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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막 9: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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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막9:33-40   
제목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문화와 그 문화속에서 사람들이 행동하는 일종의 기본적 정신 양식 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의식을 바꾸기도 합니다. 저는 인류의 역사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천시되어온 인간군 사람의 종류가 있다면 특별히 노예계급, 노예들, 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 문화는 일종의 종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사회는 그 당시 5천만명이나 넘는 많은 노예들을 부리면서 사회를 유지했습니다. 이 노예 때문에 로마사회는 유지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가 전세계를 정복하면서 식민지에서 잡아온 수 많은 노예들을 통해서 로마 사회를 유지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노예는 필요불가결한 사회 구성원이면서도 이 노예들을 극도로 천시하는 이율배반적인 사회구조가 바로 로마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이 종에 대한 개념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 종이라는 개념은 계속 변신을 거듭합니다. 바울은 그 당시 로마 교회를 향해서 쓰는 유명한 로마서 1장 1절에서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은" 그렇게 바울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 천한 말을 사용합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은 - 종이란 단어를 희랍어의 몇 개의 단어로 쓸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유가 박탈된 개인의 권한이 전혀 무시된 그런 대표적인 종을 나타내는 희랍어 단어에 둘로스란 단어가 있어요. 바울이 그 단어를 여기서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인, 종인 나 바울은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종으로 소개한후에 그 이후 복음의 사역자들은 스스로를 종으로서 그렇게 자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영향권은 교회 내부, 사회 광범한 사회계층속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근대사회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지도자들을 종으로 인식하는 그런 문화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 한나라의 장관을 말할때 우리가 영어로 Minister라고 표기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목사를 영어로 표기할때도 Minister라고 표기하죠? 그래서 저는요 전혀 장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Minister란 단어가 저에게 부터있으니까 그런데 Minister라는 말의 뜻이 바로 종이란 뜻이예요 이것이 사역자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찰을 말할 때도 국민의 공복이다 이런말을 쓰지요? 영어로 말하면 Public servant다 라는 말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복음이 사회에 끼친 가장 현저한 영향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종의 정신 봉사의 정신을 사회에 가르칠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원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종으로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너희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세속문화 그리고 세속적 계급의식에 젖어왔던 우리에게는 종의 삶, 종의정신, 섬김의 삶, 섬김의 정신을 배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한 대화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가 정말 섬기는 자가 되려면 극복해야할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정말 섬기는 자가 되기위해서 극복해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월주의, 혹은 우월의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이사라 빌립보라는 헬몬산 아래있는 도시에 도달했을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죠? 자, 수제자 베드로가 나와서 어떤대답을 했어요? 주님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이 대답을 듣고 주님은 기뻐하시면서 비로소 이제 그분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와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영광을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 변화산상에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건이후 예수님은 이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남쪽에 있는 예수님 사역의 중심센타였던 갈릴리 지방에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십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길을 내려 오시면서 줄곳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하면 오늘 본문 들어오기 직전에 마가복음 9장 30절에 보시면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실 때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그다음 31절 보세요 마가복음 9장 31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비극적인 것은 그다음 32절에 그러나 제자들은 이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 하더라 주님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가 지셔야할 다가오는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생각하시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런데 제자들은 길에서 어떤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본문이 시작하는 33절에 보시면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가버나움에 도착하자 마자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노중에서 오는 도중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예요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들으셨습니다. 