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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가 / 마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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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가  /  마 11:2-6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빈번히 쓰이는 대중적 유행어를 꼽는다면 그것은 아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작년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잭 니컬슨이라는 걸출한 배우가 주연한 헐리우드 영화의 제명이기도 합니다. 그 말이 우리 시대의 유행어가 된 것은 모든 것이 여의치 않은 이 IMF 시대에 '보다 좋은 것을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별로 좋은 일들이 없다보니 오히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희망사항을 역설적으로 외쳐보자는 심리가 그러한 유행어를 만들어 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돌아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그렇게 환호하며 외칠만한 일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 반가운 일보다는 곤혹스러운 일들이 비례적으로 더 빈번한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구호라도 한 번 멋지게 외쳐보자'는 보상심리에서 그 영화 제명이 우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유행어로 뜬 것일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며 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곳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만족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한 순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며 환호할 수는 있겠지만 평생을 한결같이 그렇게 외치며 살아가는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가 아니라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는 처지에 처해지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어차피 최선이 가능하지 않다면 차선을 바라며 살아가겠다는 심리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그 중간, 그러니까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중간지대를 오가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잠언 기자의 기도처럼 '너무 부하게도 마시고 너무 가난케도 마시고...', 바로 그 경계선에 서서 때로는 이쪽으로 때로는 저쪽으로 쏠리며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계선에 서고 보면 부단히 우리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물음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 것인가?...' '이대로 계속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이 자기 진단, 현실 진단의 물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필수적이고도 현실적인 물음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생이 계속되는 한 더 진지하고 집요하게 던져져도 좋을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물음 속에서, 또 이 물음에 대한 대답 속에서 우리는 진보와 퇴보, 성장과 소멸을 이루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1999년 후반기 들어 첫 번째 맞는 7월의 첫 번째 주일이자 지난 반년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한 해의 중간 지점에서 돌아보고 내다보며 회고와 전망을 갖는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물음이라면 역시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가'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좋은 삶이었던가?...', '지금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삶인가...', '앞으로 계속될 이러한 나의 삶이 참으로 보람된 삶이요 후회없는 삶일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들은 남은 반년을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여러분 중에는, 또 우리 마음 속 어느 구석엔가는 오늘 이 감사주일을 맞아 교회에 나오면서 '도대체 무슨 좋은 일이 있어 감사하나'는 마음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좋은 일이라곤 없던 지난 반년이었는데 무슨 감사거리가 있겠는가'는 푸념섞인 마음을 가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감사는 인위적일 수도 없고 수동적일 수도 없습니다. 감사는 자연스럽고 능동적인 것입니다. 누가 감사하라 해서 감사하고 감사하지 말라 해서 감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감사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 현실에 대한 긍정과 이해없이는 자발적인 감사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거기엔 불평과 원망 그리고 못마땅함이 자리잡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과연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던지고 있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지금 옥에 갇힌 몸으로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 것인지'를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며 묻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온 주님의 사자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메시아이신 예수를 먼저 알아보고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며 주님을 소개하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오셔서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도 분명히 증거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아주 뜻밖의 물음을 던집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주님의 입장에서 이 세례 요한의 확인성 물음이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음 속에는 짙은 회의와 의심이 깔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신다던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쉽게 말하면 '당신 진짜야, 가짜야'라는 물음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이런 물음을 던질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정말 믿기지 않는 관계에서 있을 수 없는 물음이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이 주님께 이러한 물음을 던진다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가 주님께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갈등은 '메시야의 일'에 대한 서로의 상이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물었다고 했습니다. 즉 '주님이 행하시는 메시야 사역들'이 세례요한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찌해서 이런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세례요한의 메시야관을 우리는 3:11-12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세례 요한은 메시아 사역의 주제를 '심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무엇보다 먼저 심판을 수행하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일'이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가차없이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릴 심판자의 모습,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생각한 메시야의 모습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불의의 세계를 벌하고 정의의 나라를 회복할 정의의 사자입니다.

