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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감사하고 높이리이다 (시 118: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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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감사하고 높이리이다(시 118편24-29) 
 
세상에는 "날"이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바쁜 날, 한가한 날, 생일 날, 죽은 날, 태어난 날, 약혼한 날, 결혼한 날, 좋은 날, 나쁜 날, 속된 말로 표현하면 재수 없는 날, 운이 좋은 날, 뭐 손이 없는 날, 등등, 날이란 개념이 너무 다양하고 많습니다. 성경에도 이 "날"이라는 표현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창조하신 날, 심판 날, 구원의 날, 은혜의 때, 추수의 때, 구속의 날, 재림의 날, 주의 날, 여호와의 큰 날 등, 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날들 속에서 우리 인생들은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이 날들을 날마다 대하며, 살아가야, 실패가 없는 성공적인 인생의 삶을 누리게 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처럼 많고 많은, 바닷가 모래알만큼이나 많고 많은 인생의 날들 중에, 가장 귀중하고 값지게 여겨야 할 날은 곧 다름 아닌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정하신 날" 입니다. 그러면 왜 이 날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처럼 중요한 날입니까?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24절)

오늘 본문 24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로다." 한마디로 여호와께서 정해주신 이 날은, 우리 인생이 기뻐하며 즐거움을 얻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이 날이 소중하며 귀하다는 말입니다. 이 날은 보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악의 세력을 멸하시사, 죽음에서 승리하신 날, 즉 The Lord's day,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날이요, 악의 세력에는 멸망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구원과 형통을 기도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25절)

오늘 본문 25절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한마디로 주의 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구함으로 형통함을 얻게 되는 날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주의 날을 정해주신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시기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날을 정해 주신 것은,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주의 전에서 기도하여 구원받고 형통하게 해 주시기 위해 주신 날입니다.

축복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24절)

오늘 본문 26절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축복은 주의 집으로부터 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이일이 너무나 좋아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신앙이란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하면 한낱 그림의 떡입니다. 다읫과 같이 주의 성전으로부터 임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시고, 주의 전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 성전에 영원히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희생을 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묶지 않으면, 온전히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제물이 살아서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희생을 제단 뿔에 단단히 묶으십시다. 그럴 때 하늘로부터 축복의 응답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의 날은 바로 이것을 행하는 날입니다.

주께 감사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27절)

이에 대해 오늘 본문 28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50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소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나의 하나님, 내가’'나의 하나님, 내가’로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신앙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는 믿음의 사람인 시편 기자가 하나님과 자기와의 내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피상적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영,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하나님은‘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라 주관적이신 분이시요,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우리 교회, 내 교회’'우리 나라, 내 조국’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심으로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며, 이렇게 될 때만이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어떤 성도의 간증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나 간증이 신앙을 갖거나 믿음을 성장케 하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 그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실린 어떤 기독교 대학 교수의 글입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많은 인사를 받는다. 그러나 거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허나 때로는 의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한 감사가 담긴, 나를 가르쳐 주시는 나의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알고 진심으로 인사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면 교수도 그 학생 신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고 기억 속에 입력을 시키며 깊은 마음을 주게 된다.”

추수감사예배는 매년 연례 행사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은혜를 주셨고, 지금도 은혜를 주시며, 미래에도 은혜를 주실 나의 하나님께 깊이 감사 드리는 특별하고도 뜻깊은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사해 주시고, 크고 작은 고난, 삶의 구석구석, 순간 순간에 은혜를 베풀어주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과 감사로 관계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 삶을 만들어 주신 내 하나님을, 내 주님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내가 감사하리이다

감사란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다음주일에는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으시고 쏟았던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기독교인들의 최대 치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의 결핍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찾고 회복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내일에는 복되고 건강한 나,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매사가 감사로 귀결되나 불평하는 자에겐 모든 일이 불만으로 끝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생은 불만 속에서 피폐한 삶으로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산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을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족도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독일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없이 궁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냐.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둑질해가게 그냥 놔두시다니…”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헌데 그의 옆자리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된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명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하였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 받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올바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입니다.

왜 없는 것만을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십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이기는 능력에 의하여 증명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대략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데 기억을 관리하는 것은 대뇌의 후두부이며, 여기에 저장된 기억은 되새기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를 지나면 잊혀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것으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분리되며, 전자는 의지를 사용해서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고, 후자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절로 떠오르는 기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조건을 조사하고, 찾아내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그냥 나도 모르게, 당연히 저절로 내 속에서 살아나야만 합니다.

동아일보에 실렸던 "아버지는 누구인가?"란 글을 우리 교회 집사님이 홈페이지에 올려서 보았는데 그 글을 소개합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 때--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 때--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 때-- 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 때- 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 때- 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 때-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 때-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 때- 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前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 때-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 때-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助言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後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車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높이고 감사를 드리는 가정에 아버지가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높이리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는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임에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높이는 만큼 높아지십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절).”“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결정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 것이 될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은 내 생활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의 하나님을 내가 높인다면 허락하신 모든 은혜와 축복이 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시라 주관적이신 분으로,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닌 나의 하나님(my God)이십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선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감사란 삶의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감사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原語)는 "토다" 입니다. 그 말의 본래 뜻은 "내 던진다"는 뜻입니다. 감사는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전(全) 존재(存在)를,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것을 생각하라....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고 하셨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땅한 행동입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그 행위를 옳게 하는 것”입니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십시오. 잠잠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거기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감사보다 불평이 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을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불평은 사라지고 찬양과 감사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진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 자매를 아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자매는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혼자서는 거동 뿐 아니라,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중증 뇌성마비 환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비록 건강은 없어도, 가진 지식은 없어도,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지었습니다. 그 중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감사절에만 감사하는 자여, 범사에 감사하라. 고난 주간에만 주의 고난을 기억하는 자여, 주 죽으심 언제나 기억하라. 위급할 때만 기도하는 자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쁠 때만 기뻐하는 자여, 항상 기뻐하라."

만약 이 고백이 정상적인 사람이 한 고백이라면 아마 많은 사람이 "너나 잘해, 너는 그렇게 하니?"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증 뇌성마비 송명희 자매는 여러분에게, 아니 저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감사절에만 감사하는 자여, 범사에 감사하라."

'어쩌면 사랑이란 잃었던 시력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란 글이 있습니다. 발자크가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라고 말한 대로 우리에게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요, 그 무관심은 사랑이 없기 때문일진대, 사랑만이 우리의 감긴 눈을 뜨게 하는가 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에 대하여 좀더 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할 때 진정 내가 감사하고 높이는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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