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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하는 자세 / 빌 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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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하는 자세(빌립보서 3:3∼17)


본문에서는 빌립보 교회에 일부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 (본문에는 손할례당)로 인한 문제 접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받았으나 율법을 준수하고 유대교의 전통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었고 종교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 없고, 바울처럼 선교 때문에 고난 받을 필요도, 선교에 동참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바울은 어떤 상태인가? 로마의 옥중에 있었다. 옥중에서 바울은 이들을 "개"라는 아주 욕설에 가까운 표현을 하였다. 당시의 바울은 약 30년간의 선교사역을 감당한 베테랑 선교사였으나, 4-5년 후면 순교를 당할 신앙이 성숙한 절정기에 본 서신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받고 선교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을 다 보낸 바울은 선교에 같이 동역하고 있는 羊이면서 선교의 후원자인 빌립보 교인들에게 또한 선교 15주년을 맞는 새문안 성도들에게 '선교의 자세가 무엇인가?' 신앙고백적으로 주는 경계와 권면의 말씀이다.

1.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4-8)

문제를 일으킨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의와 완성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로 구원 받는 것으로 온전하지 않고 이에 유대교적인 할레를 받는 것을 포함한 전통과 율법준수를 자신들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 자신도 그런 가문과 전통과 유전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바울 자신의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5-6) 바울은 인간적으로 이 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증거 하면서 아시아와 당시의 세계를 선교하면서 이런 모든 유익 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긴다"(7-8)고 고백 한다. 사실 빌립보교회에는 바울만큼 철저했던 유대인은 거의 없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 선교를 하면서 유대인으로서의 유익하던 것이 선교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선교사로 가면 먼저 현지인들에게 자신의 유익한 것으로 저들을 눌러 보고자 합니다. 예로
-한국은 경제대국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GNP가 $10,000을 넘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태국 인들은 6-25 당시 한국을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경제력 있다고 너무 까불지 말라는 뜻.
-"나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어머니 교회인 새문안교회에서 후원한다고" 말합니 다. 그러나 87년 파송되어 태국에 가서 첫 주일 예배를 창립 150주년을 맞는 침례교회 에서 예배를 드렸다. 치앙마이에는 새문안교회 보다 역사가 오랜 교회가 여러 곳이 있다

-한국교회는 부흥하여 세계 10대 대형 교회가 한국에 많다고 자랑하면서 자신을 인정하도 록 합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교회 성장이 진정한 성숙인가? 를 묻는다. 또한 한인 선교 사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렬하는 모습 속에서 덕이 안 되는 것을 봅니다.
따라서 이런 눈에 보이는 유익하던 것들이 오히려 선교에 무익한 정도를 넘어 害가 되기에 이를 배설물 버려야 한다는 것 이다.

그러면 바울 전하는 선교의 자세가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8) "고상하다"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나고 위대한 가치가 있다 뜻. 모든 것 위에 뛰어나고 위대한 가치가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자식"이라 고백한다. 그리스도를 성경을 읽음으로, 설교를 들음으로 아는 것 뿐 아니라 선교 현장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이방인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다.

-저는 씨춤교회의 성도들이 열악한 자연환경과 확신없는 신앙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함께 말씀공부를 통한 순종과 역사하실 것을 믿는 기도를 통하여 황무지가 변하여 옥토가 되고 지금은 유실수 과수원으로 변하여 교회가 자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자연까지 다스리시는 주님을 체험하였다.
-라후족의 한 무당이 "예수님이 모든 영을 다스리는 분"으로 고백함으로 14명의 사람이 세례를 받고 지금은 그 딸이 신학을 공부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 15:18) 하는 바울을 고백을 하게 된다.
-"따브르" (안녕하세요)하면서 코흘리게의 손으로부터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어른, 노인 들의 손을 잡을 때, 저는 저들의 깊은 주름살 속에 있는 염려, 근심, 영-육간의 탄식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찬양, 말씀 후에 함께 붙잡고 기도하는 과정들을 통하여 저들이 밝게 웃고, 헤어질 때는 서로 아쉬워 하면서 배웅하는 저들의 모습 속에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8-19) 하신 주님을 알게 되었다.
-식구들이 갖가지 벌레들에 물리기도하고 피부병으로 고생하며 생긴 흔적들로 안스러웠는데, 바울은 자신이 핍박 속에서 얻은 각가지 상처를 보면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6:17)고 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처여한 흔적이요 훈장으로 생각하니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를 개척했다는 것이나, 보이는 열매를 거두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알고 배워가고 경험하고 알아 가는 것이 선교임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 15:18)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는 것이나,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알고 배워가고 경험하고 알아 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8-19) 바울은 자신이 핍박 속에서 얻은 각가지 상처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6:17)고 했다.

