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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이 구해야할 것 / 마 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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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이 구해야할 것
마태복음 6:25-33 


IMF 이후 우리 문화계의 풍향이 복고풍(復古風)으로 가면서 연극계엔 흘러간 신파극(新派劇)들이 다시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홍도야 우지마라'든지 '불효자는 웁니다' 등등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난날의 악극들이 기성세대들의 옛 추억들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조금은 과장되고 약간은 유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성세대들의 뇌리 속에는 그런 악극들이 옛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본 코메디 중에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한 토막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코메디에서는 아주 흔한 설정이긴 하지만 '순경이 도둑을 쫓는 장면'입니다. 순경이 도둑을 잡으려 쫓아가는 데 좁은 무대에 놓인 소품들 사이를 돌다 보니까 어느 새 '도둑이 순경을 쫓아가는 형국'으로 바뀌고 맙니다. 힐끔힐끔 돌아보며 도망치던 도둑이 마침내 순경 뒤를 바짝 따라잡게 되자 이번에는 순경이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도리어 쫓겨갑니다.

어려서는 재미있어서 웃고 말았지만 한 세상 살면서 보니 자꾸 그게 그냥 한 판 벌여 보는 우스개 짓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태를 상징으로 보여주는 웃지 못할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우리들의 삶이란 것이 그렇게 뒤집히고 거꾸로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분별없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네 삶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막고서 "돈이 먼저요 사람이 먼저요?"라고 묻는다면 일부러 어기대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답은 뻔할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돈이 먼저라고 하겠습니까? 어쩌면 그런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정말 '돈보다 사람이 먼저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세상인가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그런 세상'이라고 대답하는 게 솔직한 대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현실을 정직하게 살필진대 결코 우리의 현실은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더욱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서 가치를 측정하는 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사람이 돈보다 먼저'라는 말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그리고 부부 지간에 살인을 일삼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좀더 잘 살아보려고 만든 것이 돈인데 그 돈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비참한 궁지에 몰리고 있으니 결국 '도둑을 쫓다가 도둑에게 쫓기는 순경 꼴'이 된 경우와 같다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25절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또 30절 이하에서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을까에 삶의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여기며 사는 삶은 하늘 백성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은 신앙인다운 구함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의식이 자리잡아야 함을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삶의 기본요소인 의식주의 문제를 팽개치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가진 존재인 우리로서는 먹고 마시고 입고 거하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실한 직장인이 되어야 하고 알뜰한 주부가 되어야 합니다. 십계명의 제 4계인 안식일 계명처럼 '엿새 동안 힘써 세상에서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신앙인다운 올바른 의식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돈, 그래서 감히 하나님과 견주어지는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돈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 주님이 언급하시는 옷도 그렇습니다. 한 동안 '옷 로비 사건'으로 옷이라는 존재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만은 옷의 역사를 한 번 생각해 보며 옷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살펴보면 무엇이 문제인지가 금방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또는 어떤 필요에 따라서 옷을 만들어 입게 된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 옷을 걸치고 나오는 존재가 아닙니다. 벌거벗고 왔다가 벌고 벗고 가는 게 인생입니다. 인간이 맨 처음 입은 옷인 배냇저고리와 맨 나중에 입는 옷인 수의는 스스로 '입는' 옷이 아니라 남이 '입혀 주는' 옷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결국은 이 땅에 사는 동안만 사용하는 것이 옷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옷이라는 실체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독특성을 봅니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 많은 동물이 살고 있지만 옷이라는 걸 만들어서 입고 다니는 동물은 인간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아마 인간도 옷을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벌거숭이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짐승과 똑같이 벌거숭이로 살던 인간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옷이라는 걸 만들어 입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 그리고 왜 옷을 만들어 입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추측컨대 처음에는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추위를 느끼는 것이야 원숭이나 늑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었고 그래서 원숭이나 늑대와는 달리 옷이라는 물건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가 처음으로 몸에 걸친 옷은 넓은 나뭇잎 아니면 짐승의 가죽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맨 처음 옷을 만들어 입은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옷을 몸에 걸친 이유는 '벌거벗은 알몸을 가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학적 통찰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따서 먹고 눈이 밝아져서 보이지 않던 자신의 알몸이 보이게 되었고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창세 이야기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밝혀내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현재의 인간 상황을 근본의 자리에서 신학적으로 조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결국 