그런데 점차 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귓전에 들려오는 메시야 예수의 사역 소식은 그러한 자신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께 가졌던 기대와 소문에 들려오는 메시야의 일들 사이에 너무도 큰 괴리와 불일치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심판과 정화를 기대했는데 정작 주님이 오셔서 수행하신 메시야의 일은 병고침과 인간 회복의 일들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세례 요한의 믿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세례요한에 의하면 메시야는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심판하여 정의를 위해 감옥에 갖힌 자신을 구해줄 자였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들려오는 소식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도 가지가지였습니다. 9:33절에 보면 군중들은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보고 놀라는데 반해 똑같은 사건을 놓고 바리새인들은 '악령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런 헛갈린 보고를 옥에 갇혀 듣고 있던 세례요한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스러움은 곧 무언가 헛짚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저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이 과연 메시야의 일들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이대로는 안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자신은 지금 습기 찬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메시아가 왔다지만 그 어떤 새바람도 불어오지 않고 세상은 옛날 그대로 흘러갈 뿐입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분이 왔는데 왜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왜 내 처지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그분께서는 내 삶을 변화시켜 주지 않는 것일까? 메시아가 오기 전이라면 앞서 간 선지자들이 당했던 고난을 나도 당한다지만 이제 분명히 메시아가 왔는데 그렇다면 이 불의의 옥문이 열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세례 요한의 문제는 너무 자신의 앎을 절대시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분명 메시야가 감당해야할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리와 구별짓는 심판이라는 사역이 메시야 사역의 본질적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분리와 구별은 재결합과 회복의 역사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신 것은 이 깨어진 세상을 재결합시키고 부서진 세계를 회복시키기 위함이었고 그 기초과정으로 심판과 구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 부분을 너무 크게 그리고 너무 최종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 또한 세례 요한과 같은 생각에 갇힐 때는 없습니까? '내가 그분을 믿는데 왜 내게 적절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합한 직업이 주어지는데 내겐 그렇지 못할까? 왜 질병의 치유가 나를 외면하는 것일까? 왜 내 사업은 풀리지 않고 점점 꼬여가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간섭도 없는 것일까?' 이런 의구심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입니다. 믿음을 경험하는 자리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일상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세례요한이 기대했던 것에 들어맞지가 않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가 기대가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자신이 세운 분명한 계획에 맞추어 척척 조립되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계획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계획을 포기하고 그분께 맞추어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일까?... 바로 이것이 옥에 갇힌 세례요한의 비장한 고민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아인 예수는 위대한 세상의 변혁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예수는 자기가 기대했던 사역을 감당하고 있질 않은 것입니다. 기껏 소수의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고 용기를 불어넣고 새 마음을 주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악인들과 불의한 자들을 소멸시키는 불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자신이 이루었던 대중적인 참회의 역사 또한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너무도 조용히 그 자신을 침묵 속에 감싸시며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은 형태로 가져가십니다. 그냥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을 진행해 갈 뿐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은 답답했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자가 감옥에 갇혀 있고 처형자의 칼날에 희생당할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정말 그가 메시아라면 이 불의를 끊고 그의 증인이자 가장 좋은 친구인 자신을 그 악한 처형자의 손에서 구해내야 할 것인데 그러나 현실을 그렇게 돌아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던 것입니다. '진정 당신이 우리에게 오시기로 약속된 바로 그분이십니까? 혹 저희가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 세례 요한의 물음은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의 발 밑 땅이 흔들리는 경험과 그의 가슴이 허탈해지는 가운데 제기된 물음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께 이러한 물음을 물어왔다는 것은 '비록 당신의 길이 이해되지는 않으나 그러나 그렇다고 당신을 간단히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을 주님께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슬며시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구나, 그는 아니었구나. 내가 헛수고를 했구나...' 그러나 요한은 어둡고 텅빈 허공으로 그의 질문을 날려보내지 않고 그 질문을 예수께로 가져갑니다. 이것을 누군가는 '절망적 신뢰'라고 표현했습니다만은 그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향한 요한의 역설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가 참으로 마지막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어떤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분께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사실 이 감옥에 갇혀있던 기간이야말로 세례요한이 그 어느 때보다도 메시야의 비밀에 가까이 가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실족하지 않고 이 위기를 극복해 낸다면 말입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들이 듣고 본 것 즉 소경이 보게 되고 절뚝발이가 걷게 되고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그에게 가서 전하라...' 