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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의 우상 / 말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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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우상 <말 3:16-18>

□ 자유의 우상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
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라기 3:16-18>

1. 현대인은 자유를 찾아 나간 탕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자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til)은 현대인을 가리켜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같다고 비교해 말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상속한 재산을 먼 나라로 가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결국 탕진하여 돼지 치는 일을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즉 현대인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라는 우상을 섬기며 <진리>의 가난 속에 살면서 <죄악의 쥐엄 열매>를 먹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올바른 지적이라고 봅니다.
오늘의 현대인은 누구의 간섭도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적 계율과 도덕적 훈계를 간섭으로 여기며 그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자유를 위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부인하고, 피조물인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문화창조자로서 자처하면서 세속문화를 이루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가 얻어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진리의 가난>과 <말씀의 기근>, <영적 방황> 이외에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달나라에 사람을 보내고 우주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오늘의 정신문화는 퇴보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구촌 어느 나라, 어느 곳을 가도 점점 세상은 <영적 방황>과 <말씀의 기근>으로 치닫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 질서마저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공중도덕은 물론이지만, 부모 자식간의 인륜의 문제에서 짐승보다 못한 일들이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2. 우선 현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음으로 멀어졌습니다.
마음에서 멀어지면 지척이천이라고 아무리 가까운 앞뒷집에 살아도 교제가 없습니다.
관심조차 두지 않고 사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오늘의 현대인들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남아있다고 보십니까?
모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집 나간 탕자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자유의 우상을 섬기며 사는 동안, 그는 마음에서 아버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遺産)을 가지고 살면서도 아버지를 잊어버린 채 살았습니다.
탕자의 마음은 오로지 자유의 우상 앞에서 매일 매일 허랑 방탕의 생활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그를 자유롭게 하는 것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구원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채워주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였고, 광야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를 내려 먹였습니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겠다고 아우성 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탕자와 같이 아버지를 마음으로부터 멀리 떠나 이방의 신을 따라갔고, 이방의 딸들과 결혼하여 안식일도 잊어버리고 오직 인간적인 자족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바알 신을 섬기며, 탕자처럼 살았습니다.

아무리 선지자들을 보내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도리어 저들을 잡아 가두고 때리고 죽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오늘의 탕자가 누구일까? 하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늘의 탕자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택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은 우리들, 소위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야 두말 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영적 이스라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육체적 향락의 자유를 위하여 오늘의 바알인, 맘몬의 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알고 있기는 합니다.
내 것이란 하나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맡은 관리자라고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쓰고 먹고 마신 것처럼, 오늘의 우리들이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탕자의 기질을 갖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하면, 물질이 생겼을 때 그것을 내 마음대로 쓰려고 합니다.
시간이 나면 그것을 내 마음대로 쓰려고 합니다.
지식과 명예를 얻게 되면 하나님 보다 내 이름을먼저 더 날리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런 생활이라면, 그런 생각과 그런 삶이 탕자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영적 탕자들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크리스천들은 돈을 벌었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며 사용할 줄 모릅니다.
지식을 얻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사용할 줄 모릅니다.
남보다 좋은 사회적 지위에 올랐을 때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저 탕자처럼 육체적 쾌락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물질과 지식과 명예와 성공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탕자들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선지자들을 보내 저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지 아니했습니다.
도리어 멸시하고 배척하고 심지어 죽여버렸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누가 주의 종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까?
주의 종들은 당연히 그렇게 말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눈에 차는 존재들이 못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고의 권력자가 온다던가, 재력이 있는 유력자가 와서 말한다면 그제서야 들으려고 하는 것,
이것 자체가 탕자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다 결국 죽게된 지경에 이르렀을 때야 찾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탕자들이 살 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3. 오늘의 탕자가 살 길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유의 허랑 방탕 속에서는 영혼의 기쁨과 감사가 없었습니다.
물질의 풍요가 결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줄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만족함이 있게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돌아서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하나님 아버지 없이 누리려던 자유의 자리에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살면서도 한번도 그를 위해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모든 일체의 삶의 자리에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유의 우상 앞에 머리 숙였던 자리에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의 탕자의 자리는 어떤 곳일까?
먼저 우리 크리스천들이 자신을 탕자로 의식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서 멀어졌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탕자들이 살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재물의 탕자들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시간의 탕자요, 건강의 탕자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있을 때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겠고,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겠고, 건강이 있을 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돈’소리만 들으면 긴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 가니까 돈 이야기만 하더라' 하는 말이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교회에서 돈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돈에 관하여 바르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곳이 교회이란 말입니다.
존 웨슬리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듣고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면, 제일 먼저 변화가 있어야 할 삶의 영역 중의 하나가‘돈의 사용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제생활은 우리의 가치관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생겼고,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게 나 자신을 드리고 싶다고 할 때, 그의 헌금 생활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어느 정도로 헌신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헌금 행위야말로 우리의 헌신 행위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돈의 씀씀이를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돈 쓰임새야말로 우리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대변해 주는 삶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헌금은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응답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의식의 결정체가 우리의 헌신이어야 하고, 우리의 헌금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법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너의 소득의 열의 하나는 내 것이라고.... 그러므로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남미가 왜 저렇게 물질적인 후진국으로 떨어져 나갔습니까?
저들을 저렇게 만든 것은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도시 도시마다 성당은 우람하게 서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더 더욱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하여 거의 인색할 정도입니다.
십일조 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결과 남미의 문화는 축제의 문화일 뿐, 그곳에 하나님이 없어졌습니다.
먹고 춤추고 노는 문화만 발달했다는 말입니다.
브라질의 카니발은 이제는 세계가 다 아는 바입니다.
칠레도 금요일 저녁만 되면 모두 춤추며 놀고 먹고 마십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도 이런 모습이 되지 않아야 하겠는데 지금부터 걱정입니다.
주 5일 근무가 우리의 문화생활의 향상이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하겠는데, 타락한 인간의 본성대로 하나님 없는 자유의 우상 앞에 모두 머리 숙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에 염려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빈털털이가 되어서, 그리고 누더기 냄새나는 옷을 입고 아버지께로 가기보다는 그래도 하늘나라 시민답게 살다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물, 우리의 지식, 우리의 재능, 모두 나 자신만의 향락생활에 탕진하지 말고 그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봉사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쓰다 가야 할 사명자들이 우리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나님 없는 자유라는 우상 앞에 홀려 엎드러지지 말고 끝까지 진리의 말씀 안에서 살다 가는 승리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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