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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명하게 밝히고 삽시다 /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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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게 밝히고 삽시다
요 3: 22-30


  오늘은 요한복음 3장 22절에서 3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분명하게 밝히고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분명하게 고백을 하며 믿읍시다"라는 말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분명하게 세 번의 고백하며 믿었습니다. 첫 번째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나서 고기를 잡는데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 많이 잡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한 첫 마디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분명히 밝히고 믿음 생활을 출발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자가 되고 얼마가 지난 후에 전국에 파송을 받아 전도를 하고 돌아와서는 세상 사람들이 이런 말 저런 말을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분명히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자기의 믿는 바를 밝히고 믿었습니다. 세 번째는 부활하신 다음에 주님이 갈릴리 바다로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즉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뜨거운 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고백을 하며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라 우리도 몇 가지를 분명히 밝히고 또 고백을 하며 믿음 생활을 계속하길 바라면서 본문을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 (22-27)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고백하며 믿음 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10년 20년을 믿어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근본적으로 두 가지를 가르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 창설자인 칼빈은 다섯 가지를 요약해서 우리들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적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한 가운데 두시고 생명 나무도 함께 두신 후에 따먹지 말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습니다. 타락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을 하시는데 무조건 선택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선택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제한적 선택입니다. 모두를 선택하는 중에 나도 한 사람으로 끼워주었다고 하면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선택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즉 제한적 구원입니다. 소수를 선택해서 구원을 하는데 내가 뽑혔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네 번째로 불가항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누구든지 거절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은 예수 믿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때리고 빼앗고 죽이곤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그를 만나시고 그에게 은혜를 주시기에 항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꾸러지고 변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불가항적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성도견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반드시 끝까지 책임지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떨어져 나가고 싶어도 떨어져 나가지를 못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참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 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고 천국의 백성이 되는데 내가 나의 의나 권리를 주장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우리 장로교 교리의 기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흔히 '하나님의 예정이다, 선택이다'라고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칼빈이 장로교에서 이야기해주는 중심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절대로 나의 주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왜 바쳐야 합니까? 십일조는 바쳐도 되고 안 바쳐도 되느냐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공장을 운영하고 싶은데 공장 지을 돈도 없고 시설할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남의 공장을 세로 얻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세로 얻은 공장에서 내 공장처럼 물품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거기에서 모든 일을 합니다. 내 것처럼 운영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매달 주인에게 세를 바쳐야 되지 않습니까? 그 세는 바쳐도 되고 안 바쳐도 되는 것입니까? 반드시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세는 왜 바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공장이라는 기본 재산이 '내 것이 아니라 당신 것입니다'라는 표시일 뿐입니다. 세를 내지 않겠다 하게 되면 이 공장이 내 것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면 세를 너에게 가져다 바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 공장은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표시가 세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본 재산이 있고 소득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까? 이것은 바쳐도 되고 안 바쳐도 되는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바쳐야 하는 이유는 내 이름으로 이 집이 등기가 났고 내 이름으로 이 공장이 등기가 나서 사업을 크게 한다고 할지라도 기본 재산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의미에서 바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은 전부 내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권이 나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반드시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바쳐도 되고 안 바쳐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경제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 생활의 기본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일조도 못 바치면서 내 일평생을 바친다, 내 목숨을 바친다 하는 것은 아무리 소리쳐 보아도 허튼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장 적절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표시하고 고백하는 것이 십일조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2절에서 27절을 보면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 앞에 나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따랐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등장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바로 저 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요, 그리스도요"라고 증거하며 " 빨리 따라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따라가는 사람은 따라갔지만 다수가 따라가지 않고 자기 선생님이 최고라고 합니다. 이 사실이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는 무척 괴로웠겠다 생각되어 집니다. 자기를 따르고 예수를 안 따른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김창인 목사를 따르는데 예수는 싫다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인기가 올라가서 좋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요, 저의 목회는 완전히 실패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세례 요한이 최고로 생각하고 따르는 제자들이 얼마나 분을 내면서 찾아왔는지 모릅니다. "선생님! 선생님한테 세례를 받은 예수라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갑니다"라고 하면서 샘을 내고 질투를 하고 경쟁 의식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누구와 경쟁 의식을 가집니까? 그 때 세례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누구도 받을 수 없다. 하늘에서 저 분에게 이 사람들을 주었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것이니 내버려 두라. 그리로 가야 한다"라고 하면서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하늘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천상 천하의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까닭에 주인 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요, 모든 절대권은 하나님께 있다고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주지 아니하시면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권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존 영이라고 하는 사람은 열 한 명의 아들과 딸들과 아침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이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다'라고 귀에 못이 배기도록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자녀들의 머리에는 그 말로 전부 들어찼습니다. 그 말씀이 그의 자녀들을 완전히 잡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열 한 자녀가 탈선하지 않고 그렇게 잘 되었습니다. 우리도 분명히 밝히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요,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며 믿자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인간의 책임 (28-)