확인을 위하여 그리고 본격적인 가르침을 위해서 물어보신 것입니다. 34절 읽어보세요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하였음이라". 자, 예수님은 십자가 생각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그 길에서 도상에서 무슨 토론을 하고 있었어요? 누가크냐 쉽게말할까요 원색적으로 말할까요 누가크냐 누가 잘났느냐 이말예요 누가 잘났느냐 이 토론을 제자들은 하고 있었어요. 자 어떤경우에 어떤상황속에서 이런 토론를 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이 세 제자만 선택하여 픽업하여 산에 오르셨기 때문에 세 제자가 아주 pride를 가지고 나머지 아홉제자를 업신여기면서 세 제자대 아홉 제자 사이에서 벌어진 어떤 토론의 내용일수도 있구요. 또 어쩌면 세 제자 산에 올라간 세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들은 산에 올라갔을 때 주님이 변화되시면서 주님이 양쪽 옆에 누구를 데리고 나타나셨습니까? 모세와 엘리야를 데리고 나타나셨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다시 오실때에는 누가 오른편에 서겠느냐 왼편에 서겠느냐 아마도 그 토론을 했을지 몰라요 왜냐면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그것 가지고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오른편에 누가 앉을것이고 좌편에 누가 앉을것이냐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우리시대에 그 기독교 영성 영성운동에 큰 별이라고 불리어 지는 분 가운데 리챠드 포스터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리챠드 포스터, 이분이 쓴책이 많이 있죠 기도라는 책도 있구요 한국말로도 번역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읽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분이쓴 유명한 책가운데 Money, Sex, Power란 책이 있습니다. 돈과 성과 권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책에 보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반드시 싸우고 극복해야 할 세 가지의 유혹 - 돈의 유혹, 성의 유혹, 그리고 권력의 유혹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 세가지를 기술하면서
셋 중에서 가장 미묘한 것,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강력한 것, 사람들이 이것은 유혹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빨려드는 것, 그 가장 강렬한 미묘한 유혹이 그는 권력의 유혹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 책을 읽었을 때 별로 그 부분에 감동을 받지도 않았었고 동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처음의 두 가지의 유혹, 섹스의 유혹이나 Money의 유혹, 이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제가 신학교를 가니까 목사님들이 또 선배들이 클래스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뭐냐하면 제대로 목회하려면, 제대로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승리해야 된다. 이 두 가지를 항상 강조하더라구요. 그래서 돈의 유혹, 또 성의 유혹, 이것은 반드시 승리해야 된다. 그래서 저는 목사 처음에 될 때부터 결심을 했어요.돈 근처에는 가지도 말자. 생각하지도 말자. 그렇게 살려고 비교적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마누라이외는 여자 근처에도 가지 말자. 그래서 마누라만 붙들고 다니자. 그래서 제가 마누라 잘 붙들고 잘 돌아다니지요. 비교적 이 두 가지는 신실하게 하나님앞에 지켜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왜 권력 쪽, 이것은 생각하지 않았느냐 하면 나는 그 유혹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쪽에 나는 관심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반장 해 본일도 없고 또 되고 싶은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권력쪽에는 유혹을 안 받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인생을 좀 살다보니까,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까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이 권력의 갈등, 이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좀 더 심각한 것이다. 제가 최근에는 이것을 많이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권력의 갈등 그러면 저 국회의사당, 정치인에게만 있는 갈등이 아니예요. 이 권력의 갈등 구조는 우리 가정속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그 부부싸움의 본질이 뭔줄 압니까? 그것 권력 싸움이에요. 누가 가정의 헤게모니를 잡느냐? 네가 잘났느냐? 내가 잘났냐?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이 벌어지는 거에요. 그리고 유명한 가정안에서의 고부싸움,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싸움, 곳간 열쇠를 둘러싼 그 치열한 암투, 그것도 권력 구조입니다. 권력 갈등이예요. 자식들이 부모에게 도전을 할 때 아버지들이 왜 속상해 합니까? 자식 생각하는 것 있지만 또 하나 뭐냐하면 네가 감히 아버지인 나에게, 권력에 도전을 해? 이런 권력 갈등구조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가정만의 문제일까요? 교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을까요? 교회의 모든 자리는 철저하게 봉사의 자리입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여러 가지 교회의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교회의 자리조차도 얼마나 철저하게 계급화 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제직에 떨어진다. 위원장을 그만 둔다 괜히 섭섭하고 속상해 하고... 권력구조에 대한 그 갈등구조가 우리속에 얼마나 입력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이것이 강력한데 외국교회와, 외국 사회와 한국 사회를 비교했을 때 한국 사람들에게 이것이 더욱 강력합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문화적 영향, 특별히 왜곡된 유교문화의 영향에 커다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문화가 출세주의, 자, 출세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였습니다. 