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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에 합당한 삶 /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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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합당한 삶(엡4:1-6)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교회 8대 담임목사님이셨던 김익두 목사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본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남들이 다 알아주는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의 지저분한 삶을 다 청산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익두가 죽었습니다!"라는 자신의 부고장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김익두가 변했을까?'라는 의아심을 품고 일부러 그를 시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심스럽게 그를 향하여 작은 돌멩이를 던져 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노골적으로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서 그에게 끼얹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님은 모든 것을 참고서 과거처럼 난폭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철에 목사님은 무악재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교통수단이 변변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길을 올라갔습니다. 이제 다 올라갔습니다.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데, 웬 술취한 청년 한 사람이 다가와 다짜고짜 목사님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더니 무조건 목사님을 두들겨 패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저 가만히 맞고만 계셨습니다. 한참 때리던 청년은 맞는 상대방이 대꾸도 하고 반항도 해야지 신이 나서 두들겨 팰텐데, 그저 가만히 맞기만 하니까 제 풀에 꺾여서 때리던 손길을 멈추었습니다. 그제야 목사님은 청년의 손을 꼭 쥐고서 물어보았습니다.
"이제 다 때렸습니까? 도대체 왜 나를 때렸습니까?"
목사님이 본시 유명한 불량배인지라 얼마나 팔 힘이 세었겠습니까? 그러니 청년은 내심 기가 꺾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른 척 하고 짐짓 언성을 높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보다 먼저 올라와 기분 나빠서 때렸다! 왜 어쩔래?"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누군지 알고 그러는 것입니까? 내가 바로 김익두라는 사람입니다."
그제야 청년은 목사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청년은 싹싹 빌었습니다.
"아이고, 형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사람을 몰라보았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놈아, 예수는 내가 믿는데 복은 네가 다 받았구나!"
만일 목사님이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안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길로 청년은 반쯤 죽었을 것입니다.
"이놈아, 너 살고 싶거들랑 잔소리하지 말고 날 따라와."
그러면서 목사님은 청년을 부흥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로 청년도 새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도 육신을 가진지라 깡패의 기질이 되살아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이놈, 죽은 김익두야!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아직도 울리지 않는데 왜 벌써부터 살아서 일어나려고 하느냐? 좀 더 죽어라 이놈아!"
그러면서 자신을 죽이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듭난 생명을 주셨습니다. 생(生)은 곧 명(命)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지금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감옥에 갇혔습니까? 죄를 지어서입니까? 아닙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다보니까 주를 위해서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늘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주를 위해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침내 주를 위해서 순교의 피까지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습니다.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이 길을 나선만큼, 끝까지 이 길을 가겠다는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약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1950년대 말 우리 나라에 오셨던 미국의 선교사님 가운데 쟌 크레인(John Crane)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의 한국명은 구례인(具禮仁) 선교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총신에서 조직신앙을 강의하시면서 종종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조선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조선을 영어로 쓰면 어떻게 됩니까? "Chosen people"로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크레인 목사님이 안식년을 맞이해서 미국으로 잠시 귀국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시골에 있는 어떤 교회를 맡아서 돌보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어떤 남자성도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급히 좀 도와달라는 전갈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부랴부랴 뛰어갔습니다. 크레인 목사님이 보니까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건은 이러했습니다. 이 남성분이 자기의 두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강에 낚시를 갔습니다. 아버지가 낚시를 하는 동안에 어린 두 자녀가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만 것입니다. 두 어린 아이의 시체를 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이에 집에서는 큰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그의 아내는 불길을 잡지 못하고 그만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에 타 죽은 아내의 시신과 물에 빠져 죽은 두 아이의 시체를 앞에 놓고서 그는 어쩔 줄 몰라 오열하면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크레인 목사님도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목사님은 정신을 차리고서 그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이제 형제는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형제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신앙을 저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비참한 사건을 보면서 형제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더 두려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서 형제는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그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는 각오와 결심이 약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울처럼 때로는 감옥에 갇히는 한이 있고, 때로는 우리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이 길은 우리가 끝까지 걸어가야 될 길입니다.

둘째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본문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다섯 가지 덕목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둘째는 온유입니다. 셋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넷째는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하나되는 것입니다.
