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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인생 이야기 / 마 25: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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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생 이야기 /  마 25:14-21


몇 년 전 수원의 한 큰 교회에서 '현대판 달란트 비유 체험'이라는 흥미있는 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 담임목사는 주일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에게 선교비 예산에서 1만원 짜리 신권을 한 장씩 나누어주면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돈 1만원씩을 믿음 안에서 드립니다. 부지런히 활용하셔서 그 열매를 간증문과 함께 교회에 헌금하시면 그 모아진 돈을 모두 선교비로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열매를 6주 후에 가져오게 했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교우들은 어떻게 할 줄 몰라서 고민에 빠졌으나 기도 끝에 이루어진 그들의 '사업'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조그만 커피숍을 운영하던 한 교우는 만원 어치 아이스크림을 들여놓고 그것을 커피에 곁들여 함께 판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찾는 손님들이 급격히 늘어나 한달 반 만에 25만 4천원을 남겼습니다. 어떤 요리솜씨 좋은 여 집사 두 명은 힘을 합쳐 2만원으로 직장인을 위한 '기도표 김밥'이라는 도시락을 함께 만들어 팔아 40만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또 한 장로 권사 부부는 바나나 파이를 만들어 판매하여 1만원을 1백 만원으로 늘렸습니다. 어떤 이는 고무장갑을 팔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구두닦이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모여진 돈을 다 모아 선교에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가지고 간 그 만원 권을 고스란히 되돌려 낸 이도 있었고, 그것조차도 내지 않은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그 과정이 감동적입니다만은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저들의 생각이 바로 성서에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착안해 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행사와 주님이 들려주시는 오늘 본문의 달란트 비유 사이에는 많은 차잇점이 있습니다. 먼저 저들의 행사는 '6주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달란트 비유에는 그 기간이 정해져 있지가 않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때가 언제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돌아오리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기간 동안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언제일지 모를 주인이 돌아오는 그날까지 주인이 맡긴 일을 잘 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인이 돌아와서 달란트를 배로 남긴 두 사람에게 하는 칭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한달 정도 일한 사람에게 충성되다고 하지 않습니다. 1년 동안 일한 사람에게 충성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신실하게, 한결 같이 일하는 사람, '충성', '신실'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단어입니다. 한 달 또는 1년이라는 정해진 기간 동안에는 할 수 있지만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인을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있기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올 한 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들이 있었습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 우리의 섬김은 어떠했습니까? 얼마 동안 신실하셨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 '이제 다가오는 연말과 함께 내 섬김의 사역을 접으리라'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우리는 이 비유 말씀이 어떠한 초대교회의 현실 속에서 주어진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머지않아 곧 도래할 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전망 속에 살았고 또 그렇게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어서 속히 임해야할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자꾸 지연되는 겁니다. 그러자 교우들 중에는 믿음이 흔들리고 의구심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있었고 이에 뭔가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도들이 저들에게 들고 나온 대답이 바로 이 주님께서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인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사도들은 교우들을 일깨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 그리고 주님이 돌아올 때 우리 각자는 주님 앞에서 자신들의 삶을 결산하게 된다, 그것이 언제 일어나든 그때까지 항상 맡겨진 일을 충성되이 잘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 비유는 초대교회의 종말 의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 그때까지 우리는 그분의 일을 선한 마음으로 충성되이 감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소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올해도, 내년에도, 다가오는 새 천년기에도 주님을 위해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충성되이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또 하나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은 그 교회가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돈은 1만원 짜리 지폐 1장씩이었지만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을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저들에게 맡겨진 것이 얼마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6000일 동안 번 돈, 그러니까 20년 동안의 품삯에 해당되는 거액입니다. 요즘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4만원 정도 칠 때 2억 4천 만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입니다. 그럼 계산이 어떻게 나옵니까? 첫 번째 종은 다섯 달란트를 받았으니 12억원 정도되는 돈을 받은 것이고, 두 번째 종은 5억원, 세 번째 종은 2억 4천 여만원을 받은 것입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충분한 사업자금이 되고도 남는 액수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도 결코 적은 것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주인은 그 교회처럼 종들의 돈 관리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약간의 돈을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재산'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여기 주인이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돈을 세 종에게 맡겼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초대 교회가 맡고 있는 책임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저들의 사역이 그저 한번 시험 삼아 해 보는 일이 아니라 주인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처럼 모든 것을 걸고 해야 하며 최선을 다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달란트 비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 교우들의 소명 의식'입니다. 