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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마와 싸우려면 / 렘 29:10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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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싸우려면 
에례미야서 29:10 ~ 14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으로서,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쫓아 보냈던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 오겠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보냈으나, 나는 너희를 그 곳에서 너희의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6:14 ~ 18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를 하고, 버티어 서십시오. 발에다가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채비를 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으로,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 온갖 기도와 간구로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또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며,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0:34 ~ 39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제 아버지를, 딸이 제 어머니를,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슬러서 갈라서게' 하러 왔다. '사람의 원수가 제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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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지난주에 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분들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출세한 분들로서, 경제력도 상당하고, 또 학문도 많이 익히셔서, 말하자면 엘리트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얼마 전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이분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속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햇빛 들고 물 맑은 좋은 산천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우리 역시 자식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묻은 그날부터 난리가 났습니다. 남편이 하는 얘기입니다. 죽은 아들이 찾아와서 자기를 마구 두들겨 패더라는 것입니다. 아들이긴 한데, 자기가 느끼기에 성령의 역사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하여튼 아들이 와서, “당신은 그 동안 뭐하고 살았습니까?” “당신의 가치관이란 게 뭡니까?” 하고서 막 패는데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부인도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답니다. 아들 같은 이가 와서 가슴을 마사지하듯이 감싸고 만져주는데 굉장히 행복한 것 같았으나, 곧 울음이 나올 정도로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과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견디기 힘든 시련을 신앙으로 이기고 하나님 안에서 새 출발하기로 결단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만 복을 주시기 전에 고난과 연단도 주십니다. 그런데 그 고난과 연단은 참기 힘들기도 하려니와 그 형태도 다양합니다. 어떤 고난은 꼭 쇠붙이가 당하는 것 같은 시련입니다. 쇠붙이는 용광로에 넣어서 녹입니다. 그렇게 만든 쇳덩이는 다시 발갛게 달구어진 상태에서 두드립니다. 그 달궈진 쇳덩이가 쓰임새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쇳덩이를 막 패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엔 대장간에서 망치로 막 때렸고, 지금은 기계로 팰 겁니다. 어쨌든 빨갛게 달구어진 쇳덩이는 반드시 맞아야, 엄청나게 맞아야 질이 좋은 쇠가 되어서 철강산업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건물의 벽에 쓰이는 철재가 되기도 하고, 또 자동차 산업에도 쓰입니다.
철강이 쓰이는 범위는 대단히 넓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철강이 중요하다는 것만 알지, 이게 불덩이에 들어가서 얼마나 얻어 터졌는지는 잘 모릅니다. 쇠는 불덩이에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얻어터지고 두들겨 맞은 뒤에야 비로소 좋은 철강 제품이 됩니다. 우리 인간을 들어 쓰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서 많이 두들겨 맞을 수 있습니다. 좋은 쇳덩이로 쓰이고 싶은 분, 철강과 같이 강하고도 중요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은 분은 불덩이에 들어가서 얻어맞을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단, 얻어맞고 나면 새롭게 변모합니다.
지난번에 여주 이천에서 세계 도자기 박람회를 개최한 것을 기억하지죠? 저도 가봤습니다. 도자기는 엄청나게 뜨거운 불 속에서 구워집니다. 그러나 도자기는 쇳덩이처럼 두들겨 맞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도자기는 예술가나, 조각가의 손에서 부드럽게 반죽되고 조심스럽게 빚어집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안마도 받고 마사지도 받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도자기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불 속에서 완전히 익혀지는 것은 쇳덩이나 도자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연단의 불길 이후에 주시는 복은 다양하고 아름답지만, 그전에 불길에 들어가는 것은 다 동일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부부한테 권면했습니다. 남편에게 “당신은 쇳덩이 같으니, 앞으로 당신 가정을, 이 사회를, 이 나라를,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철강처럼 튼튼히 세우고 섬기는 데 헌신하십시오.” 부인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에게 물을 줄 물동이가 되십시오. 많은 영양을 공급할 그릇이 되십시오. 시련은 있겠지만, 그 시련을 지나면 새로운 소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알고 이겨나갑시다.” 이게 제가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단을 받습니다. 고통도 받습니다. 그럴 때에 그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에 우리 신앙을 집중해 보십시다. 그 한 예로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포로생활 얘기를 들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과 복의 얘기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그들을 칠십 년 동안 바빌론에서 포로로 끌려가 살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제에 침략당한 36년 동안에 무수한 고통을 당했지만, 어쨌든 우리 땅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바빌론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서, 이스라엘의 지도층 모두, 엘리트 계층 모두를 바빌론으로 이송해갔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남겨진 사람들은 모두 하층민이었고, 지도층들은 전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의 이방문화와 동화시켰습니다. 완전히 혼을 빼어서, 바빌론 사람으로 만드는 작전이었습니다. 끌고 온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혜택도 주었습니다. 예배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성전은 없지만 나름의 예전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을 유지하게 했습니다. 그 대신 바빌론의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게 하는 동화정책을 썼습니다.