언더우드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의 Lafayette Church를 지난 5월에 방문 하였다. Rev. Dayson의 안내로 교회 내부를 보았다. 원형의 내부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는 성화가 아니었다. 70년대에 어느 작가가 교회 주변 동네 길거리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그 사진으로 2년여에 걸쳐 실물 크기의 벽화를 그렸다. 노인들이 지팡이를 걷고 걷는 모습, 젊은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모습, 운동하는 모습 등 일상 주변에서 일어나는 주민들의 삶을 그대로 그렸다. 어느 날 한 흑인 노인이 들어와 교회 내의 벽화를 보여 달라고 하여 보여 주었더니 "목사님! 저기 농구공을 놀고 있는 아이가 제 아들인데 이제는 의사가 되어 개업을 했습니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주민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렇듯 주역 주민들과 호흡하는 교회와 목회를 함으로 현재 담임 목사의 목회 10년에 2-3배의 성장했다고 한다. 저는 이 벽화를 보면서 "거리를 거니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지금 이 시간 세종로 거리를 거닐고 계시다고하는 것 입니다. 셀러리맨으로, 유모차에 어린 아이를 끌고 가는 주부의 모습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서민들의 모습으로, 쪼잘거리며 길을 걷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우리는 그들 속에 있는 탄식하는 예수님의 소리, 고통 속에서 걱정하고 있는 울음소리, 영적으로 갈급하여 소리치는 소리 등을 듣고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발견하려는 선교의 삶/자세를 가지도록 성령님께서는 명령하신다.

2. 자기 발견 (9-14)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9) 바울은 30년의 선교사로서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아직 미완성의 모습을 보면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려간다고 고백한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1)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잡혔다고 했는데 이는 묶여있다는 것 보자는 '사명'을 의미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행9:15-16) 인간적인 목표를 이루고 성공했다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안일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선교는 미완성의 자신, 나약하고 추한 자신을 알게 해 주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명을 깨닫게 한다.
올 6월에 미국의 중고등부 학생들과 교인들이 태국 단기 선교를 갔다. 중 3인 미국인 가정에 양자된 학생이 있었다. 한국에서 고아로 버려져 미국인 가정에 들어가 얼마 전에 한국학교에 발을 드리면서 저희 중고등부에 나왔다.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부모가 법정에 불려가고, 부모의 요청으로 한인 목회자까지 변호인으로 출석하여 은혜 가운데 모든 일이 해결되어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 학생이 함께 참여 단시 선교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 저로서는 걱정이 아닐 수 없고 기도로 저를 훈계하였다. 에이즈로 부모가 죽은 어린 아이들을 방문하고, 산족 기숙사에 마약 재배하는 업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부모가 살해당하여 고아로 미국 선교사의 기숙사에 들어와 공부하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자신을 보데 되었다. 자신과 같은 고아들이 많다는 것, 돌볼 사람이 없이 기숙사에 들어와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자신은 그래도 얼마나 행복한가를 알게 되었다. 미국 가정에서 모든 것이 풍성한 가운데 살고 있는 자신. 기회가 되어 그 학생과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화를 내야만 삽니다. 일부러 화를 냅니다" 그의 이 말을 "왜 나는 버려진 존재가 되었는가?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여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다시 이곳에 와서 기숙사의 학생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아직 어리지만 그 학생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사명을 받길 기도 합니다.

3. 본이 되는 삶 (15-17)

15절을 풀면 "그러므로 우리 같이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을 따를 때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다 판단하실 것이다"는 듯이다. 이는 완곡한 표현이고 좀 더 바울의 진심을 안다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 혹은 온전하다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다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다.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목표를 향하여 나가되 바울의 본을 따르라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는 것을 바울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를 목표로 따르듯" 그런 삶을 살고 그런 본이 되고 그런 본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나의 삶을 통하여 나오게 하라는 것이다.

어떤 산족들은 선교사를 볼 때 '자기들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선교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다는 것 이다. 현지인들은 진정 자기들을 위하여 온 사람인가 아닌가에 민감하다. 선교지에서는 선교사의 삶을 봅니다 저희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주말이면 온 식구가 짐을 싸서 사역하는 시골 교회로 산족 동네로 갑니다. 같이 먹고 마시고, 복음을 전하고 아이들은 동네 아이들하고 같이 놀고, 웃고, 주일학교에 같이 가서 말씀을 듣고 하는 과정을 통하여 단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와 같이 되었다. 아이들은 주말에 집에서 친구들과 놀고 싶었으나 그것을 접고 부모와 함께 선교사와 같은 심정으로 쓰임을 받았기에 아이들이 안 오면 주님들이 먼저 아이들에 관하여 묻는다. 람푼 사역에 주력하면서 자주 시골교회를 자주 방문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된 모습을 보고 할머니가 손자를 대하듯 혹은 누나나 고모가 동생 조카를 대하듯 바라보면 대견하여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바울의 말씀대로 "주님 안에서" 한 가족과 같은 모습이며 주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는 본이 된 계기다 되었다.

특히 의료 선교 팀이 진지하게, 성의를 다하여, 헌신적으로 치료할 때 현지인들은 그리스도를 말로써가 아닌 의료진의 삶을 통하여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현지의 교회들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있다. 우리의 삶을 본 받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날 것을 믿는다.

결론: 바울이 세운 많은 교회들이 선교적 자세를 갖지 못함으로 쇄하여졌으나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이런 선교적 신앙, 경계와 권면을 받아 들여 성장하였고, 초기 중요한 종교회의에 이 교회의 감독의 영향력이 컸고, 13세기에 교황청에서 빌립보교구를 만들어 대 주교를 보내었고 18세기까지 도시는 없어졌으나 교구는 존속되었고 한다. 우리가 가져야할 선교적 자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현지인들에게 전하는 것 보다 현지인들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는 것이며, 그 그리스도를 만남을 통하여 구원 받은 미완성의 신앙인으로 사명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임을 깨닫고 나아가 현지인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케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빌립보교회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새문안을 사용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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