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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으면 / 빌 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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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으면 (빌3:7-11)


시작하는 말

'트레이드'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래를한다', '무역을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어렸을적부터 이 트레이드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구슬과 딱지로 친구들과 거래하고, 아이스크림으로 동생과 거래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어렸을 적 그 거래는 아마도 친구나 동생에게서 크고 좋은 것을 빼앗으려는 사특한 마음에서 나온 거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저의 어렸을적 거래처럼 치사하고 사특한 마음으로가 아닌 거룩한 거래, 놀라운 거래에 대한 기록들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 비유에서 "진주비유"나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같은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진부비유는 이런 내용입니다. 한 상인이 장사를 하다가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일생 일대에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한 그는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이야기는 "밭에 감추인 보화비유"인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의 밭에 소작을 사는 한 농부가 어느날 밭을 갈다가 밭 가운데 묻혀있는 보물상자를 발견합니다. 그는집으로 돌아가 그의 모든 재산을 팔아 밭 주인에게 그 밭을 삽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같은 놀라운 거래를 경험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로 인해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다름아닌 바울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인생이 확 바뀐 사람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행9장),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와 주님 사이에는 놀라운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그 거래에서 바울은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잃은 것 보다 훨씬 크고 놀라운 것을 얻게 됩니다. 그 거래의 내용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이 설명합니다.

본 론

1. 바울이 잃은 것 (lost)

바울은 순수한 히브리인 가정에 태어나 할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혈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가문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베냐민과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사랑받던 아내 라엘이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은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고 이 작은 지파는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에게 충성을 다했던 지파입니다. 따라서 그의 혈통은 자랑할만 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꿈꾸던 신앙의 정상은 바로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만일 하늘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오늘날이야 바리새인이 위선자라는 의미로 통하지만 바울 당시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였습니다(행26:24).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가장 정통한 학문을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좋은 집안 배경, 학벌, 재산, 인간관계, 높은 사회적 신분 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바울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것이었고, 실제로 많은 유익이 되는 것들입니다. 기대되는 것들이고 보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한 가지 사건을 접하고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다메섹 도상 사건입니다. 다메섹 도상이 그의 삶에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고꾸라집니다. 깨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인생의 극과 극이 갈라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부터 그에게 많은 변화가 생깁니다. 그동안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던 모든 것을 버리게 되었습니다(7절).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모든 좋은 것은 다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이롭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을 이제는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배설물로 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름은 두 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 가졌던 사울이라는 이름과 만난 이후에 가지게 된 바울이라는 이름입니다. 다소 사람 사울과 사도 바울. 그러나 다메식 도상에서의 충격적인 만남이후로 그의 유익과 자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렸습니다. 그 때 그는 이름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명예와 자존심과 부와 학식, 이득 등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름을 버렸습니다. 명예를 버렸습니다. 혈통과 가문, 학벌, 재산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얻은 것을 모두 잃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을 만나고서 무엇을 잃으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이득을 누리며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던 것들을 잃으셨습니까? 빌립보서 3:1-11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말을 고르라면 당연 "여기다"일 것입니다. 이 말은 7,8,13절에 나오는데 '평가하다, 사정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Count). 소크라테스는 "헤아려 보지 않은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차분하게 자신이 내리는 결정과 나갈 방향을 조정해 주는 가치에 대해서 신중하게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한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잃은 것이 무엇인가? 내가 예수님 때문에 잃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오늘날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잃지 않고 움켜지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좋고 기쁜 일들을 밀어냅니다. 그 사람이 기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새것을 가질 때는 일단 옛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자동차, 결혼, 직장, 새해의 경우 다 이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단순히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죄악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생활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생활이 무질서 했던 사람은 옛생활을 청산해야 하고, 사고 방식이 잘못되었던 사람은 옛 사고 방식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새것을 가지려면 그것을 청산해야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힘든 일을 우리의 의지만으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힘만으로 할 수 없습니다.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의지하면 가능합니다. 성령님을 붙들면 가능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미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도전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잃은 것은 무엇입니까? 아니 잃어야 하는 것을 아직 움켜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2. 바울이 얻은 것 (gain)