  성경은 첫째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 둘째로는 인간의 책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못 믿는 사람은 이것을 뒤집어 놓습니다. 뒤집어 놓으면 하나님의 책임과, 나의 주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시겠습니까? 안 주시겠습니까? 안 주시려면 날 죽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책임지십시오"라고 달려듭니다. 책임을 누가 집니까? 하나님께는 주권이요, 인간에게는 책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루시퍼라고 하는 천사장은 하나님의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담이라고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습니다. 똑같이 지음을 받는데 루시퍼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아담 역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똑같이 지음을 받고 타락을 했는데 마귀에게 대해서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유황불 불 못에 처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아담과 그 자손들에게는 구원 얻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마귀나 사탄처럼 구원의 길을 주지 않으셨다면 구원 얻을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온갖 축복을 해 주시고 은혜를 주신 다음에 책임을 반드시 물으십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 아담과 하와를 불러다 놓으셨습니다. 마귀 즉 뱀도 함께 불렀습니다. 아담에게 책임을 따졌더니 아담은 아내에게 전가시켰습니다. 하와에게 책임을 따졌더니 아내는 뱀에게 전가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반드시 의무를 다하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을 보면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고 하였습니다.

  세레 요한이 지금까지라도 예수를 따르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요, 증거할 책임이 너희에게 있지 않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점잖게 기록하였으니 그렇지 아마 제자들이 크게 혼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간다고 자기 선생인 세례 요한과 견주고 시기 질투를 하고 경쟁의식을 가지니 세례 요한이 그 꼴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내가 뭐라고 하였느냐? 예수님을 가르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저 분이 바로 메시아요,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딱 부러지게 증거하지 않았느냐?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 보다 앞서 보내 길을 열어 놓으라고 보냄을 받은 길잡이 일 뿐이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요. 즉 선구자일 뿐이다. 내가 이렇게 분명히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면 예수가 그리스도요, 내가 따르는 선생님은 예수의 앞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너희가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해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왜 지금 와서 딴 소리를 하느냐?"라고 책망하는 뜻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 성경을 읽고 배운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가 메시아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전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미네르라고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이 목사는 독일 사람입니다. 히틀러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고 난리를 피우며 기승을 부릴 때 나치 정권에 대해서 얼마가 거세게 항거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가서 감옥 생활 8년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치 정권과 히틀러라고 하면 이를 가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참 이상하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도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7일 동안 계속해서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모든 사람들이 줄을 서 서 한 사람씩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감히 얼굴 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로 천당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이었습니다. 미네르 목사도 줄을 서서 하나님 앞에 가는데 몇 사람 앞의 사람을 달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으면서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머뭇거리면서 절대로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신 후에 미네르의 차례가 왔습니다. "너 이제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힐끔 힐끔 뒤를 돌아다 볼 때 자세히 보니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가 너를 돌아다 볼 때 무엇을 느끼지 못했느냐?" "저 사람이 나에게 8년 동안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욕만 했지 한번도 예수 믿으라 전도한 적이 없습니다 라는 태도였는데 너는 그에게 대해서 변명을 할 수 있느냐?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바로 네 책임이요, 전도하라고 했는데 너는 왜 그 사람에게 욕만 하였느냐?" 얼마나 호되게 꾸지람을 받았는지 놀라서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크게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기록으로 남겨 출판한 책이 전쟁백서라고 하는 유명한 책입니다. 여러분 전도하라는데 왜 욕만 하고 돌아다닌 미네르가 혼이 났습니다. 책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 백서에서 그는 구구절절이 회개하며 '내 책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책임을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책임져야할 사람이 없습니까? 나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없습니까? 나의 꼴이 보기 싫어서 교회에 안 나오겠다는 사람은 없습니까? 내가 가서 붙들고 밤을 새워서라도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왜 증거하지 않았느냐? 증거할 사람이 바로 너희가 아니냐? 책임이 있는 너희가 아니냐? 내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한 것처럼 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증거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교훈입니다.

