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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만함이 머물게 하라 / 전 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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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함이 머물게 하라
전도서 3장 9~13절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제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ㄷ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골로새서 1장 16~20절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요, 죽은 사람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살아나심은 그가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려고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충만함을 머물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8~2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지도자 한 사람이 와서, 예수께 절하며 말하였다.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를 따라가셨다. 제자들도 뒤따라갔다.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그 여자는 속으로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에 이르러서,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모두 물러가거라.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무리를 내보낸 뒤에, 예수께서 들어가서,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이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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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을 댕기기 시작한 데에는 그 동안 중세 교회가 썩었고 부패했다는 냉정한 분석과 이성적 판단 그리고 그에 따른 분노가 작용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앞에 벌어진 세상사에 대한 합리적 분석과 객관적 연구 그리고 냉철한 계획만으로 개혁에 나서는 경우는 거의 드문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작업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만, 일단 개혁에 나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확신이, 확실한 체험이 그의 영혼에 불을 붙여야 개혁을 소명으로 삼고 나설 수 있습니다. 루터 역시 회심을 해서 사람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경험을 했습니다. 루터는 한밤중에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갑자기 덮친 폭우 속에서 벼락을 맞아 옆에 걷던 친구가 죽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공포의 경험 가운데에서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자연의 진노, 거기에 친구는 희생양이 되었는데, “제가 무엇이기에, 저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나님, 번개에서 피하여 이렇게 살게 해주십니까!” 친구가 벼락 맞아서 죽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벼락에서 구원받는 실존적 경험을 하면서 깨닫습니다. 하나님, 이 교회를 새롭게 하시려고 저를 살려두신 것이 아닙니까! 루터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사에 감사하며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을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계기로든지 예수를 믿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 일에는 감격의 경험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나 늘 우리를 새롭게 하는 감격의 원천으로 평생 동안 남아 있습니다. 이 경험은 무슨 경험입니까? 오늘 성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극적인 경험입니다. 이 경험을 가리켜서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라고 성서 말씀은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면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충만함이 머물게 하십시오. 골로새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함을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사람마다 충만함을 누리십시오. 충만함을 맛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고, 기쁨을 경험하고 온몸과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께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사람에게, 인간됨의 충만함이, 소명의 충만함이, 은사의 충만함이 임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벼락 가운데에서 살아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이런 경험들이 많습니다만,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라는 사람 역시 그랬습니다. 웨슬리는 여섯 살 때에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낳아서부터 요한 웨슬리는 병을 앓았고, 드디어 의사는 병이 너무 심해져서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망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그때에 설상가상으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웨슬리의 아버지는 성공회 신부로 사제관에서 살았습니다. 대체로 유럽의 사제관은 굉장히 큽니다. 제가 유럽에 살 때 목사관이 왜 이리 큽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우스운 이야기지만, 본래 목사님이나 성공회 신부님들은 결혼하면 아기를 많이 낳는답니다. 또 여러 사람을 상담도 해야 하고 그래서 크게 짓는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요한 웨슬리의 아버지의 사제관도 굉장히 컸다고 합니다. 웨슬리가 여섯 살 되던 해 어느 날 밤에 그 큰 사제관에 불이 났습니다. 모두 도망쳐 나왔는데 요한 웨슬리만 못 나오고 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불길이 온 집을 덮쳐 이제 웨슬리가 죽는구나 했는데, 동네 사람 중 하나가 사다리를 끌고 가서 혼자 방에 있던 웨슬리를 구해냈습니다. 웨슬리가 살아서 나오자 아버지가, 성공회 신부님이 즉석에서 설교를 합니다. “사랑하는 이웃 동네 형제 자매 여러분,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나의 여덟 자녀를 구해 주셨습니다. 집이야 타도록 내버려둡시다. 불 끄지 맙시다. 나는 여덟 형제가 살아난 것으로 만족합니다. 