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잃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 눅 15:11-32

  • 잡초 잡초
  • 250
  • 0

첨부 1



눅15:11-32
잃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저는 지난 두 주간 동안 하와이 코나 열방대학에서 개최하는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그 세미나는 저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을 되찾게 해주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목사이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라는 사실과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이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제일 좋았던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안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고 성경에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한다고 하셨는데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 그리고 아버지라 불렀을 때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응답해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며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저를 안아주시고 제 마음의 텅 빈 공간을 채워주시고 저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후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해서 지금까지 왔는데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30년 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타성적이 되고 의식적이 되어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옛날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던 그때 그 마음은 많이 퇴색되었던 것을 발견하고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다시 찾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저처럼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그 첫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이 세상의 값싼 것과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진정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져버린 채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으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깨우쳐 주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그분의 다림줄을 기준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저의사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면에서의 화복과 갱신이 일어나도록 우리 교회에 영성 프로그램을 세우려고 합니다. 물론 좀더 기도하고 잘 계획해서 내년부터 이런 프로그램을 가지겠습니다만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해 주시고 남서울교회가 그동안 많은 좋은 것들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이 얼마나 가득히 차있습니까? 외면적인 것을 갖추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되는데 내면적인 충만한 것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꾸 퇴색하고 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금년에도 우리가 회복의 해를 꿈꾸면서 영성의 회복, 일꾼의 회복 , 공동체성의 회복 , 비젼의 회복을 부르짖고 있는데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영성의 회복입니다. 영성의 회복이라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확보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남서울교회는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해왔고 외부적으로도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이 지친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공백이 생긴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좋은 남서울교회입니까? 겉으로 좋은 것만큼 우리 속에 영성이 충만히 채워져 있습니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내년에는 이런 것을 보충하는 목표를 가지고 영성의 회복을 기초로 하여 일꾼의 회복, 공동체성의 회복 ,비젼의 회복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남서울 새생명축제를 앞에 두고 누가복음 15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읽으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의 일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잃은 자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비유가 다 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교훈을 위해서 세 가지 비유를 쓰신 적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세 가지 비유를 쓰시면서 우리들에게 한 가지 교훈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먼저 그 첫 번째 비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6절에 있는 말씀인데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나옵니다. 그가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마 들에서 양떼의 숫자를 세다보니까 하나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또 세어보니까

분명히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디에서 없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이 목자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나머지 99마리는 놔두고 그 잃은 것을 찾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양떼들을 들판에 그냥 놔두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양들이 다 흩어질 수가 있고 맹수들이 와서 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99마리를 놔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 한 마리가 그 넓은 들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이 한 마리를 찾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이 목자는 힘든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위험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이 목자에게는 한 마리보다 더 귀중한 99마리가 있고 99마리만 갖고도 족할 수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99마리가 새끼를 낳아 100마리가 될테니 그 한 마리 잃어버리면 되는데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그런 수고와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목자에게는 양떼의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100마리든 ,1000마리든 ,10000마리든 상관없이 잃어버린 그 한 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다녔는데 결국은 찾았습니다.

찾았을 때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찾은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말썽꾸러기 양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저 같으면 발길로 차버리고 막대기로 때려서 몰아왔을 텐데 그 목자는 그 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친구들과 이웃을 전부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며 양을 찾아 기뻐하는 목자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목자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 목자에게는 이 양 한 마리가 너무나 귀하고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7절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까?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비록 인간들 보기에는 죄인이지만 그 한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셔서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어떤 수고를 해서라도 찾아내려고 하고 찾았을 때에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비유를 보시면 8-9절인데 어느 여인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드라크마는 그리스 시대의 은화인데 로마의 데나리온 가치와 같은 돈입니다. 이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 일을 해서 품삯을 받는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막일을 하면 하루에 받는 품삯이 얼마나 될까요? 약 10만원 정도의 돈이라면 이 드라크마는 10만원 정도 되는 동전입니다.

