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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는 마음 /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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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마음(마20:20-28) 


마 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비가 오고 나면 날씨가 추워집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이따금씩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고려말 공민왕 때의 사람이었던 문익점입니다. 그 당시에는 겨울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얼어죽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서운 죽음의 계절이라고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한 때 문익점은 사신으로 중국의 원나라에 파견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했습니다. 날씨는 중국이 더 추운데 이상하게도 얼어죽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있는데, 그들은 목화를 재배해서 그것으로 따뜻한 솜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익점은 나라를 위해서,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마음으로 목숨을 건 결심을 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측 국경 경비대의 검문은 아주 살벌했습니다. 원나라에서도 목화를 재배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목화씨를 가지고 나가다가는 죽음을 면키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는 궁리 끝에 자기가 쓰는 붓뚜껑 속에 목화씨앗 세 알을 몰래 감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씨앗을 심고 가꾸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국적으로 목화가 재배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문익점은 자기의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물레 만드는 법과 베 짜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우리 나라 사람들도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공직자들에게 섬기는 마음만 있으면, 그들이 자기의 직권을 남용해서 자기 주머니만 채우는 일은 사라질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야 부도가 나든지 말든지 그저 자신의 권리만 찾으면 된다는 식으로 격렬하게 시위하고 파업하는 일들도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절로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게 되고 또 절로 부흥하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해서 우리 속에 있는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지워주시고, 그 대신 섬기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게 되셨습니다.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의 어머니를 데리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부탁을 했습니다.
"주의 나라에서 둘 가운데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앉게 해 주옵소서."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계십니까?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시기 위해서 올라가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은 어떠한 자리입니까?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을 요구한 것입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님은 너무나 답답하신 나머지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의 일군을 뽑기 위해서 투표를 합니다. 왜 우리가 집사가 되고, 또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려고 합니까? 물론 딤전3:1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러한 말씀을 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그 직분을 가지고자 하는지,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사실만 알았지, 왜 예수님이 올라가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왜 장로가 되어야 하고, 내가 왜 권사의 직분을 받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면,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질책하실 것입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섬기는 마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크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이 으뜸이 되기 위해서 쓰는 방식을 살펴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본문에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식들이 세 가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높은 사람 곁에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예컨대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이나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등을 크게 확대해서 벽에 걸어놓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이만큼 유명인사인 줄 알아라." 은연중에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세상적인 방식을 썼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20∼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님이 가운데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존귀하신 분입니다. 누구나 다 우러러보는 귀하신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좌우편에 야고보와 요한이 앉아 있습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면서 그들을 얼마나 대단하게 여기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자기들의 어머니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육신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이모가 되는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비유하자면 친인척을 동원해서 인사청탁을 한 것입니다. "우리 아들 한 표 좀 찍어줘! 우리 딸 한 표 좀 찍어줘야지!" 세상적인 방법을 쓴 것입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큰 소리부터 치고 봅니다. "내가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기만 하면 그런 식으로 안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것입니다. 저렇게 할 것입니다." 하긴 무엇을 합니까? 하지도 못할 공략을 수없이 남발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일단은 큰 소리 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사로잡히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버려 두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예수님은 결국에 가서 야고보와 요한이 고난의 잔을 마실 것을 아셨습니다. 뒤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야고보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주를 위해서 순교 당했습니다. 칼로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힘 주시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그렇게나 으뜸이 되는 것을 소원하더니 결국은 예수님이 그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순교하는 일에 으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요한도 주를 위해서 핍박당하고 밧모 섬에 귀양을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일생을 살면서 고난의 잔을 다 받아 마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힘 주셔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결국에는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23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참 제자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절대적으로 순복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모습인 줄 압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섬기는 자의 마음으로 나를 낮추면서 섬겨야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24절 말씀을 보십시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왜 열 사람의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분히 여겼습니까? 따지고 보면 그들의 마음 속에도 똑같은 심리가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열 제자가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면 야고보와 요한,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분히 여길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도 똑같이 높아지고자 하는 심리가 있었으니까,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그만 화가 나고 질투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약합니다. 누구에게나 높아지려고 하는 심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셋째로, 세상 사람들은 권세를 휘두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전에 헤롯 임금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그런데 그가 불법적으로 얻은 아내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아주 멋지게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 쳤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너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그 때 헤로디아의 딸이 자기 어머니와 상의하고 난 뒤에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서 내게 주소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면 헤롯의 마음 속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큰 소리를 쳤으니까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고 싶어서 결국은 허락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권세를 휘두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가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리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 세상적인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로님이 되시고 권사님이 되신다고 해서 교회에서 큰 자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아니, 무슨 이런 사람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나?"
이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이 죄인이고, 다 똑같이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 곧 성령의 역사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누가 어떠한 직분을 맡게 되든지 간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 그들에게 힘을 주셔서 충성스럽게 그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주옵소서."
또 세상 사람들은 권세를 휘두르기를 좋아합니다. 의무보다는 권리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달라야 할 것입니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직분자의 의무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헌금의 의무도 있고, 전도의 의무도 있고, 또 자신의 집안도 잘 다스리는 등 의무가 많습니다. 그러나 목사인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예배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이 없을 때는 주일 낮예배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더라도, 집사의 직분을 받게 되면 주일 저녁예배는 출석하셔야 합니다. 또 권사님이 되시고 안수집사님이 되시면 삼일밤예배에 참석을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둥이라는 장로님이 되시면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다하는 섬기는 마음을 가질 때,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게 되고 절로 부흥하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찾으려고 하니까 교회에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내가 과연 직분자로서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없으신 분들은 이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 이번 기회에 뽑히지 않게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둘째로,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된 자는 누구인지 살펴봅니다.

