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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대인의 베데스다 /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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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현대인의 베데스다
[성경본문] 요5:1-9
 

정신과 의사에게 한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발작을 하면서 기물을 파괴하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간호사 두 사람을 불러서 가까스로 진정을 시킨 후에 진료를 시작하려던 의사는 환자가 오른 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손을 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펼 수가 없어서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서 손가락을 하나 둘 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을 펴니까 딸그랑 하고 밑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퍼렇게 녹이 슨 동전이었습니다. 그 환자는 지금까지 자기 존재와 동전을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동전을 잃어버리면 자기 존재가 전부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가 와서 칼로 찌르고 이것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이걸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보존해야 할까, 하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매일을 시달렸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동전을 움켜쥐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입니다. 현대는 우리를 잘못된 것에 집착하게 하고 거기에 말려들게 하여 결국에는 파괴시키는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무한한 소유를 위한 추구,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소명(召命)"이라고 막스베버[Weber, Max] 는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서 베버는 오늘날 서구자본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근본과 철학을 만들어준 셈입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시간을 아껴 쓰고 노력한다면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는데, 일한 것만큼 얻게 되는 과실은 자연히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이것을 법적으로 보장한 것이<소유권 절대의 원칙>으로서 오늘날 서양의 민법의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개인의 소유를 보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많은 소유를 축적하기 위해 밤잠 안 자면서 일하거나, 최선의 노력을 하게 되고, 그 결과 현대 산업 사회는 발전을 거듭해왔음을 부인 할 수 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사조 속에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가져다 준 부정적인 현대의 모습입니다.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개인이나 기업이 소유권에 대한 집착을 극대화하여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가능만 하면 더 많은 부(富)를 추구하였고, 마침내 사회병리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부정부패, 불로소득, 부동산 투기 등으로 인한 일확천금 등이 그 문제 거리가 되는가하면 "아무개 게이트"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도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 고위 공직자들의 과다한 재산 보유가 국민들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심각한 진통을 불러일으킨 사회병리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소유를 향한 무한한 집착증"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급속하게 추진된 근대화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가난의 한(恨)풀이"라도 하듯이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고,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물질적 소유 즉 돈에 대한 지나친 동기를 부여했던 게 사실입니다. "잘살아 보세", "하면 된다"는 기치아래 정신 없이 뛰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물질중독증, 즉 물신론(Fetishism)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것만을 향하여 정신 없이 달려온 게 오늘입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하나의 원인은 돈을 벌 줄만 알고 어떻게 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한 전통적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서구사회와 다른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흔히 조선 왕조 때의 <청빈 사상(淸貧思想)>이나 <안빈낙도(安貧樂道)> 등 가난을 견디는 법만 강조되었고, 그 가난 속에 고고하게 살아가는 <선비정신>을 배워왔던 것입니다. 돈을 갑자기 많이 벌게 되었을 적에 어떻게 쓴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지침이나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졸부가 된 수많은 사람들이 기껏 과소비를 한다는 것이 사슴뿔, 낙타발바닥, 매미, 뱀 등을 사먹는데 쓰고, 철없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돈을 주어 오렌지족(族)을 만들며 이태리 산(産) 대리석을 위시한 사치낭비를 통해서 자신의 열등감을 과잉 보상하려는 심리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설탕이 입에 달고 좋지만 과하면 성인병을 가져오고 치명적 합병증을 가져옵니다. 돈이나 물질이 좋지만 이것이 과다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게 되고 마침내 집안의 불화, 형제간 재판질, 성적 탐닉, 퇴행적 쾌락추구, 분수에 넘는 정치적 야망 등이 뒤따를 수 있고, 마침내 망하게 됩니다. 이제는 지나친 "소유욕"을 잘 조절하고 열심히 일해서 돈은 벌되 이것을 어떻게 유용하게 쓰는가를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머리는 쓸수록 빛이 나고, 몸은 단련할수록 튼튼해지듯이 돈이나 재화도 잘 사용할수록 남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과거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가난했던 시절의 근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작정 가지고자했던 욕망의 세월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그 때의 나 자신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코끼리 목에 10m 끈을 묵어 놓으면 코끼리는 10m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이때 11m 지점에 먹이를 놓게 되면 그것을 먹으려고 발버둥치지만 닿지 않으니까 결국 시도를 포기합니다. 이렇게 여러 날 된 뒤에 끈을 풀러 놓아도 코끼리는 10m 지점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옵니다. 더 이상 가면 목이 졸라지고 고통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이 코끼리와 같은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에 앉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경험만 믿으면서 막연한 성공의 욕망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이 사람은 진정한 미래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자비의 집"이라고 불렸습니다만 적어도 오늘 본문을 보면 실제 그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에 자기들의 운명을 맡기고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으로 예수님이 지나가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이제나저제나 천사가 내려올까 기다리고 있고 그 베데스다 연못이 움직이기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실제 천사가 내려온다 하고, 물이 동한다고 하더라도 오늘 기록된 눈먼 맹인이나, 다리를 부르르 떨면서 지내고 다리를 절면서 지내는 사람이, 빨리 그 연못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 연못에는 두 번째로 들어가면 낫지도 않는답니다. 