그런데 출세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감투쓰는 것. 그래서 우리가 흔히 조상 자랑을 할 때 우리가 우리 몇 대 조조상이 원님 노릇했다. 우의정했다. 좌의정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총리했다. 장관을 지내셨다. 이것 굉장한 자랑이지요. 그러나 그 자리만 차지했다는 것이 무슨 자랑이예요? 그 자리는 일 하라고 주어진 자리예요. 그 분이 장관으로 계실 때 사회에 이런 기여를 했다. 그러면 자랑이예요. 그러나 자리만 차지했다. 벼슬만 차지했다. 그것은 하나도 자랑이 아니거든요. 이것이 이 왜곡된 유교문화가 잘 못 가르쳐 온 한국 사회의 현상입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많이 써 온 이규태씨는 우리 한국인이 집착하고 있는 아주 무서운 병 중에 하나가 서열병이라고 지적합니다. 계급을 나누는 서열병,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죄송하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를 따져요. 한 살 내가 더 위면 내가 형님이다. 얼마나 어깨에 힘을 줘요? 젊은이들도 학번이 어떻게 되느냐? 서로 확인하고. 혹은 촌수가 어떻게 되느냐? 조금만 많으면 내가 형님뻘이 되지 않습니까? 그 때부터 싹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 한 살 많아 봐야, 촌수 많아 봐야 도토리 키재기인데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끊임없이 권력 구조적인 인간 접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의, 이 땅에 도착한 처음 선교사들의 수기 가운데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후배 선교사들, 이 땅에 도착한 신참 선교사들을 교육할 때 한국은 권력 구조 - 상석, 하석 이런 자리를 잘 구별해야 제대로 인간 대우를 받는다. 한국 사람들은 방에 들어가도 이등석 삼등석이 있다. 상석과 하석이 있다. 그것을 잘 구별해야 하느니라. 이런 신참 선교사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신참 선교사가 아니 그러면 한국에는 방에 들어가면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그런 구별이 표시되어 있습니까 물어보니 아, 그런 표시는 없다. 그럼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까 그건 눈치로 알아 차려야 하느니라. 이런 대답을 합니다. 사실 방에 들어가면 거기 상석이 있어요. 하석이 있어요. 그래서 일단은 상석을 양보하고 하석을 차지했다가 남이 앉으라고 하면 상석을 차지하고.. 그래서 자리 하나를 둘러싸고 한국사람 처럼 서로 앉으십시오 하고 싸우는 문화는 한국밖에는 없지요. 이것이 교회 안에도 들어옵니다. 그래서 교회안에도 아까 제직의 계급화를 얘기했습니다마는 제직은 철저하게 봉사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처럼 계급의 계급 구조에서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는 구조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되시거나 하면 장로는 교회안에서 장로인데 밖에 나가서도 한국 장로님 보면 명함에다 장로라고 써가지고 다녀요. 그건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다른 나라에 없어요. 제가 외국에 많이 다녀 봤지만 장로라고 명함을 새겨 밖에 나가서 아무 아무개 장로 그러구 명함 주는 나라, 이건 대한민국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계급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지요. 또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당회장, 한국 목사에게 당회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평소에도 당회장이라고 부르더라구요. 당회는 당회가 열려있을 때만 당회장입니다. 그런데 24시간 당회가 열리지도 않는데 목사님이라는 좋은 말을 놔 두고 당회장님 그러더라구요. 세상에 이런 계급 구조를 가진 곳은 한국 교회밖에는 없어요. 심지어 한국 교회 안에서는 신앙 체험까지도 계급화되어 있어요. 체험을 한 사람,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 여러분 신앙 생활의 도상에서 우리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은사들을 체험합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체험하고 나면 은사를 체험시켜 주신 이유가 어디있느냐? 확신 가지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걸 확신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이웃들을 섬기고 그것 하라고 주신 것인데, 그것 가지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자, 어떤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습니다. 좋은 일이죠. 그것 때문에 기도 생활이 활성화되고, 주님 사랑하게 되었고 그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방언을 체험했는데 너는 못했다.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을 나누고 있어요. 저는 본문의 제자들의 경험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틀림없이 변화산상에 올라가서 그 영광을 체험했던 세 제자들이 아마 폼을 잡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체험했는데 너희들은 못 올라갔지? 이런 체험 못했지? 주님은 사실은 이 체험을 주시면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 영광의 증인이 필요했고 그들에게 그러한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셨지만 그들에게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구별과 계급을 나누는 구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보다 낫다. 어떤 모습으로든지 낫다.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 이 우월의식 때문에 진정한 섬김의 모습을 못보는 경향들이 오늘의 교회안에 얼마나 많이 있어요? 어떻게 우월의식, 자기를 뽐내고 싶은 우월의식, 이런 우월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다른길 없어요. 예수님 똑바로 보세요.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이하에서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 얘기를 쉽게 바꿔 말할까요? 여러분! 예수님 마음 품으세요. 예수님 본 받으세요. 예수님의 자세를 배우세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냐고요? 그는 하나님만큼 높으세요. 