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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 요일 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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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어느 교회에서 노인대학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 목사님이 노인분들을 다 모아놓으시고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아오시면서 물론 즐거운 때도 있었겠지만 힘들고 괴로울 때도 많으셨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또 물어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인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천국은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고 영화로운 곳임을 믿으십니까?"
모두가 큰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서 마지막 질문을 또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천국에 더 기다릴 필요 없이 오늘 밤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사람은 한 번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웃기만 할뿐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천국이 좋은 곳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당장 떠나라고 하면 선뜻 내켜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제 사실만큼 사셨으니까 그만 사시고 천국에 가시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좋게 여기시겠습니까? 아마도 섭섭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에 대해서는 막연한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죽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혼자서 무섭고 캄캄한 곳으로 가야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스데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동료 유대인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 속에서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고 평안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는 지극히 평안한 모습으로 죽음의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선교사님이었고,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나일강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 아프리카 잠비아의 깊은 밀림을 탐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심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수행했던 토인 몇 사람이 의사를 모시고 오기 위해서 급히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한참 뒤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리빙스턴이 당연히 침대 위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리빙스턴은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낀 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잠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기척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리빙스턴은 기도하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아마 그저 세상에서 오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것보다는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느라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서기가 주저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생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했던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지라도 우리는 주저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해서 사도 바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딤후4:7∼8에서 했던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언제 부르실지라도 이러한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되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상고하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해바라기가 늘 태양을 바라보면서 살듯이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내 몸과 마음, 온 정성과 뜻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첫번째 이유를 살펴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각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오면 자동적으로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사라지면 어두움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러니 어찌 한 마음으로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등산을 아주 좋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혼자서 깊은 산 속을 헤매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습니다. 그는 더듬더듬 거리면서 깊은 계곡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디고 말았습니다. 그는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는 여러 바퀴 굴러 떨어지다가 가까스로 나뭇가지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발로 더듬거려 보았습니다. 때마침 발꿈치에 작은 돌부리 하나가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발꿈치로는 작은 돌부리를 디디고, 두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쥐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팔에서 힘이 빠집니다. 불현듯 그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기도하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캄캄한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소리질렀습니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그 때 메아리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손을 놓아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놓았다가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뼈도 추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손은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밤새도록 나뭇가지를 놓치지 못하고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좌우를 분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밑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바로 한 치 밑이 평지였던 것입니다. 그제야 그는 두 손을 놓고 땅 위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는 목놓아 한참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발을 쭉 뻗고 편안히 잤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습니다. 어두워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 쥐어야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세상 줄을 쥐고서 살아갑니다. 돈줄을 쥐기도 하고, 권세의 줄을 쥐기도 하고, 또 지식의 줄을 쥐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붙들고 있는 세상 줄을 놓아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줄을 놓으라고 말씀하십니까? 바로 가까이에 하나님의 사랑의 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마십시다. 참 평안이 없습니다. 등산 갔던 사람처럼 밤새도록 잠도 못자고 헛수고만 할뿐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던 세상 줄을 놓을 때, 자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11:28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평강이 비로소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을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두번째 이유를 살펴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도 요한은 죄악의 뿌리를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둘째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셋째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갈수록 그 단계가 고차원적으로 높아집니다.
첫째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동물적인 욕구입니다.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5:19∼21에서 육신의 일을 열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둘째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동물적인 욕구라면 안목의 정욕은 인간적인 욕구입니다. 조금 차원이 높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간이나 가룟 유다처럼 물질을 탐할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이성을 탐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라고 자랑했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였습니다. 그 배는 빙산과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바다에 완전히 빠지는데는 2∼3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이었습니다. 배 안에는 구명보트가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등객실의 손님들과 여성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습니다.
마지막 구명보트가 배에서 내려올 때였습니다. 그 보트에 타도록 되어있던 여성 한 사람이 선실로 향해서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원은 깜짝 놀라 못가게 막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은 울면서 통사정을 했습니다.
"내 객실에 보석상자를 깜빡하고 그대로 놓고 왔어요! 내가 가서 그것만 가져올 테니까 제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선원은 어쩔 수 없이 5분간의 여유를 주었습니다. 선실로 뛰어가는데 1분, 거기서 보석상자를 찾는데 1분,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데 1분, 도합 3분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5분이 지났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5분을 더 기다렸습니다. 10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구명보트는 배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 여인이 돌아오지 못했겠습니까? 자기의 보석상자만 쥐고 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닥에 보니까 온갖 패물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줍다가 시간을 허비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안목의 정욕 때문에 배와 함께 바다 속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가장 고차원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내세우며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에게 중년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거기에 비친 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서는 황홀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것도 죄인가요?"
목사님은 웃으면서 솔직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죄라고 하기보다는 오해요, 착각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심해지면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리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러했습니다. 또 일본의 천황이 그러했습니다. 또 북한의 김일성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가지고 하와를 유혹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습니다. 먹음직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입니다. 보암직했습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결국 하와는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똑같은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 육신의 정욕입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낼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네가 내게 절을 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물리치고 이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5:16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부패한 육신을 좇아 행하지 말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 주도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비로소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교회 일에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른 새벽 교회에 오셨다가 교회 일 하시느라 때로는 밤늦게 돌아가실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남편 분이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권사님에게 책망했습니다.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거요? 집에 좀 붙어있어요! 교회가 밥 먹여주오?"
권사님이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럼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여고동창생들 만나서 고스톱이나 치고 댄스홀이나 다니면서 춤이라도 춰야 직성이 풀리겠어요?"
그 말을 듣더니 남편되시는 분은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알겠소. 교회일 열심히 하구려."
그렇습니다. 시간이 많으면 문제입니다. 마음이 한가한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빈집은 언제나 위험하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을 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비로소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번째 이유를 살펴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의 것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구름이 흘러가듯이, 시냇물이 흘러가듯이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가듯이 잠시잠깐이면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잠시 있을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생쥐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우연히 구멍을 뚫고 들어간 곳이 치즈창고였습니다. 치즈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먹어도 다 못먹을 치즈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생쥐들은 행복했습니다. 매일 들락날락하면서 치즈를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구멍을 뚫고 치즈창고에 들어갔는데 치즈가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생쥐들은 발광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치즈를 옮겨갔어?"
여러분,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그것이 본래 자기들의 치즈였습니까? 자기들이 남의 것을 훔쳐먹어 놓고, 누가 자기들의 치즈를 가져갔느냐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본래 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간 동안에 내가 임시로 맡아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속담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기들은 태어날 때 손을 쥐고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는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인가 움켜쥘 것처럼 손을 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손을 쥐고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펴고 죽습니다. 빈손으로 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 해서 본래부터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내가 맡아서 쓰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다. 영원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것, 신령한 것, 위엣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영원히 거하는 삶을 살아갑니까? 17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왜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히 거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은 죽을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는 묘비를 세우지 마시오. 내 무덤에는 가급적이면 흔적을 남기지 말아주시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시간까지 롬8:18의 말씀을 암송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는 이 말씀을 15번 외우고 마지막 16번째 외울 때, 마지막 끝 부분을 다 암송하지 못하고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떠나는 세상을 아쉬워한 것이 아닙니다. 다가올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대감 속에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지금도 제네바에 있는 존 칼빈의 무덤에 가면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면서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의 첫 자만 따서 "J, C"라고만 간단히 적어놓았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잠시잠깐뿐인 이 세상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세상을 사랑하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영원히 거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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