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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인가? / 삼상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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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인가?
사무엘상 2장 6-8절


1.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인가?

몇 일 전 미국 사람이 쓴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을 읽는데 제목과는 달리 읽을수록 심령이 가라앉고 기도의 불이 꺼지는 것을 느끼게 돼서 절반쯤 읽다가 찢어서 쓰레기통에 넣고 말았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구해도 안 되고 물질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해도 안 되고 전부 안 된다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기도하시지도 않았고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요사이 “물량주의”가 어떻고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어떻고 하면서 날카롭게 비판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한 마디로 고상한 불신앙이며 믿음을 무너뜨리는 자들입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의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 때문입니다. 이 칸트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이 “기복신앙”(祈福信仰 Gunstwerberei, favorseeking religion)이라고 배척받아왔고,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앙의 노선을 따라 온 세계 교회가 기도를 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 보다 인간의 이성을 따르는 합리주의(合理主義),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칼빈(John Calvin, 1509-64)은 간구(Petition)가 기도의 핵심이라고 했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서 얻으려 하지 않는(obtain something through petition) 기도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구할 때에는 반드시 줄 것을 믿고 구하라고 했습니다(기독교 강요 3권 20, 6). 이와 같은 초자연주의 신앙을 칸트의 합리주의 철학이 깨뜨려 버린 후 구라파와 미주의 교회는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총체적인 불신앙에 빠져 많은 교회들이 죽어 버렸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절실히 하나님께 구해서 ‘무엇을 얻어야 할’(obtain something) 필요가 없는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한철하 박사님이 칼빈의 말을 빌어 역설했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의 이 절실한 요구를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인도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목회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본주의나 합리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전부가 초자연적인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특히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강조하면서 그에게 복을 구하지 않는 자는 심중에 몰래 다른 곳에서 얻을 것을 계산하고 있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빠지지 않고 뜨겁게 기도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인본주의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목사와 교수들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얻는 것이나 복 받기 위해 헌금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교회를 죽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계속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여 계속 축복을 받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석녀였던 한나가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 미친 듯이 전심으로 기도하여 아들 사무엘을 낳고 쓴 신앙고백의 시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하나님,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이 하나님께 복을 구하지도 않고 어떻게 신앙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민수기 6장 22-27절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축복해 주라고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에게 복을 빌어 주라(祈福) 하셨는데 왜 “기복신앙” 이니 “샤머니즘”이니 하고 불신앙의 말들을 합니까? 물론 기독교는 샤머니즘과 같이 죄를 따지지 않고 도덕적인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복을 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의 차원이 높고 다를 뿐이지 하나님께 복을 빌고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성경에 수많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데 그 명령을 하실 때마다 “그렇게 하면 이런 복을 주리라”고 꼭 보상 혹은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그리하면 장수하리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그리하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리라”, “말씀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와도 들어가도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것이나 복을 비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 순종했더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고상하기 그지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냥 제물로 죽어 없어지기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유치하신 분입니까?
하나님의 보상을 믿고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지 그릇된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모세가 공주의 아들의 신분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과 축복을 믿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것은 고상한 불신앙, 허무주의인 것입니다.

2. 축복을 바라고 헌금하는 것은 잘못인가?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간구하여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도 비판하고 정성 드려 헌금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는 것도 그릇된 신앙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물질을 드리는 것과 우리의 신앙은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하셨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하신 말씀도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재물에 치우쳐 있는 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가까이 앉아서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를 가장 많이 바친 헌금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헌금 행위를 관심 깊게 보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은 물질의 양을 달아보시는 분이 아니라 정성을 달아보시는 분임을 또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헌금 생활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뇌물을 바치고 그 이권을 따내려는 것과 같은 불순한 마음으로 헌금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일부를 바칩니다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또 축복을 받아 내 육신 편안하게 살고 세상 쾌락을 누리려는 마음에서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쓰려는 목적으로 헌금을 해야 됩니다.
욥은 물질의 축복보다 만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의 재산이 다 불타고 도적 맞아 없어졌고, 그의 열 남매가 다 죽어 없어졌는데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하며 찬송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 보다 부요해 지도록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헌금해야 하나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① 첫 것(First)을 드려야 합니다
같은 분량의 헌금을 드려도 자기가 먼저 쓰다가 헌금하는 것 보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면 기뻐하십니다. 잠언 3장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 몇 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최근에 여자 장군이 없었는데, 생겨났습니다. 그 여장군의 이름이 양승숙 장군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면서 평생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했더니, 그 집 딸이 한국에서 첫 번째 여자 장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양에 수 백 년 내려오면서 잘 사는 귀족이 있는데 그 집 식당에 들어갔더니 “먼저 하나님을”(God First)하는 두 글자를 금실로 수놓아 벽에 걸어놓았더랍니다. 그 밑에 글자를 보니까 몇 백 년 되었더랍니다.
요사이도 베드로의 그물에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히게 한 기적을 볼 수가 있는데, 작년 1월 달에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리에 사는 김상태 집사님이 남들은 돼지 대가리를 놓고 절하고 푸닥거리를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당을 지으려고 기도하는 중에 하루는 10Kg짜리 방어가 2,370마리나 잡히더랍니다. 그 방어 한 마리 당 16만 9천 원씩 도합 4억 7천 만원을 벌었는데 다른 그물에는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배당을 지을 계획을 하는데 하루는 5m짜리 밍크고래가 그물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 고래는 5천 만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은 오늘날도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취직하여 첫 봉급 탄 것을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 축복 받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② 가장 좋은 것(Best)을 드려야 합니다
말라기 1장에 보면 양떼 중에 흠 없는 것이 많이 있는데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리니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그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리면 받겠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그 제물 가져오지 못하게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제일 좋은 것, 정성이 담긴 것을 드려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가 비록 엽전 두 닙이었지만 그 날의 생활비 전부를 바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장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 뿐인 독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독자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드리려 할 때, 다른 산양을 준비하셨다가 대신 드리게 하시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세기 22장 17절)고 축복하셨습니다. 천국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저는 토요일이면 설교 준비에도 바쁘지만, 헌금 준비에도 바쁩니다. 새 돈으로 감사할 일을 생각해서 준비합니다.
③ 마지막 것(Last)이라도 드려야 합니다
헌금할 때는 때때로 목숨을 거는 모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3년 반 비가 안 오는 흉년 기간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병에 남은 기름을 순종하여 드렸더니 흉년이 다 지나도록 밀가루 통의 밀가루와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했습니다.
지난 번 부산 수영로 교회에 갔다가 정필도 목사님의 은혜로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 김종호 장로님이 계신데 IMF가 터지면서 부도나기 직전이었는데 건축헌금 2억을 가져오면서 부도나기 전에 건축 헌금이나 드리겠다고 하더랍니다. 직원을 다 감원해서 몇 명밖에 안 남았었는데, 다른 회사는 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주문이 쇄도해서 미쳐 만들어 낼 수가 없을 정도가 되더랍니다. 그 다음부터는 걸핏하면, 1억 씩 또 드리고 또 드리곤 하더랍니다. 헌금하는 재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것이라도 드릴 때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귀한 것을 드리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오면 하나님이 큰 축복을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축복 받는 방법은 온전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험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돈이 아까우면 시험해 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목사가 십일조를 안 가르치고 헌금을 바로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들을 복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나쁜 사람입니다.
주의할 점은 헌금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도박을 한다든지, 신용카드를 남발하는 일, 규모 없는 생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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