아니 그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하나님만큼 높으신 그 분이 자신을 낮추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느냐고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어요. 그런데 사람 가운데서도 종의 모습을 취하고 오셨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돌아 가셨어요. 바로 이 분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있는 못된 우월의식 이 우월의식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종답게 봉사자의 자리에 설 줄 믿습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이 우월의식의 뿌리를 뽑아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참된 섬기는 자가 되려면 두 번째로 우리는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극복해야 할 것, 이기주의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섬김이 순수할 수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강력한 장애물은 저는 이기심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섬기면서도 봉사하면서도 우리의 의식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기심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과시의 욕망, 그리고 은근히 자기가 대접받고 싶어하는 생각들, 그리고 자기의 어떤 이익을 별도로 추구하려는 생각들이 봉사하면서도 밑바탕에 깔려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외국 잡지를 읽다가 혼자 웃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했습니다. 이것을 얘기하면 우리 교인들이 웃을까? 안 웃을까? 우리 교인의 수준이 별로 웃을 것같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실험을 했더니 지난 번 예배시간에도 별로 웃지 않았습니다. 수준이 있는 사람만 웃으시길 바랍니다. 뉴욕의 어떤 아파트에서 일어난 얘기인데, 어떤 노인 한 분이, 멋지게 생긴 노인이 층마다, 아파트마다 문을 두드리면서 자선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부인이 문을 딱 열어보니까 아주 멋지게 우아하게 생긴 노인이 제가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자선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참 멋있거든요, 참 이 멋있는 분이 귀한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해서 어떤 분을 도와주시려고 하는데요? 우리 아파트에 계시는 분인데요 아주 비참한 상태입니다. 그 남편은 실직하셨고 그 아이들은 굶주리고 있고 전기값을 내지 못해서 이미 전기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매월마다 내는 아파트 월세를 내지 못해서 내일이면 아파트에서 쫓겨나갈 그런 직전에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아, 참 좋은 일을 하시네요. 그러면서 이 부인이 그런데 선생님 도대체 뭐하는 분,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저는요, 이 아파트의 월세를 받는 집주인입니다 그러더래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분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모금을 하고 다니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거란 말입니다. 자, 우리가 이런 일들이 우리의 봉사, 우리의 구제활동에도 밑바탕에 깔려 있는 우리의 의식일수가 있습니다. 제가 제직 청지기 세미나가 끝난 후에 얼마나 우리 제직들이 여러 가지 위원회에 자원을 했나하고 쭉 살펴봤습니다. 특별히 제가 관심이 있는 부분이 두 가지 였습니다. 예배위원회와 차량위원회. 왜냐하면 안내자들이 그 동안에 참 많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예배위원회에 많이 지원했나? 보니까 생각보다 많이 지원했습니다. 60명이상이 넘었더라구요. 참 감사하구나. 아주 기뻤습니다. 그 다음에 차량위원에는 얼마나 많이 지원했을까? 여러분, 한 번 대답해 보세요. 예배위원회에 더 많이 지원했을까요? 차량위원회에 우리 교인들이 더 많이 지원했을까요? 예배위원회.. 잘 아시네요. 그것 왜 그럴까요? 안에서 봉사하는 것이 쉬워요? 바깥에서 하는 것이 쉽습니까? 바꿀까요? 어디에서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까? 바깥에서.. 잘 아시네요. 저는 안에서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안에서 예배위원회로 봉사하시는 분들 너무 너무 감사해요. 그러나 바깥이 훨씬 숫자가 적었어요. 더 어렵기 때문에, 바깥에서 차량위원회로 봉사하는 것 힘들지요? 추운 겨울에 열심히 차 여기 파킹하세요, 쫓아 다니면서... 말이나 잘 듣습니까? 뭐, 어떤 사람들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까지 봉사하는 봉사자들에게 하는 분들도 있대요. 그러나 저는 그것이 진짜 봉사라고 생각해요. 진짜 봉사는 열심히 봉사하고 욕 먹는 것, 이게 진짜 봉사예요. 예수님이 그렇게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그 분, 그 분이 이땅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그 분은 그런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어요. 침을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러나 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봉사였단 말입니다. 자, 예수님이 제자들이 이것을 배우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시면 3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그리고 섬김의 표본, 섬김의 모델로써 예수님이 시청각적 교훈을 하셨습니다. 36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절까지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이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 아이를 앞에 세우시고 그 어린 아이를 안아주시면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 여러분! 여러분이 길에 지나가는 어린아이 하나 잘 대접한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있습니까? 내가 어린아이 하나 도왔다. 마음으로는 기쁠지 모르지만 가시적인 눈에 띄는 이익을 없을거예요.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유명한 사람을 대접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내가 유명한 사람을 만나서 그 분을 대접했다. 앞으로 PR 재료로도 쓸 수가 있고 상당히 자기도 같이 올라가는 것 같아서 기분도 좋을 수가 있고... 얘기를 바꿔서 말할까요? 여러분이 이동원 목사를 한 번 식사대접을 했다고 해 보십시다. 한 번 해 보시길 바랍니다. 