이 여인에게 이 동전이 10개나 있었기에 100만원 정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100만원 중에 10만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안 찾을 사람 없이 다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도가 좀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보니까 등불을 보고 찾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석가가 말하기를 밤에 잃어 버려서 등불을 켠 것이 아니고 낮에부터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고 찾고 찾다가 어두워지고 보이지 않으니까 등불까지 켜놓고 끝까지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이 찾을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들쳐보고 꺼내보고 치워보면서 찾는데 이 드라크마는 적은 것이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빗자루로 쓸고 샅샅이 뒤지면서 그것을 찾습니다. 누가 그 광경을 봤다면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아니 ,그 까짓것 잃어버렸으면 그냥 놔두지. 아직도 90만원이나 있는데 아깝기는 하지만 10만원 잃어버렸으면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그렇게까지 할 것 뭐 있어? ’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달랐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불을 켜고 가구를 옮겨가면서 쓸면서 까지도 드라크마를 찾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드라크마를 찾아서 그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잔치에 들었던 비용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 한 드라크마보다는 덜 들었을 겁니다. 요즈음 우리의 이웃과 친구들을 불러서 잔치를 베풀면 10만원 안 들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여인에게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여인이 구두쇠여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이 드라크마 하나가 너무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 드라크마에 얽힌 사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듣더라도 꼭 찾아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비유도 그 앞에 나오는 비유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인 하나를 얻을 때 기뻐하시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죄인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들 아닙니까? 이 세상의 만물에 비하면 우리들 한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가치를 물질로 환산해 보니까 12-20달러 밖에 되지 않는답니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잃어버린 우리들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서 갖은 수고와 고생을 하시고 결국 우리를 찾았을 때 기뻐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라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비유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기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는 양에 대한 이야기였고 두 번째는 드라크마에 관한 비유였습니다. 양도 귀하고 돈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귀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 잃어버린 것을 이야기 했고 두 번째 비유에서는 열 개중에 한 드라크마 잃어버린 것을 이야기 했는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두 아들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했으니까 이 이야기에 담긴 강조의 비중은 더 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이야기 하시면서도 점점 더 중요성의 강도를 높여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을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의 유산을 달라고 재촉해서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궁핍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는데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돼지 치는 사람에게 가서 돼지를 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아주 심해서 먹을 것을 찾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돼지먹이인 쥐염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그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들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하면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면서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게 하십니까? 아직도 상거가 먼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리에서 오는 아들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을 중단시키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집 떠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이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니까 맨 발로 뛰어가서 그를 맞아주고 아무런 책망도 안하고  꾸짖지도 아니 하시고 그냥 그를 안아주시고 입을 맞추시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겨주며 잔치를 베풀어주신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여기 나오는 탕자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멀리 가는 생활을 했다면 지금 이 시간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비록 여러분이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 멀리 갔어도 아버지의 마음은 여전합니다.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돌아만 오면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이미 용서하고 계십니다. 받아주시고 안아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시는 그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꼭 아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고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그 집에 또 다른 아들 형이 있습니다. 그가 밭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에 큰 잔치가 벌어져 있습니다.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화를 내면서 아버지께 따집니다.

29절에 나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이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절에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절에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에 이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 아버지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도 몰랐고 그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았으며 그 아버지가 집나간 동생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몰랐습니다. 동생이 집나간 이후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는 전혀 알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집나간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멀리 떠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탕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저는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아버지의 마음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많이 읽혀지는 글 하나를 읽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는 글이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너무너무 아버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참고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前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助言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後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車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러한 아버지를 정말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육신의 아버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저도 아버지 가운데 한사람이지만 우리 자녀들이, 아내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잘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섭섭하고 멍이 들고 외롭고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일들이 많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아버지들입니다.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아버지기 때문에 어쩌면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잘 그려 놨을 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자녀들과 식구들을 생각해보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육신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아는가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멍드시고 우리들 때문에 얼마나 아프시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멀리 가버릴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픕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늘 집나가 있는 자식에 대하여 ,우리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는 전혀 그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안 해주신 것만 생각하고 따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내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구하라 그러면 준다 너희 가운데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너희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수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대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시려고 다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집나간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만일에 집에 부모님이 계시는데 형제 가운데 한사람이 나갔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을 모릅니다. 그리고는 부모님에게 좋은 음식을 드리고 좋은 옷을 사다가 입혀드리고 극장표 사드리면 그 마음이 풀리겠습니까? 외국여행하고 오시라면 가시겠습니까? 그 돈 가지고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생활하면서도 우리들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이 우리들 주위에 흩어져 많이 있는데 그들을 구하려는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내 밥그릇만 생각하고 불평만하고 하나님께 원망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라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제 남 서울 새 생명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왜 이 축제를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걱정하는 것은 잔치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있을 지가 걱정입니다. 다른 것은 다 준비해 놓았는데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일들이 얼마나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으며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기도했습니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기간동안에 총력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일에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며 남은 기간동안 최선을 다해보자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또 여기에 있지 아니한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