특별히 사형선고를 받은 우리 아들 요한 웨슬리가 산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불구덩이에서 건짐 받은 사건은 웨슬리에게 계속해서 신비스런 경험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웨슬리가 이후에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을 제가 읽습니다. “저는 여섯 살 때 집이 불타는 것은 멸망하는 세상이 불타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영혼은 불에 둘러싸인 어린아이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길에 타락한 영혼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영혼을 감싼 집이 불타므로, 죄악된 세상이 불타는 것을 매일 같이 느낍니다. 한밤중에 불타는 집에서 구출된 저는 이제는 모든 사람을 악한 세상의 불구덩에서 건져서 하나님께 이끌어야겠다고 매일 같이 결심합니다. 이 결심은 여섯 살 이후 한번도 제 마음에서 지워 버린 적이 없습니다.” 동생 찰스 웨슬리는 형이 불구덩에서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한번은 예배에 참석했다가 자기 속에서 불이 붙는 경험을 했습니다. “내 속에서 난 불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령의 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내 죄악된 몸이 완전히 불타고, 완전히 성령의 불로 거듭나면서 나를, 이전과 다른 자아를 새롭게 찾았습니다. 과거에는 나 나름대로 옳다고 하는 율법적 의를 찾고 있었으나 성령의 불로 나를 태운 이후부터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닮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동생의 고백입니다. 형 요한 웨슬리와 동생 찰스 웨슬리는 손에 손을 잡고 전세계를 누비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교회사에서 말하는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그분들을 따라 생겨난 교회가 요즘의 감리교라는 교회입니다. 루터는 벼락의 불을 통해 종교개혁의 시발을 걸었고, 웨슬리는 불구덩에서 건져냄을 통해서 부흥운동의 시발을 걸었습니다. 구약의 지도자 모세는 호렙 산에서 활활 타는 가시덤불의 불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끄는 일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역사 중에는 불의 이야기와 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 때처럼 홍수로 세상을 다 멸망시키고 성령의 비둘기를 통해 무지개를 주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물로든 불로든 우리에게 있는 죄악스런 것은 다 씻기고 다 태워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불, 새로운 물, 이것으로 다시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령의 불이 오셔서 우리를 태워 버리기를 기도합시다. 이 불로 옛 사람을 태워 버리고, 새 사람으로 뜨겁게 되어 다시 한번 일어납시다. 지금은 날씨가 추워서만 겨울이 아닙니다. 실직과 퇴출과 노숙의 겨울입니다. 다시금 성령의 불이 오시면, 혹시 루터처럼 번개가 치면, 불이 나면 우리의 과거를 태우고, 이 추위를 몰아내고 다시 한번 새로운 따뜻한 봄을 맞이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로 태움을 받는 것, 성령을 통해서 불태움을 받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다. 충만한 성령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우리는 완전히 새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우리 경동교회도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다.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불로 달구어지는 겁니까?

골로새서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을 받고 싶은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충만한 성령을 그리스도에게 맡겨 놓으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나와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성서는 다시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룬 분이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로 나아와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성령 충만이 얼마나 많은 왜곡을 초래했습니까? 성령의 은혜를 충분히 받았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외면하고 희생의 봉사를 마다한다면, 그것은 성령 충만과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냥 충만을 받았다는 심리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골로새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충만함이 머문 곳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돌아오십시오. 십자가로 돌아올 때에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 상태,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화해가 없는 충만은 가식입니다. 평화가 없는 충만은 기만입니다. 화해와 평화가 없는 성령 충만은 성령의 충만이 아니라 자기 이기주의의 충만입니다.

깨진 것은 다시 복구해야 합니다. 끊어진 것은 철로가 되었든 도로가 되었든 다시 이어야 합니다. 망가진 것은 다시 고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평화라 이름하고 화해라 이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한테 오면 성령 충만함을 받고 함께 화해된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리스도를 통한 충만함의 경험을 혈루병 걸린 여자의 기적을 통해 설명합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자는 예수님의 손은 고사하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을 수 있다고 믿고 그 옷자락을 만집니다. 옷자락 하나만이라도! 굉장한 믿음입니다. 옷자락만으로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혈루병이 물러가고 그녀는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조질서의 본래적인 충만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 불의 충만을 받을 수 있는 계기는 루터가 겪은 벼락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만찬예식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찢기신 몸을 먹고 마시는 그 한 가지 결단만으로도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병이 낫는 것도, 육신의 병이 낫는 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에 본래 주어진 충만함, 바로 그것의 회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회복, 평화의 회복, 공동체의 회복 이것이 참다운 성령 충만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만 가능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충만의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여러분의 충만함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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