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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 창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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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창5:21-24)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가정의 달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과 더불어서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늘 함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래 전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런던의 템스 강변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산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 귀퉁이에 한 거지노인이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를 하며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낡아빠진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는 신통치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거지노인이 벗어놓은 모자에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웬 낯선 외국인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거지노인이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거지노인은 다 떨어진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신발도 떨어져서 너덜너덜했습니다.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해서 헝클어져 있었고, 또 수염도 깎지 못해서 덥수룩한 상태였습니다. 보기에도 처량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외국인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측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지금 제 수중에 준비된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이올린을 좀 다룰 줄 하는데, 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잠시 몇 곡만 연주해 드리면 안되겠습니까?"
거지노인은 잠시 쉬기도 할 겸해서 그 낯선 외국인에게 낡은 바이올린을 건네주었습니다. 외국인은 그것을 손에 쥐고서 천천히 활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낡아빠진 바이올린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걸음을 멈추고서는 외국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거지노인은 자기가 벗어놓은 모자를 들고서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모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노인의 모자에 넣었습니다. 순식간에 돈이 수북히 쌓였습니다. 그것도 한 푼 두 푼 던져주는 동전이 아니었습니다. 돈의 단위가 높았습니다. 모두가 지폐를 꺼내어서 모자에 넣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서 경찰관이 놀라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경찰관마저도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에 매료되어 그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관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거지노인의 모자에 넣었습니다.
이제 연주가 끝났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쳤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사람은 바로 파가니니이다!"
이탈리아의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귀재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의 명연주자입니다. 그 분이 런던에 연주차 왔다가 호텔에 머물러 있으면서 잠시 짬을 내어 템스 강변을 산책하기 위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쌍한 거지노인이 바이올린을 힘겹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대신 몇 곡을 연주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명연주자 파가니니의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이었지만, 그것이 누구의 손에 잡혀 연주되느냐에 따라서 그 소리는 엄청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거지노인이 그것을 연주할 때는 형편없는 소리였지만, 파가니니의 손에 그것이 들려져서 연주되어질 때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악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생을 통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의 삶을 맡기십시다. 특별히 우리의 귀한 자녀들로 하여금 아무렇게나 살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맡길 수 있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자녀의 삶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그 옛날 에녹의 삶을 통해서 부모된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어떤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되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에녹은 언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므두셀라를 낳은 후."
에녹은 65세에 그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 때부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 전에는 그의 신앙심이 깊지 못했을 것입니다. 되는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그러다가 내 아들이 나쁜 영향을 받으면 안되지!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지! 그래야 내 아들 므두셀라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지 않겠는가?"
그는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난 뒤에 이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녹의 삶에 있어서 그의 아들 므두셀라의 출생은 놀라운 축복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에녹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시127:3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하나님이 주신 상급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자녀를 소홀히 하고 귀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딩크(DINK)족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Double Income No Kid"의 약자입니다. 부부가 서로 맞벌이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는 필요 없습니다. 아기를 낳지 않고 그저 자기들만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극히 귀한 선물임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에녹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키우면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을 우리가 좀 더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깊이 헤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평소에는 서로 바쁘니까 가족들끼리 잘 모이지 못합니다. 각자 자기 일에 바쁘다고 해서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꼭 주말인 안식일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서 반드시 함께 만찬을 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만찬을 들면서 유대인들이 빠뜨리지 않고 언제나 계속해서 지키는 순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서 뜨거운 마음으로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강제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물어봅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기도를 해 주고 싶은데 너희들이 내 기도를 받겠느냐?"
아이들이 받겠다고 하면 그 옛날 이삭이 야곱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했던 것처럼, 또 야곱이 그 아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기도를 했던 것처럼, 아버지도 자녀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마음껏 축복하는 기도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 기도를 받겠느냐?"
이렇게 질문을 했는데 아이들의 마음에 부모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싫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망신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거리낌없이 마음껏 자녀들을 축복해 줄 수 있도록, 부모들은 일주일 내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아버지를 소개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의 스승이셨던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말 앞에 "스승"이라는 말을 붙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뿐만 아니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가르쳐주신 나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명을 우리 자녀들 앞에서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부모 노릇을 바르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 동안 우리 자녀들 앞에서 부모로서 믿음의 본을 바르게 보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우리의 자녀들 앞에 믿음의 감화를 보일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에녹은 어디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에녹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까? 에녹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과 동떨어져서 자기 혼자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녹은 자기의 가정 생활에 충실하면서 경건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일터로 나갔을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가정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가정과 경건은 절대로 별개가 아닙니다.
