고 항상 생각에 의해서 모든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 번째는 믿음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믿음으로 같은 사건이라도 같은 일이라도 믿음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그것은 한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운영하시고, 하나님께서 지금 어떻게 활동하시는 가를 생각하면서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시각을 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자녀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이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교회를 보는 자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371장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구절을 보면, 남궁억 선생님께서 우리 나라가 일제 억압시대의 암울한 시대에 남들이 우리 민족을 엽전이라고 우리 민족을 냄비라고 비하하는, 그런 평가절하하는 그런 평을 할 때에 남궁억 선생님은 이 땅을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땅을 보았습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으니 우리로 일꾼을 부르게 하시니 하나님 이시나이다." 하나님의 꿈을 꾸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나라를 이 민족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어느 횡단보도 앞에 시각 장애인이 서있었습니다. 그 시각장애인은 떨면서 이 길을 건너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건너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그 불안감 때문에 얼어있는 채로 그 횡단보도 앞에 서있었습니다. 혹시나, 누가 오면 나를 좀 데려가면 좋겠다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각장애인은 교통사고로 눈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또 교통사고가 나면 어쩌나 하는 그런 불안 때문에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어떤 작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젊은 여성이 다가와서 "선생님 저랑 같이 가셔도 되겠습니까? 건너가셔도 되겠습니까?" 반가운 목소리였습니다. "네, 그럼요" 그리고 손을 꼭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갔습니다. 건너가면서 가끔 경적소리도 빵빵 울렸습니다. 하지만 안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옆에 누가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건넌 후에 그분에게 인사를 하려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먼저 그 젊은 여성이 이분에게 감사인사를 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사고로 저도 눈을 잃었습니다. 다음에도 저 같은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은 칠흑과 같은 이 세상에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가지 못한다 불평하며 원망하는, 아니 도리어 되돌아가자는 그런 불만을 하는 그 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꿈을 밝히는 자, 하나님의 꿈을 알고 그것을 전달해 주는 자, 그 자는 메뚜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하늘의 뜻을 가리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잃어도 내가 가진 것을 감사하며 새희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줍니다.
한 응급실에 여성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만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난산 과정에 있습니다. 많은 의료진들이 허겁지겁 왔다갔다하면서 지금 그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의 노력 끝에도 이 여성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맥박이 점점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료진 중에 한 의사 선생님이 채플린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임종 예배를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채플린은 들어와서 임종예배를 드리고 중환자실을 나왔습니다. 나오는 도중에 보니까 거기에 수술을 집도한 의사선생님께서 나오셨습니다. 실망이 가득찬 얼굴로 "목사님 제가 이 일을 계속 해야 합니까? 계속 죽음을 봐야 됩니까?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어머니는 가셨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이 의사에게 채플린은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귓속에 대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You are God's answer"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답이십니다. 긴 터널 속에 어두운 이 세상 속에 흔들리고 변화하는 이 세상 속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꿈이요 하나님의 대답이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 기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이끌어주신 주 여호와 하나님, 앞 길이 안 보이는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셔서 보다 더 넓고 깊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더하시사 하나님의 소망을 전해주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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