첫째, "모든 겸손과"입니다. 겸손하되 모든 면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윗사람에게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에게조차도 겸손함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가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이나 생각하는 것조차도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겸손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극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천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본받아서 부름을 입은 우리들도 모든 면에서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온유로 하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나의 감정, 나의 말, 나의 행동을 자제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Power under control"입니다. 온유하다고 해서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마음대로 행사하지 않고 자제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은 얼마나 온유하셨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생각하면서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도 온유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못난 사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모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오래 참음으로"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높고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눅9:5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극심한 환경과 어려운 처지를 다 참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까지 오래 참으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속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까지 인내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오래 참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입니다. 여기서 "용납하고"라는 말의 헬라어 원뜻은 담요를 던져준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허물을 가리우라는 것입니다. 수치를 덮으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담요를 던져줄 때 그저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주로 세 단어가 사용이 됩니다. 첫째로, 에로스(Eros)가 있습니다. Take의 사랑입니다. 그저 받기만 원하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남녀간의 육적인 사랑을 뜻할 때 이 말이 주로 사용됩니다. 둘째로, 필리아(Philia)가 있습니다. Give and take의 사랑입니다. 내가 받은 만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형제간의 또는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됩니다. 셋째로, 아가페(Agape)의 사랑입니다. Give의 사랑입니다. 헌신적으로 주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가치와 자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 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도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덮어주신 담요를 자꾸 걷어내려고 하지 말고, 이 추운 계절에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의 담요로서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됨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미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고전12:13을 보십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는 우리의 하나됨을 방해하고 깨뜨리려고 하는 악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것을 깨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열심을 가지고 힘써 지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평안의 매는 줄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몸을 묶을 때 허리띠가 필요하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평안입니다. 나와 너 사이가 평안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너 사이가 평안하지 못하고 불화할 때, 하나됨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가 있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다섯 가지 덕목을 거꾸로 추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래 참기 위해서는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다섯 가지 덕목은 이런 관점에서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됨입니다.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작은 모든 겸손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온유를 낳습니다. 온유는 우리를 오래 참음으로 인도합니다. 참다보면 사랑 가운데서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다섯 가지의 덕목이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 아름답게 꽃피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왜 우리가 하나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4∼5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의 모든 근본적인 요소가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인 우리도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 가운데 하나된 것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모두 몇 가지가 하나로 설명되고 있습니까? 일곱 가지입니다. 완전수입니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모든 근본적인 요소들이 동일하게 한 가지라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인 우리들도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몸이 하나이요"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 한 몸을 이루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마땅히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된 것을 힘써 지켜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성령이 하나이니"입니다. 내가 받은 성령이 다르고, 네가 받은 성령이 다르겠습니까? 다 한 성령입니다.
셋째, "한 소망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다같은 소망을 품고서 살아갑니다.
넷째, "주도 하나이요"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다섯째, "믿음도 하나이요"입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신앙을 고백합니다.
여섯째, "세례도 하나이요"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삼위 거룩하신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일곱째,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만유 위에 계셔서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만유를 통일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다스려 주십니다. 만유 가운데 계시면서 지금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를 이루는 모든 근본적인 요소들이 하나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인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파티를 배설하고서 주변에 있는 모든 이웃들을 초청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마지막으로 수영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 집에는 호수처럼 엄청나게 큰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집주인은 손님들에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수영장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1등으로 헤엄쳐 온 사람에게는 큰 상을 주겠습니다.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나의 상속자인 무남독녀 외동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을 주겠습니다. 두번째는 내 재산의 절반을 줄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값진 보석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겠습니다. 참고로 이것을 팔기만 하면 전 가족이 3대째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엄청나게 귀한 보석입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금방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집주인은 사람들에게 이런 위협적인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수영장 안에는 열흘 동안 굶긴 악어 50마리가 들어있습니다. 또 물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3분내로 죽을 독뱀 100마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거기다 이 속에는 독고기도 300마리나 들어있습니다. 피 냄새만 맡으면 공격합니다. 아마 5분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수영장에서 한 걸음씩 물러났습니다. 아무도 감히 뛰어들 용기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용맹스럽게 뛰어들었습니다. 모두가 그의 용기를 보면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는 필사적인 각오로 수영해서 무사히 도달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왔습니다. 집주인은 약속한 대로 그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내 딸과 결혼하겠습니까? 아니면 내 재산의 절반을 드릴까요? 그렇지 않으면 값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드릴까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 등뒤에서 나를 밀었는지 나는 그것부터 알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의 경주장에서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친 뒤에 우리에게는 큰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줄까? 의의 면류관을 너에게 줄까? 큰 상을 너에게 줄까?"
그러나 이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결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는 악어와 같은 존재가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독뱀이 우리를 물 수도 있습니다. 독고기가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등뒤에서 우리를 밀어서 이 길을 걸어가게 하셨습니까? 누가 우리를 불러서 이 길을 걸어가게 하셨습니까? 뒤를 돌아보니 그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보살펴 주고 계십니다. 만유를 통일하시며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주관해 주십니다. 만유 안에 계시면서 지금도 우리와 임마누엘로 같이 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이 신앙의 경주장에서 우리가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하십시다. 온유하십시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오래 참읍시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십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킵시다. 그리해서 금년 한 해 우리 모두가 평안한 가운데 더욱더 든든히 서는 복된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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