그리고는 지도층을 빼간 자리에 바빌론 사람들, 암몬 사람들, 이방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곳곳을 채워 놓았습니다. 인종을 섞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뿌리를 빼버리려고, 그 땅을 이방 신앙으로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돌아와서 성전을 다시 세우고 신앙을 회복할 때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이미 이 땅은 이방의 땅이었습니다. 옛날에 그리던 고향 땅이 아니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전혀 변화된 사람들, 변화된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70년 동안 용광로 속에서 달궈지기도 했고 얻어맞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도자기처럼 굽고 또 구워지기도 했던 그들이 고향 땅으로 갑니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던 사람들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심정일 것 같습니까? 이북 땅에서 살다가 분단 때문에 남으로 내려와 여기서 살고 계시는 수많은 이산가족들,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러면 그 고향은 완전히 변했을 텐데, 그대로는 있지 않을 텐데, 낯익은 사람도 없어졌을 텐데, 이제 거기 고향에 가서 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고 싶은 충동, 그리움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만, 가서 어떻게 할런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좀 보십시오.
야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보낸다. 복을 주리라는 약속으로 너희들을 보낸다. 내가 번영을 약속하여 너희를 보낸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런 복의, 번영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떠납니다. 떠날 때 그들이 준비할 것은 한 가지, 야웨 하나님만 섬기기로 하고 그분만 모시는 것입니다.
그 땅에 다시 들어간 사람들의 노력, 사회를, 성전을, 국가를, 민족을 다시 세우려는 그 노력은 눈물겨운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 결실을 오늘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신약 서신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 고향에 돌아가려는 사람들, 번영을 약속받은 사람들에게, 갑옷을 입고, 무장하라고 합니다. 무장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허리띠를 둘러야 할 텐데, 허리띠 이름을 진리라 이름하는 띠를 두르십시오. 적의 공격이 심할 테니, 가슴막이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정의라 이름하는 가슴막이를 하십시오. 돌아다녀야 할 것 아닙니까? 신발을 신어야 할 텐데, 그 신발은 평화의 신발이어야 합니다. 활로 창으로 찔러올 때 막을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할 텐데, 그 방패는 야웨 하나님 신앙이라는 이름의 방패여야 합니다. 머리를 다치면, 큰일납니다. 투구를 써야 할 텐데, 구원이라 이름하는 투구를 쓰십시오. 때로는 공격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창이 필요할 겁니다. 창의 이름은 성령,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창입니다. 이게 에베소서에 주시는 사도바울의 권고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무장하고 가면 됩니다.
사실 경동교회는 복 받는 이야기, 복을 비는 이야기를 하면, 조금 겸연쩍지요? 그런 얘기는 아주 보수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로 알고 있죠?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우리도 복 받고 싶지 않습니까? 복받고 싶으시죠? 받으십시다. 받는 방법이 뭔 줄 아십니까? 그대들의 허리에 진리의 허리띠를 띠었는지, 거짓의 허리띠를 띠었는지, 허리띠를 제대로 띠면 복 받습니다. 기복과 축복은 차이가 있습니다. 기복은 뭐냐 하면, 허리띠를 거짓의 허리띠를 띠었든지 말았든지 물질적 복만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허리띠는 반드시 진리라는 허리띠를 띠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의 가슴막이가 아니고 정의의 가슴막이가 있어야 합니다. 전쟁의 신발이 아니고 평화의 신발이어야 합니다. 불신의 방패가 아니고 신앙의 방패여야 합니다. 멸망의 투구가 아니고 구원의 투구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창이어야 합니다.