짐 엘리엇의 말이 생각납니다.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주는 것을 결코 바보 짓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체험했던 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기 자신의 신앙을 잃었습니다. 이름을 잃었고 명성을 잃었습니다. 이득이 되는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가 잃고 나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8절).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것 이상의 지식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전에 이미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진 못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사귀었다는 뜻입니다(요17:3).
성도 여러분! 구원이 이런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지는 것이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예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며 그분과 의논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모든 것을 잃고서 "그리스도께로서 난 의"를 얻었습니다(9절). 바울이 바리새인이었을 때, 의라는 것은 바울의 생애를 좌우하는 큰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를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독선과 행위를 통한 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나자, 자신의 독선을 잃고, 자랑을 읽고 그리스도께로서 난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볼 때 자신은 영적 파산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보니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의지했을 때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던 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잃고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얻었습니다(10,11절).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와 만난 체험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변화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그 후 일생동안 이어집니다. 그 체험은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고,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순존하여 그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체험이었습니다(내가 그리스도와... 알려 하여). 바울이 율법 아래 살 때는 바울의 모든 것이 율법 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한분 친구요 영원한 동반자인 그리스도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체험은 또한 권능있는 체험이었습니다(그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이제 바울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이제 그는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를 위해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바울은 그가 잃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사실 그가 얻은 것은 너무나 기막힌 것이기에 다른 것들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가히 그 기쁨과 충격은 짐작할만 합니다. 이제 그의 생명은 이 세상 하찮은 것들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가치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땅을 것들을 신령한 마음으로 하늘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인생의 대차대조표입니다. 그가 얻은 그리스도이고, 그가 잃은 것은 그리스도가 없을 때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얻은 그리스도가 워낙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옛것을 잃어버리기를 원하는 바울입니다. 물론 사울이 바울로 변한 다음에, 바울의 신체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이 망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산이 축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변화입니다. 인생관의 변화입니다. 예전에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의 중심에는 사울이라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학벌과 명에와 가문과 혈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이라는 사람으로 변했을 때에는 바울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분이 자기 인생의 바탕에 섰습니다. 생의 중심부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입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사람을 봅니다. 직장을 보고, 가족을 봅니다. 변화할 수 밖에요.
눅19장에 나오는 삭개오를 아십니까? 뽕나무 위로 올라간 키작은 사람 삭개오 정도가 아니고, 그 때 예수를 만나고서 인생의 확 바뀐 사람 삭개오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드렸을 때 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체험을 어떤 식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었기에 그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과다징수한 세금을 네배나 갚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세리로서의 삶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가 율법과 의의 문제였다면 오늘 우리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는 돈 문제 일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되면 돈 문제에 대한 생각과 행동이 과거와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돈 문제에서 달라질 수 있다면 왠만한 문제들은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요즘같이 돈이 없어서 난리라고 하는 때에 돈 문제에 있어서 초월하고 여유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복을 누리는 것입니까? 예수를 제대로 믿음으로 이런 힘이 생깁니다.
이런 변화가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힘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사울의 것은 버리고, 바울의 것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질적인 삶의 변화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후5:17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고 새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 그래서 모든 옛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매주일 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변화에 평강이 있습니다. 그 변화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키에르케고르라는 사람은 기독교를 마치 도둑의 침범을 당한 상점에 비유했습니다.도둑이 한 상점에 들어와서 상점의 물건들의 가격표를 다 바꾸어 놓았습니다. 삼천원짜리 가격표를 떼서 10만원짜리에 붙여놓고, 비싼 물건의 가격표를 떼다가 값싼 장난감에 붙여놓았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치의 변화입니다. 옛것과 새것의 차이입니다. 세상 것과 하늘의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집을 짓는다고 할 때에 반석 위와 모래 위 중 어디에다 집을 짓겠습니까? 당연히 반석이지 모래가 아닐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우리 주님도 집을 모래 위에 지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비바람이 불면 그런 집은 어차피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석 위에 집을 세울 것을 권합니다. 그 반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시라면, 그래서 그분을 반석 삼아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고 지어갈 수 있다면 승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왜 모든 것을 잃어버렸겠습니까? 왜 그동안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겠습니까? 최고의 반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잃고서라도 그리스도를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 완전한 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분이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건강이 반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과 돈과 명성이 반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건강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지식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명성이 제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면 평생동안 가지고 있다가 평생 이후에라도 가지고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끊어지는 날 우리의 소유권도 끝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사유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섬기고 봉사함으로 기쁨을 얻으라고 하는 공유 재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반석으로 삼으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세상 것 때문에 우울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자기가 사울로 있을 때에는 모든 가치 판단을 저 혼자만 했습니다. 나 자신의 사리사욕으로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어 그를 다시 세웠더니 그가 변한 것은 없으나 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웃을 위해서 바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짐이 그에게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얻으셨습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잃으십시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잡고 가십시오. 옛것 움켜쥐고 있으면 새것 가지고 사는 재미도 못느낍니다. 옛 것에 소망 품고 있으면 새것으로 인해 생기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새 것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새것의 반석이 되십니다. 튼튼한 집입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돈을 잃고 슬퍼하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예수를 붙잡으셨다면 위로받으십시오. 여러분의 대차대조표는 적자가 아니라 흑자요 파란신호등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예배는 반석을 새로 만들기 위해 모인 예배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을 새로 갖다 세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함께 하십시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잃으면 주님을 얻습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것을 버리면 주님께 인정받는 자가 됩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 하늘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모래 위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입니다. 주님을 얻으셨습니까?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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