사람이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 데는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는 얘기를 성경은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옷은 이른바 그의 '타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맨 처음 사람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옷과 인간의 관계에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옷가지고 우쭐거리는 사람도 없었고 옷 때문에 주눅드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옷은 추위를 막아주는 물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을 쫓던 순경이 도둑한테 쫓기고 돈을 쓰던 사람이 돈한테 부림을 당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옷과 사람 사이에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추위를 막아 주던 옷이 사람을 치장하는 쪽으로 발전하다가 드디어 사람을 차별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옷이 능력의 차이를 드러내 주는 상징이 되었고 곧장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 주는 표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옷이 사람들의 원초적 평등성에 흠집을 내는 물건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본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알몸을 보고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타락'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알몸을 드러내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둘 사이에 감추고 말고 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하루에 두 번씩 알몸이 됩니다. 별 일이 없으면 하루에 두 번은 어김없이 옷을 다 벗습니다. 특수 목회를 하는 이 목사님네 집에는 작은 기도실이 하나 있는데 내외가 기도하기 위해서 거기 들어갈 때면 옷을 모두 벗습니다. 그리고 알몸으로 앉아 고요한 가운데 묵상을 하면 몸과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알몸이어도 부끄럽지 않은 곳, 거기가 바로 인간의 낙원 에덴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 낙원에 살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러니 그것을 가려줄 옷이라는 게 도무지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하여 옷으로 수치를 가리고 이어서 그것으로 자기 신분을 과장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좋은 옷으로, 더 비싼 옷으로 자기를 치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주님께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의식주 문제를 신경 쓰지 말고 살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몸을 가진 그리고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인간인 이상 의식주 문제는 우리 삶에 절대적인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식주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올바른 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살되 음식보다 중한 것이 목숨이고 의복보다 중한 것이 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경이 도둑을 쫓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도둑이 순경을 쫓는 그런 해프닝이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러한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주님이 신신당부하실 정도로 우려하신 바처럼 우리는 목숨보다 음식을, 몸보다 옷을 더 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한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사는 걸까요? 주님은 그 이유를 '믿음의 부재'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탄식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입혀주시고 먹여주시는 하나님, 천대받는 까마귀도 먹이시고 들판의 이름없는 한 송이 들꽃조차도 입히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만물의 영장 인간을 먹이시고 입혀주시리라는 믿음이 없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 없음의 증거가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과 31절에서 주님은 이 '염려'라는 단어를 거듭 언급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불신의 씨앗입니다. 그러니 염려와 신앙은 우리 내면을 사로잡으려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의식의 서로 다른 차원입니다. 염려가 커지만 신앙은 작아질 수밖에 없고 신앙이 커지면 염려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가치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삶은 자연스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동보다는 의식, 표면보다는 내면이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그런 것에 무심하고 살라는 게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과 우선 순위를 정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는 목숨이 먼저요 그 목숨을 유지할 목적으로 그것들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라는 것이고, 의복보다 몸이 먼저요 그 몸을 유지할 목적으로 그것들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즉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수단이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앙인다운 의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아담이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은 그가 자신의 알몸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기록 뒤에 나옵니다. 옷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의 알몸을 부끄럽게 여긴 의식이 먼저입니다. 상대가 아내인데 알몸이 부끄러웠다는 얘기도 거꾸로 이제 더 이상 자기 앞에 있는 여인이 '내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인 아내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숨길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부부지간의 친밀한 관계가 무너졌을 때, 바로 그 때에 생긴 것이 옷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중목욕탕은 '공평무사의 땅'입니다. 벌거숭이가 될 때 사람은 똑같이 초라하고 똑같이 성스러운 모습으로 바뀝니다. 물론 얼굴에서 또는 몸짓에서 풍기는 인품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벌거숭이가 되면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장벽이 무력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옷'이라는 물건이 그만큼 인간 사이의 차별과 장벽을 만드는 데 공이 있다는 얘기도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그의 편지 2:1절 이하에서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하면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 그러한 믿음 없는 행동을 나무랍니다. 회당에 좋은 옷을 입은 자와 그렇지 못한 옷을 입은 자가 들어오자 교인들이 좋은 옷을 입은 자에게는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값싼 옷을 입은 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시하는 그림입니다. 