무조건 첫 번째로 들어가야지 낫는다고 합니다.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래도 병이 있더라도 동작 빠른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래도 남보다 병이 덜 중한 사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간단한 병들, 무좀에 걸린 사람들, 쌍꺼풀 수술한 뒤 후유증을 앓고 있는 아줌마, 귀 뚫다가 귀에 염증이 생긴 분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어요. 정말로 중병에 걸려서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 일어나지 못하는 앉은뱅이 같은 사람들은 못 가에 전혀 들어가지 못합니다. 완전히 딜레마입니다. 이런 모순이 있는 곳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베데스다는 병자를 치유하는 장소이지만 정말 치료를 급박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장소입니다. 왜 이 베데스다에 사람들이 모입니까? 병이 낫기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어떻게 하든지 못에 들어가야 병이 나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건강해야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물론 누가 옆에서 동작 빠르게 집어넣어 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다면 간병인도 지쳤을 것입니다. 하루에 한 번 정도 들러서 돌아보고 했겠지요. 그러니 언제 물이 동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잠깐 집에 들러서 가족들 밥이라도 챙겨주러 간 사이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또 다시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제일 빠른 사람 하나가 낫는 것 구경이나 하면서 수년을 기다릴 참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엄밀하게 말하면 건강하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비교적 건강한 사람이 먼저 나음을 입는다. 이것이 베데스다의 딜레마입니다. 중증 환자에게 양보하면 좋을 법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자리를 내어 주기는 싫은 것입니다. 그래도 좀 건강한 사람이든 생전 물에 한 번 들어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중증환자이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우글거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의 딜레마는 오늘 날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순종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마약도 끊고, 더럽고 추한 것을 끊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어요. 주께 나아와서 주께 부르짖고 헌신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그런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교인들의 가정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딜레마 같은 것이 있어요. 저 사람에게는 돈이 좀 있었으면 하고 안타까운데 돈이 없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이 필요한데 지식이 없습니다. 어떤 가정에는 화목이 있었으면 하는데 결정적으로 그 화목이 없습니다.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이 베데스다는 얼른 보면 구원이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철저한 절망이요 좌절이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얼핏보면 살기 좋은 세상 같고 무엇이든 더 가져다 줄 것 같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픔이 있고, 실망도 있고, 슬픔도, 애달픔도, 상처도, 배신도 있는 세상입니다. 이 베데스다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가면 치유가 있고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마는 실상은 치유보다는 절망과 슬픔이 훨씬 더 많은 곳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매년 해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안 되요. 그러면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하나님,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기어서라도 갈 수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를 다른 방법으로 구원해 주시고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고 자기를 빨리 포기했어야합니다. 지금까지의 자기생각, 자기방법, 그것은 굳어진 과거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이걸 벗어 났어야했단 말입니다.

자, 이제 보십시오. 베데스다의 구조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는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면 "예 낫게 해 주세요"라고 말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즉시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간적인 고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기를 버리지 못한 대답을 합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7절입니다."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게 무슨 대답입니까?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을 수 있는 길은 이 베데스다에 들어가는 방법뿐인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으니 건강한 당신이 나를 들어가게 좀 도와 주십시오" 이 말하고 다를 게 무엇입니까? 인간이 그렇습니다. 비단 38년 된 환자이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삶의 조력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 필요 없다 싶으면 언제든지 코푼 종이처럼 버리고 맙니다. 자기의 의를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아요. 38년 정도 시도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끝까지 자기 방법대로 하겠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에 또 다른 무슨 대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네 낫기를 원합니다" 이 한마디면 족합니다. 지금까지의 내 방법이 뭐 중요하며 잘난 내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네가 죄 용서 받은 자로 은혜가운데 살며, 진실한 사람으로 살며, 남을 사랑하며 헐뜯지 말고, 잘난 척 하지말고 살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또 무슨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만의 사는 방법이 있으니까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남이 나를 몰라주니까 잘난 척 이라도 해야겠으니까 좀 모른 척 하십시오"할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힘을, 자기의 방법을, 자신의 틀을, 자신의 비뚤어진 성품을 버리지 않는지 아십니까? "내 힘, 내 방법, 내 생각, 내 것" 이것 버리지 못하면 내 삶에 변화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고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네 과거, 네 방법, 네 자신이라는 미신에 의존하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한 인간의 구차스러운 목숨을 얼마쯤 연장시켜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로 하여금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여 늘 절망했고, 늘 실패했던 그를 전혀 새로운 곳으로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복잡하고, 절망이 있고, 때로는 아픔과 슬픔이 있고, 실패의 쓰라림이 있는 베데스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찾아오십니까? 우리들의 베데스다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까? 나의 고집하는 것들을 내 던지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분만이 나를 바꿀 수가 있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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