식사 대접을 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아마 마음속으로 야, 괜찮다. 내가 목사님하고 대접하고 식사하고 나니까 목사님도 나를 알아주는 것 같고 또 생색도 나고 사람들에게 말할 재료도 생기고... 우리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이기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목사 대접이 아니라 참 주일학교에서 수고하시는 분들, 차량봉사자로 수고하시는 분들 한 번 모시고 아 참 수고하십니다. 집사님 그리고 식사대접 한다고 하십시다. 교회 신문에도 안 나요, 생색도 안 나요. 그러나 그게 진짜 봉사입니다. 여러분 목사는 대접 안 해도 돼요. 이미 목사는 대접을 많이 받아서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목사는 다 먹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사 대접 안 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이름모르는 소자 한 사람에게 드리는 대접, 그게 진짜 봉사예요. 그것이 순수한 봉사란 말이지요.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봉사예요. 자, 네비게이토의 유명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더 론 샌이라는 분이 어떤 젊은이를 제자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가 종의 삶을 잘 배웠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종에 대한 교훈을 받은 후에 지도자인 론 샌에게 이런 질문을 하더래요. 선생님!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론 샌이는 유명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금은 몰라, 자네가 사람들에게 종 취급을 당할 때 그 때 자네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그 때 알지.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종 취급할 때 어, 나를 무시해 네가? 하고 뿔대를 낸다면 자네는 아직도 종이 되지 못한거야. 남들이 나를 종 취급하고 부릴 때, 내 자존심이 깍이고 내가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 그래 맞아 나는 종 노릇하는 사람이야. 주님의 종이고, 주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의 종이야. 나를 밟아라. 나 기꺼이 당하겠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자네는 그 때 진정한 종이 된 거야. 이것은 매우 심오한 것입니다. 여기에 종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조건없는 섬김의 연습, 남이 나를 잘 대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알아주기 때문이 아니라 상관없이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봉사예요. 교회 봉사는 그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저는 늘 목회를 할 때마다 여름철 단기선교 뭐 이런 것을 젊은이들에게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난한 나라에 가서 한 번 선교해 보고 그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품에 안아 보고 그들을 섬겨보면 인생이 바뀝니다. 아, 이러한 유형의 삶이 있었구나, 이런 신선한 기쁨이 있구나. 인생이 많이 변해요. 그러나 거기까지 나가지 않아도 교회에서 봉사를 선택할 때 사람들의 눈길, 손길이 미치지 않는 그런 봉사를 해 보세요. 장애인을 섬기고 또 그들 먼저 태우는 연습도 해 보고 장애인 주차차량 표시 있으면 거기에는 안 세우고, 그런 작은 훈련에서부터 진정한 봉사의 훈련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이기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세계는 이타주의를 향해서 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섬기는 사람이예요.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뿌리박고 있는 그리고 나를 붙들고 있는 이기심, 이기심을 뛰어넘어서 진정한 섬기는 사람이 되는 훈련, 주께서 여러분과 제 속에 있는 이기심을 성령으로 불태워 주시고 이웃들을 향한 마음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참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 마지막 세 번째는 파벌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순수하려면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생각이 넓어야 돼요. 마음이 좁고, 생각이 좁으면 봉사의 장에서 함께 봉사하는 다른 사람들은 경쟁상대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등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향해서 적대감을 가질 수가 있어요. 이런 사람이 봉사의 장에 서게 되면 그 봉사하는 부서가 소란스럽고 마음이 아파지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그런 제자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제자중의 한 사람이 바로 요한이라는 이름의 제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에 보시면 요한이 어느날 예수님에게 아주 재미난 얘기를 했습니다. 38절 읽겠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선생님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칩디다. 그들은 우리 편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일 하지 말라고, 예수 이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제가 금했습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예수님이 아주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4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아마 요한은 그렇게 말하면 야, 너는 우리편에 충성심이 많다 칭찬 받을 줄 알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대로 놔 둬라 그 사람도 우리편이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받은 은사, 내 봉사는 항상 생각을 해요. 그러나 우리 전체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받아서 봉사한다면 하나님께서 동일한 은사를 남에게 주어서 한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의 은사를 나를 써 주시는 주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은사를 주어서 동일하신 주의 일을 하게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따로가 아니예요. 