여기 '듣고 본 것'이란 5-7장의 산상설교와 8-9장의 이적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내가 그다, 아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당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해듣고 세례요한이 잘 헤아려 스스로 판단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세례 요한이 기다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으로 놀라운 메시아의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자의 치유와 죽은 자의 부활은 유다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고 특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주님 사역의 가장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사야에 예언된 메시아의 역사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절뚝이며 살던 이가 바로 서서 걷고, 눈먼 이가 눈을 뜨고, 죄짐을 진 자가 죄짐을 벗고, 가난에 절망하며 살던 이들이 기쁨에 사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례요한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았으나 주님이 함께 하는 그곳에서는 그런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의 현장, 돌고도는 사건들의 기계주의적인 삶 속에 개입해서 주님은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메시야 사역의 현장을 세례 요한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께 기대했던 세계 혁명의 영상은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눈에는 세상은 그저 예전같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갑니다. 어떤 이는 높은 하늘에 대고 소리치고, 슬픔과 한을 품고 죽어가고, 불의와 부정 속에 세상은 혼란스러워져 갑니다. 세상은 그렇게 달라지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세상 한 복판에서 메시야로서의 일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감당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당신께 온 사람들을 그대로 떠나보내지 않고 계셨습니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공기로 그들을 감싸주셨습니다. 전에는 먹을 수 없는 돌이 빵으로 변하고, 근심이 새 소망을 위한 원료가 되고, 삶의 짐이 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오히려 삶의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요한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현실 속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 눈에 보여야 다 실제가 아닙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내 실패를 통해서도, 내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간다는 믿음이 세례요한에게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곧 이어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가도 주님으로 인해서 실족해서 떠나가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대개 자기가 그린 틀에 주님이 맞지 않은 경우입니다. 주님을 따르면 건강할 줄 알았는데, 주님을 따르면 편안할 줄 알았는데, 주님을 따르면 즐거울 줄 알았는데, 주님을 따르면 형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여전히 똑같을 뿐이다, 그런 상황의 지루함에 봉착할 때 슬그머니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7절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언급하십니다. 갈대는 3-4미터로 훌쩍 길게 자라는 식물입니다. 그러나 그 갈대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약해서 잘 상하고 부러지는 게 갈대요, 또 쉽게 흔들리는 것이 갈대입니다. 지금의 요한은 어쩌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그가 그런 갈대가 된 것은 주님을 자기의 틀 안에 가두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크신 주님을 자기 안에 가두려하고 자기를 초월하는 메시아를 다 아는 양 착각한데서 세례요한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한계입니다. 세례요한은 거기까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주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하시고 또 한편으론 '그러나 천국에서는 누구보다도 저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메시야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그래서 흔들리고 그래서 실족의 위기에까지도 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요한은 예언과 율법의 시대에 머무는 인물입니다. 요한은 말라기 3:1절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새시대에 계속해서 당신의 일을 해 나아가셔야 할 메시야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하나의 교리에 대한 단순한 승낙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희노애락의 정황 속에서도 실족하지 않고 거기서 더욱 메시아가 하시는 일들을 역설적으로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틀을 벗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제자들의 전갈을 받은 세례 요한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후 그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어떠한 결단을 했는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머지않아 그는 헤롯의 손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은 어떤 이해나 설득으로 세례요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니까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의 모습과 당신의 사역을 그대로 가감 없이 들려주고 보여주면서 그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한해의 절반에 접어드는 이 뜻깊은 감사주일에 이 하나님의 전에서 우리도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 것인가?...' 그리해서 지혜로운 성찰과 선택과 결단이 우리 모두의 삶에 아름답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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