여러 해 전에 시한부 종말론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휴거를 준비한다고 하고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가정을 내팽개쳤습니다. 직장도 내팽개쳤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에녹처럼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참된 경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5:18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삶이 무엇입니까? 방언이나 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기도해서 병이나 덜컥 낫게 하는 등의 행위가 성령 충만한 삶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성령 충만의 삶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 속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경건의 모습을 보이면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난 뒤에 남편과 아내의 삶에 대해서, 또 부모와 자녀의 삶에 대해서, 상전과 종의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 L. Mood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해도 결코 불행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내 사랑하는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서 경건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존경받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경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의 아버지의 직업은 광부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거칠었겠습니까? 술만 마시면 자녀들을 두들겨 팹니다. 아이들이 잘못해서 맞는 것이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본래 성질이 난폭해서 아무런 이유없이 아이들을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나중에 신학을 했습니다. 교수가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버지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종종 차라리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왠지 내게는 아버지라고 하면 몽둥이를 들고 나를 쫓아와 두들겨 패던 아버지의 끔찍한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욕을 먹는 것입니다. 부모된 우리가 아이들 앞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보이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도 나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로서 존경받는 모습이 될 때,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 절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완전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를 만나 주시고, 언제나 우리와 대화를 나누기를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대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언제까지나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가 부모로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경건과 가정과 일터는 별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은 언제나 경건이 실천되는 거룩한 가정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에녹은 언제까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까?

23∼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삼백 육 십 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65세때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실 때까지 300년 동안 계속해서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은 365세때 승천했습니다. 긴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래 살지 않았습니까?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오래 살았습니다. 아들에 비하면 에녹은 짧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미없이 지나치게 오래 살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노아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는 오래 살았습니다. 오래 살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녀들 앞에서 술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추태를 부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에녹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적절한 때에, 적당한 나이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녹은 자기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난 뒤에 300년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를 비롯해서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 에녹을 생각하면서,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한 경건한 모습을 기억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에녹의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경건한 모습만 본 것입니다. 그러니 에녹의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절로 경건의 훈련을 잘 받았을 것입니다.
세 살짜리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만나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살밖에 안된 꼬마들이 서로 뽀뽀도 하고 안기도 하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망측했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야단쳤습니다.
"못된 것들! 벌써부터 못된 짓을 하면서 노는구나!"
할아버지가 지나가고 난 뒤에 아이들은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피! 우리가 무슨 한두 살 먹은 어린 아이인줄 아나?"
자기들은 세 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말을 씁니다.
"우리가 한두 살 먹은 어린 아이입니까? 왜 날 더러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한두 살 먹은 어린 아이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는 천지차이입니다. 세 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 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
그 나이면 알 것 다 압니다. 어릴 때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자녀를 기르고 있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랍비에게 하루는 부모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세 자녀를 바르게 키울 수 있겠습니까?"
랍비는 그들을 데리고 정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무 세 그루를 지목하면서 그것을 뽑아보라고 했습니다. 첫번째 나무는 쉽게 뽑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은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나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뽑았습니다. 심은 지 그만큼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나무는 두 부부가 힘을 합쳐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뽑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뿌리가 땅속에 깊이 박혔기 때문입니다. 랍비는 부부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나무를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래된 습관은 뿌리가 깊이 박히기 때문에 쉽게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갖도록 잘 길러주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합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 대학을 졸업하면 사각모를 씌워줍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때 말고, 또 사각모를 씌워주는 졸업식이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중·고등학교 때는 씌워주지 않습니다. 유치원을 졸업할 때만 씌워줍니다. 어릴 때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 앞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우리가 세 살짜리 어린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어린 아이들이 사도신경의 뜻을 알겠습니까? 또 주기도문의 뜻을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그들의 삶 일평생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신학생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사도신경의 '저리로서'가 무슨 뜻인지 압니까? 주기도문의 '대개'가 무슨 뜻인지 압니까?"
신학생들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믿음으로, 말씀으로 양육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그들의 삶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녹의 삶을 통해서 부모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지, 세 가지로 살펴 보았습니다.
첫째로, 에녹은 언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뒤부터였습니다.
둘째로, 에녹은 어디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산 속에서 산 것이 아닙니다. 가정 생활 속에서, 일터에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셋째로, 에녹은 언제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결단하고 나서부터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실 때까지 변함없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올리어졌습니다. 에녹은 죽는 그 순간에도 자기 자녀들에게 귀한 믿음의 감화를 보여준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에녹과 같은 결단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에녹과 같이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살리라! 내 자녀들 앞에서 믿음의 본을 보여주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리라!"
이러한 거룩한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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