믿노라 하지만 인간의 눈이라는 게 겉모습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옷보다 옷 입은 사람이 먼저요, 따라서 옷을 보기 전에 사람을 보아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겉에 차려입은 옷이 사람들 눈에 가려서 그 옷 속에 있는 알맹이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옷의 역사요 인간의 역사입니다. 사람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옷을 만들었는데 살다보니까 그 옷으로 말미암아 사람 사이에 차별과 장벽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보다 옷이 먼저 행세하는 웃지 못할 코메디가 순경과 도둑 사이처럼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막말로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적대시하고 속이고 오해하고 멀리하는데 '옷'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옷이라는 물건은 결국 따져보면 누에나 목화 또는 석유의 변화된 모습일 뿐입니다. 돈은 또 무엇입니까? 한 조각 휴지의 변형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니 '돈 때문에' 또는 '옷 때문에' 무슨 일이 벌여졌다는 말은 철저하게 수정되어야 합니다. 돈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옷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경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한다면 '옷'때문이 아니라 '옷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또는 '옷에 대한 집단 무의식적 편견' 때문에, 또는 그런 오해와 편견이 자신을 삼켜버리도록 내버려둔 '게으름'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왜 옷이 중요합니까' 라고 물으면 어떤 이들은 '옷이 날개 아닙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보다 먼저 날개 있는 것에 추락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날개를 달고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겠다는 말입니까? 어느 독설가는 좀 더 좋은 날개를 달려고 이리저리 최고급 샬롱을 몰려다닌 고관대작의 부인들의 행태를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날개는 똥파리한테도 있다...'


의식이 문제요 생각이 문제입니다. 주님에 의하면 이러한 인간의 고질적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올바른 삶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도둑에게 쫓기는 순경이 아니라 도둑을 쫓는 순경이 자신이라는 맑은 자각을 믿음은 우리에게 회복시켜 줍니다. 옷보다 옷을 걸친 몸이 먼저요 음식보다 몸이 먼저라는 중요하고 평범한 상식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 백성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일의 비중을 바꾸고 관심의 초점을 재조정하며 삶의 우선순위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수많은 일에서 우선 한가지 필요한 일로 관심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마음의 변화, 중심의 변화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염려 또는 불신에서 믿음에로 의식의 전환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중심의 변화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이 변화는 겉으로는 세상만사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세상만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음 하나만 바꾸면 모든 것이 다 바뀝니다. 내 삐딱한 시선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로 보입니다. 내 검은 색 안경을 벗으면 세상은 아름다운 천연색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1:18절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여러분의 마음 눈이 밝아지기를 내가 기도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내 눈이 어두우면 모든 게 어두울 뿐입니다. 거기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눈이 밝으면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내 삶에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방인이 아닌 신앙인된 당신 백성들에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먹고 마시고 입고 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더해주시는 것들입니다. 빈몸으로 이 땅에 온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주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인생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노력만큼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해주심으로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러기에 믿음 없는 이방인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믿음있는 신앙인들은 당연히 마음 중심을 하나님 나라로 옮겨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방인이 아닌 신앙인입니다. 땅의 백성이 아닌 하늘 백성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지금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구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 구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우선순위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혹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온통 마음 뺏기고 생을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렇게 분주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루를 구별하여 당신을 기억하는 날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정신없이 쫓기며 살기 쉬운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앞에서 삶이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고 자신의 삐뚫어진 삶의 초점과 우선순위를 재점검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덤으로 받는 인생임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압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더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덜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있는 것도 없게 하시고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능력의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내 능력을 의지하며 살 때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구할 것을 뒤로 하고 분주히 자기 힘을 의지하여 세상을 살아갈 때가 많았던 저희들의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저희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염려에 갇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로 초조해하며 살지 말게 하시고 참으로 믿음 안에서 먼저 구할 것을 구하고 우선할 것을 우선하며 사는 하늘 백성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 속에 저희의 삶이 새로워지는 은총을 경험하게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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