우리는 함께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부서만 잘 돼면 안돼요. 다른 부서도 잘 돼야 해요. 우리는 함께 일하는 것이예요. 우리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이 팀 플레이, 팀 스피릿이 중요해요. 그런데 지금 그들이 우리편에 당장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넓게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은 우리 편이 아니예요, 선생님. 편을 가르려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편 가르기 의식이 아주 뿌리가 깊습니다. 왜 그럴까? 제가 생각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아마 문화적 원인도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원인, 우리 한국은 농경사회의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오래 집짓고 삽니다. 한국 사람은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친절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 집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마을 사람, 우리 가족끼리는 친해요. 우리끼리는 죽고 못살아요. 우리끼리는 아주 잘해요. 그러나 낯선 사람만 오면 적대감을 가지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낯선 사람을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것이 농경문화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 그래서 같은 처지끼리, 같은 출신끼리, 같은 지방끼리 뭉치는 고질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 사람은 상당히 다릅니다. 한국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을 보면 잘 대합니까? 저도 가끔 아파트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 평안하셨어요? 인사하면 자꾸 쬐려봐요. 웬 또라인가? 하고. 서양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서양사람들은 인사하려고 하면 제가 하기 전에 먼저 인사합니다. "Hi!" 그러면서 먼저 인사합니다. 왜 다른줄아세요? 문화적인 배경이 좀 달라요. 그들은 유목문화, 옮겨 다니는 문화, 그 문화속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개척해야 하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어야 합니다. 그래서 훨씬 더 세계적인 스케일을 가진 민족들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한국이 세계화 되려면 좁다란 파벌주의 의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것 뛰어넘어야 돼요. 더군다나 세상을 품고,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려는 진정한 세계적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주님의 넓은 가슴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잘 되는 사회, 우리 교회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교회, 우리 민족 전체가 아니 우리 세계 전체가 더불어 함께 열방들이 살아가는 이런 전통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이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이면서 오랫동안 이런 고질적인 파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랫동안 이런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요한의 사적을 연구해 보면 요한이 야고보와 더불어서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예수님의 제자 일행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박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목에서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선생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십시다. 이런 혈기를 부려요. 그런데 거기까지 아직도 변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에게 희망이 없다고 단언해 버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종종 교회안에서 교우들이 참으로 더불어 잘 사는 아름다운 화목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어떨땐 목회의 회의까지 들어요 이렇게 변하지 않는 사람들, 내가 이 사람들을 데리고 목회를 해야만 돼나? 때려치우자. 너무 실망이 되어서 그런 마음으로 제가 너무 가슴아파 잠자리에 드는 순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룻밤 자고나면 제 마음이 변해요. 저는 인간을 낙관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할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요한이 변합니다. 어떻게 변하느냐구요? 나중에 요한이 변해서 요한 1서, 2서, 3서를 써요. 요한 1서, 2서, 3서의 내용이 뭐예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런 사랑의 편지를 쓰는 넉넉한 가슴의 사람으로 요한이 나중에 변합니다. 언제부터 변했습니까?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사도행전에서부터 변합니다. 성령 강림한 이 후에, 성령 충만한 이 후에, 이 사람이 변합니다. 그렇다고 성령충만 했다고 이 사람이 성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달라요. 복음서의 요한, 복음서의 베드로, 복음서의 야고보와 사도행전의 요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행전의 야고보 확실히 달라요. 여러분, 우리가 본능대로 살면 사람은 늘 우월주의,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을 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령충만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성령이 내게 오시고, 성령이 나를 붙잡아 주시고, 성령이 나를 충만하게 하시면 그 때 우리는 넉넉한 가슴, 주의 가슴을 갖고 핍박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이웃들을 섬기고, 이웃들을 주 안에서 세우주는 견고한 섬김의 사람으로 변할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사람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 한 해에, 남은 여생을 주 앞에 진실로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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