주님의 이 비유는 소명의식에 투철한 삶을 독려합니다. 초대 교회는 나중에는 점점 다양한 계층이 들어오긴 했지만 처음에는 고전1:26절에서 보듯이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가문도 변변하지 못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직업도 화려한 것이기보다는 평범한 것으로서 주로 직접 농사를 짓거나 노동을 하여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내세울만한 것 변변치 않은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기신 일이라는 철저한 소명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든, 노동을 하든, 장사를 하든 그 하는 일들을 소명의식과 결부하여 살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맡은 일이 작은 일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절대로 하찮은 일이 아니며, 주인이 종들에게 전 재산을 맡긴 것 같이 하나님은 전 사업을 자신들에게 맡겼다는 의식을 갖고 살았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러했고 교회 밖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어디서나 성실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어떻게 하든지 돈을 많이 벌고 권세를 잡아 세상에서 인정받고 떵떵거리며 살아보겠노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그 한 마디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바를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많은 일, 큰 일을 맡는 것, 또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무슨 기적적이거나 열광적인 행동으로가 아니라 그들 하루하루의 신실한 삶으로 이루어진다는 사명감을 갖고서 참으로 선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선하게 살았습니다. 이게 바로 소명의식이요 이게 바로 개신교 정신입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발전하게 한 원동력을 Protestantism, 개신교 정신에서 찾았습니다. 사실 서구의 자본주의는 모두 칼빈의 개혁교회, 그러니까 우리 장로교가 성한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본래 자본주의란 좋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향락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 정신은 인간의 무제한적인 충동을 합리적으로 억제하거나 조절하는 것으로 이런 정신은 정직, 성실, 근면, 절제, 그리고 직업의 소명 의식 등을 강조하는 개신교 정신에서 유래되었는데 칼빈은 그 정신을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고유한 정신을 다 상실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식이 없어섭니까, 자본이 부족해섭니까, 기술이 뒤떨어져섭니까?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가운데 하나는 이런 소명 의식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표현으로 한다면 '장인 정신의 부재'라 할까요? 우리는 맡은 일을 신실하고 정직하게 해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그저 큰 것, 한탕 하는 것에만 열을 올립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사회는 어디에도 마음놓고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없는 불안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도 서울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도시 가스가 폭발하더니, 급기야는 씨랜드 화재 사건과 호프 집 화재 사건으로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모든 재난들은 무엇보다 우리가 소명 의식 없이 맡은 일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충성되게 감당하지 아니하고 그저 눈가리고 아웅식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일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일이란 지겨운 것이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그런 것입니까?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IMF를 맞아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던 사람들이 최근 경기가 회복되면서 다시 일자리를 얻고 있는데 그들이 다투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자리만 다시 찾은 것이 아니라 인생을 다시 찾았다...' 그러면서 그 전에는 그토록 짜증스러웠던 일들이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고 신이 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제사 일이란 것이 생계 수단의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일에서 소명 의식을 느낀다면 그들은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먼 곳에서 돌아온 주인은 맡은 일을 잘 감당한 두 종을 향해 "착하고 충성된 종아, 수고했노라, 잘 했노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에게 두 가지 상을 내립니다. 헌데 이 상이 무엇입니까? 이 상을 한 번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두 상 중의 하나는 먼저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종들이 맡은 일은 주인의 전 재산을 맡은 것이기에 절대로 적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적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맡길 '많은 일'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저들에게 더 큰 일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이 주인의 말이 저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그저 남의 일처럼 여기지 말고 우리가 그 종들이라 여기고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얼마 만에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맡긴 것으로 장사를 하여 두 배로 불리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시도 쉬지 못하는 나날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인이 돌아와 그에게 베풀 적합한 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 동안 참으로 수고 많았노라. 그토록 수고했으니 이제 그만 일손을 놓고 푹 좀 쉬게나...' 이래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주인이 그에게 주는 상은 '이제 그만 쉬라'가 아니라 '그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두 종이 주인의 이러한 말을 기쁘게 받았는지 곤혹스럽게 받았는지 본문은 더 이상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만은 제 생각에는 분명히 기쁘게 받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상은 휴식이나 금품이 아닙니다. 진정한 상은 그의 소명 의식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고 더 큰 책임을 맡겨 그 소명을 더 펼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자, 그 동안 수고했네. 이제 그만 됐으니 쉬게나...' 이랬다면 어떠했겠습니까? 더 큰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상급인 것입니다.