거짓과 불의와 전쟁과 불신으로 점철된 이 사회를 보고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창을 들어서 그런 평화는 거짓 평화임을 폭로하십시오. 그런 평화를 깨뜨립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을 현혹시키는 그런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런 거짓되고 가증스럽고 불의한 전쟁지향적인 불신의 평화는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검으로 깨뜨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평화를 이루라.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다.”
복 받고 싶으십니까? 이렇게 가십시다. 이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복, 하나님의 번영의 복입니다. 이 복을 우리는 북방에까지, 휴전서 이북에까지, 이 땅 곳곳에, 우리 가슴속 구석구석에 전파해야 합니다. 왜 복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복 받는다고 선포하십시다. 그러나 에베소서 말씀처럼 진리와 정의와 평화와 신앙, 이것으로 복 받을 수 있다고 말합시다. 분명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제가 대학생일 때, 유행이 있었습니다. 머리도 길게 기르고 반체제적, 반문화적 사고를 했습니다. 저도 머리를 굉장히 길게 기르고, 곱슬머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히피 냄새를 낸 겁니다. 얼마 있다가 히피가 없어졌고, 머리를 기르던 청년들이 머리를 짧게 깎고서, 도시에서 소위 도시 전문직종 직장인들이 되었는데, 미국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시골을 떠나 도시 냄새를 피우면서 직장에 다니는 신종 직업인을 여피족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또다른 “족”이 생겼다고 합니다. 부부가 결혼은 하되 애는 낳지 않고, 둘 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둘 만의 세계를 가꾸는 사람들을 딩크족이라고 한답니다. 이런 저런 족속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데이빗 부룩스라는 사회학자가 요즘의 세계에는 “보보”족이 있다고 합니다. 보보의 첫 글자 “보”는 보헤미안(Bohemian)의 “보”라고 합니다. 오늘날엔 예전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직장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세계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역사에서도 가장 많이 움직인 족속이 있었습니다. 보헤미안 족속들입니다. 지금 체코 프라하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하기 백 년 전에 성서도 자기들 말로 번역했고,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기면서 핍박을 받으면서 옮기고 또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이 후에 경건주의 운동과 실생활 운동을 결합시킨 족속들이 보헤미안 족속들입니다. 교회사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족속들입니다. 이 후예들이 지금 세계 각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곳에 정착하지 않으나, 주시는 명령에 따라 곳곳을 전전한 것입니다.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라고 하는데, 보헤미안과 같은 나그네는 괜찮습니다.
보보의 “보”는 부르주아(Bourgeois)에서 따온 것입니다. 어디로 옮겨가서 살든지 간에 그 가치관은 철저하게 부르주아적인 사람들! 잘 먹고 잘살고 남에게 주지 않고, 철저하게 부르주아적 사고를 가진 채, 이해관계에 따라 옮겨 다니는 족속들! 그래서 보헤미안의 “보”자를 따고, 부르주아의 “보”자를 따서 보보족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도 보보족들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사회도 기동성 있고 움직임이 많은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도 굉장히 변모된 사회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그것을 부르주아적라고 명명하든, 자기중심주의라고 명명하든, 나만의 세계, 나만의 이기적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변해도 놓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성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보헤미안처럼 움직이며 이동하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은 세계적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랑의 삶 속에는 진리와 정의와 평화와 신앙과 구원이 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미안하지만, 보보족이 가진 부르주아적 가치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가치관은 십자가라에서 나타난 자기희생적 사랑의 가치관, 나사렛 예수의 가치관이라고 믿습니다.
움직이며 사십시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움직이며 사십시오. “예수” 할 때의 “예”자 하고, 보헤미안의 “보”자를 합쳐서 “예보족”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서, 평화가 아닌 것을 평화라고 말하는 오늘의 세계, 불의를 정의라고 외쳐대는 거짓된 사회, 이런 사회에 진정으로 예수의 가치관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번영이라는 복을 받습니다.
이 복은 민족이나 나라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이 복을 용감하게 전하십시다. 그리고 자를 것은 칼로 자르십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진실과 평화와 공의를 심으십시다. 그래야 우리는 번영이라 이름하는 미래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복을 여러분에게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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