26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크고자 하는 사실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으셨습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으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9:2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신앙의 경주에서도 우리가 상 받도록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과 세상 나라의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여러분, 세상 나라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편안하게 살고, 자기가 더 많은 권세를 누리기 위해서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 핍박당하는 일에 있어서도 큰 자가 되고, 고난 당하는 일에 있어서도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순교하는 일에 있어서도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동기가 서로 다릅니다.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높고자 하는 자가 높은 사람 가까이에 가려고 합니다. 큰 소리 치기를 좋아합니다. 권세를 휘두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여러분, 교회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여자 가운데 권사님이 큰 자입니까? 전도사님이 더 큰 자입니까? 남자 가운데 큰 자는 누구입니까? 시무장로님이 큰 자입니까? 은퇴하신 원로장로님이 더 큰 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교회대표인 당회장이 더 큰 자입니까? 모두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물질이 있어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섬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학식을 배웠다 할지라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섬기지 않습니다.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또 교회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27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스스로 낮추어서 종된 자가 으뜸이 된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이 잘되는데 샘을 내고 질투하는 종을 보셨습니까? 주인이 잘되면 종은 함께 기뻐합니다. 주인이 힘들어할 때는 종도 같이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을 나무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이 주인에게 대들거나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종은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너의 종이 되어서 섬기는 자의 자세를 가질 때 그 사람이 큰 자요, 그 사람이 으뜸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높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남을 낮추어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만 나면 그저 남을 흉보고 헐뜯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야 자기가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시간만 나면 불평하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간혹 "저 사람 정신병자 아니야? 어떻게 입만 열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드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높은데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약4:10의 말씀을 보십시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를 낮춘다고 해서 너무 마음 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나를 낮추는 것보다 내가 나를 더 낮추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마음에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이 칭찬해 주시고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큰 자는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큰 자는 무슨 직분을 가진 자가 아니고, 종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 곧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시니까요.

셋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2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의 왕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섬김의 삶만 사셨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기도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시면서 섬기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시면서 섬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가면서까지 섬기셨습니다.
여러분, 섬김의 극치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섬김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열 두 제자들,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몹시도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정말 자신들이 무엇을 구했는지 알지 못했다는 뉘우침이 마음에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마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따미엔은 몰로카이 섬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환자들은 그를 보며 건강한 사람이 왔다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 때 따미엔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스스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몸에 나병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저들 앞에서 '우리'라는 말을 비로소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우리라는 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몸에 나병이 번지면서 비로소 그는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와 같은 마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끝까지 낮추셨습니다.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2:5의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은 섬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섬기셨는지 빌2:6∼8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2:9∼11절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되고, 또 종된 자가 으뜸이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세상 사람들의 마음, 마귀의 마음을 이 시간 깨끗하게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섬기는 마음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뻐해 주실 것입니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지극히 높여 주실 것입니다.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섬기는 마음으로 돌아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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