  셋째, 자기의 정체 (29-30)

  우리는 자기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는 정체를 안 밝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장로요, 나는 안수집사요, 나는 권사요"라고 하면서 정체를 전부 밝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회사에 가서, 동네에서, 어떤 모임에 가서 여러분들의 정체를 밝히고 살아가십니까? "나는 광성교회 장로요, 광성교회 안수집사요, 광성교회 권사다"라는 것을 떳떳하게 밝히고 행동하십니까? "저 사람이 광성교회 집사야, 광성교회 알아보겠구먼"이라고 하는 분들은 없을까요?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창피하니까 정체를 숨겨야하지 않습니까? 갈 곳 못 갈 곳 전부 다니고 있으니 회사에 나가서 내 정체를 숨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체를 드러내고 밝히며 믿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9절에서 30절을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세례 요한은 아직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혼례식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 아니냐 그리고 신랑이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과 소리를 듣고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신랑의 친구가 아니냐 나는 이런 기쁨이 충만했노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결혼하는 잔치 집에 주인공이 바로 신랑이 아닙니까? 신랑의 친구라고 하는 것은 들러리를 서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요즘은 결혼 할 때 들러리를 서는 사람이 없지만 저도 총각 때는 자주 들러리를 섰습니다. 들러리를 서면 "나도 언제 저 신랑의 자리에 서 보나"라는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 들러리는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고 신랑을 따라 다니면서 시중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례자가 나와 설 때도 신랑을 따라 나와 같이 서고 나갈 때도 같이 나갑니다. 그리고 신랑이 어디를 가든지 잔치가 끝날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신부는 자기가 가로챕니까? 신랑에게 안내를 해 주는 것입니다. 신랑이 기뻐하면 나도 그 기뻐하는 모습에 기뻐한다는 말이 본문입니다. 그러면 들러리는 서는 친구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중매하여 신랑에게 안내하는데 그러면 신부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전도하여 나를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절대로 신랑이 아닌데 왜 너희들은 아직도 나를 따르느냐? 나는 신랑이 아니요, 들러리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정체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인기 높은 세례 요한이 그런 말을 하기가 쉽습니까? 마지막에 가서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쇠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데 내 제자들은 절대 아니라 하고 끝까지 나를 따른다면 나는 예수를 위해서 빨리 쇠하고 죽고 망해야 되지 않느냐라는 뜻입니다.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들러리일 뿐이요, 예수께 방해가 되는 상황이라면 망해야만 하는 존재로 자기의 정체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서나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살아야 함을 명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밝히고 고백하며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며 믿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내 아내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의 속을 썩이면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아마 한 참 동안은 속을 썩이고 재미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내를 위해 주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둘째로 인간의 책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책임, 인간의 책임 말입니다. 예수가 이렇게 좋더라 너도 예수 믿고 나처럼 한번 되어 보라고 예수를 증거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어디를 가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살아야합니다. 세례 요한이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항상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떳떳하게 살다가 떳떳하게 죽었습니다. 정체를 분명히 하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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