'함께 주님의 일을 하십시다' 할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은 손을 떼면 안됩니다. 사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주님의 일에 손을 떼는 순간부터 우려할만한 일이 생겨납니다. 몸은 편해도 영혼이 답답해지고 공허해 집니다. 허무가 밀려오고 삶의 기쁨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다 결국 실족의 위험에 처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인이 언급하는 또 하나의 상은 "와서 나와 함께 기쁨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끝입니다. 더 이상의 상이 언급되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또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종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곱절로 남겼으면 남긴 것의 절반만이라도, 아니 10분의 일이라도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12억으로 12억의 이윤을 남겼으면 하다 못해 1억이라도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5억을 남겼으면 5천만원이라고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그런 기색은 본문에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나와 함께 기쁨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주인은 저들에게 어떠한 물질적 보상보다도 영적 보상을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명 의식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봅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의 유무입니다. 소명의식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하찮은 일로 보일 수도, 고된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남이 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누릴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 교우들이 맛보았던 섬김의 기쁨이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나날의 일들에서 그런 기쁨을 맛보았고, 그런 기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구원의 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달란트 비유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듣는 인생만 소개되고 있는 게 아니라 안타깝게도 여기 또 하나의 인생,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받는 인생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그러한 책망을 받는 이유를 우리는 이제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앞선 두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반대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소명 의식이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명의식이 없는 자였습니다. 소명의식이 없었기에 그는 책임적이지도 못했고 소신껏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주인과의 관계에서 문책 당하지 않는 소극적인 방법만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받은 한 달란트를 그냥 고스란히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꺼내 가지고 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 봤자 주인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다 주인 것 아냐? 그런데 내가 왜 힘들게 일을 하나..." 이런 얄팍한 계산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를 '악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 악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을 듣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혜로운 듯 하나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25절에 보면 종은 주인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여기 당신의 것이 있나이다. 당신의 것을 받으소서...' '당신의 것', 이것은 너와 나의 분리입니다. 종은 당연히 주인의 것이건만 그는 주인으로부터 자기를 떨어뜨려 놓습니다. 이게 또한 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건 그만큼 그에게 자기중심성이 가득하다는 얘기입니다. 문제는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보게 한 그의 심성입니다. 자신의 굳은 심성이 주인조차도 굳은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지 못하고 한 요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끝이 이게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온 인생입니까? 그에게 내려지는 형벌은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밖으로 쫓겨나 후회 가득한 현실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인생의 종점을 맞아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더 큰 벌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일을 맡지 못하게 된다는 것과, 소명 가진 사람이 갖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생이 허전한지 아십니까? 보람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일에는 보람이 없습니다. 허탈과 공허가 밀려올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감을 가지고 살 때 거기엔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충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두 가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인생의 손실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이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각각 그 재능대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길 수 있는 충분한 재능들을 우리 각자에게 다 주셨습니다. 넉넉히 주셨습니다. 한 달란트 밖에? 무슨 말입니까? 2억 4천만원으로 못할 사업이 어디 있습니까? 핑계치 말 것입니다.

오늘 새 천년을 앞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자기 실존의 청사진을 그리게 됩니다. 일없는 무료한 새 천년을 맞지 마시기 바랍니다.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없는 세상 일에만 착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있는 것조차 다 빼앗기는 비극적 종말을 계획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장차 더 큰 일을 맡고 더 큰 기쁨에 겨워 사시는 그런 행복한 인생들의 반열에 우리 모든 영락의 권속들이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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