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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이켜 보시는 주님의 시선 /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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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돌이켜 보시는 주님의 시선
[본문]  눅22:54-62


「리차드 버튼 경의 삶」이란 책에서 그의 부인은 세상에는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습니다.
①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그는 바보이니 피하라. ②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는 단순한 사람이니 가르쳐라. ③알고 있지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그는 자고 있으니 깨우라. ④알고 있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는 현명한 사람이니 그를 따르라. 무슨 얘깁니까?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도 빨리 깨닫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인생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미리 깨닫지 못한 것을 인하여 가슴아파 할 때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깨닫지 못한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무슨 일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욥 34:32) 인간은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한 체 말하고 행동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언행심사를 반성하는 성찰의 작업이 절대 필요합니다. "깨달음"은 지각, 이해, 통찰력 등과 같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우리말 사전에 "깨닫다"에 대한 풀이가 몇 가지 나와 있지만 그 가운데 성경에서 주지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의미는"심령이 진리에 통한다. 깨치어 환하게 알아내다"라는 풀이일 듯 싶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적 지각과 센스가 다 말살되어 버렸습니다. 죄가 우리의 총명을 어둡게 해버렸고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버려서 영적인 것에 관하여는 보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해서 잘 보이지만 영적인 눈은 감겨있고 마음은 목석처럼 감각이 없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위해서는 이러한 감각이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이 오기까지는 몇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것은 시각(視覺),청각(聽覺),후각(嗅覺),미각(味覺),촉각(觸覺)이라고 하는 소위 말하는 <인체의 오관(五官)>입니다.
먼저는 보는데서 깨달음이 오는 경우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이럴 때에 쓰이는 말입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 것보다는 텔레비젼을 통해서 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세상만사가 다 보는 것으로 통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깨달음이 필요한 곳이면 이 "본다"는 말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깨달음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들어 본다" "냄새를 맡아본다" "맛을 본다" "만져 본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눈이 어두우면 어두운 인생이고 눈이 고장나면 고장 난 인생입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보기는 보는데 깨달음이 없으면 고장난 인생입니다. 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 다음, 사람은 들음으로 깨닫습니다. 듣되 잘 들어야합니다. 잘못된 것을 들으면 아무리 많이 들어도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걸 보면 음악 하시는 분들은 참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피아노 소리만 듣고 "도"인지 "미"인지 안다는 것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듣기는 들어도 민요인지 가요인지도 깨닫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마땅히 들을 것을 들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10장에 보면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들음으로 오는 깨달음 아니겠습니까? 제대로 듣고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따라가야 양이 살 수 있습니다. 잘못 듣고 잘못 따라 가다가는 구렁텅이에 여지없이 빠지고 맙니다.

또한 냄새를 맡고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길거리를 운전하고 가다보면 음주검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경찰이 컵을 입에다 갖다대고 후 불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빨리 자기 코에다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음주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죠. 냄새로 깨닫겠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맛을 보고 깨닫기도 합니다. 가끔씩은 눈으로 봐서는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는 맛을 봐야 합니다. 눈으로 볼 때는 같은 흰색이지만 맛을 봐야 소금인지 설탕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깨닫게 되는 마지막 과정은 만져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손끝에 눈이 달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손으로 만져보고 무엇이든지 그 질을 알아 맞춥니다. "옷감이 부드럽다" 라든지 "물렁물렁하다"라든지"거칠거칠하다"는 등이 만져보고 깨닫는 것들입니다. 특히 갓 돌이 지난 어린아이들에게 뜨거운 커피 잔을 놓고 아무리 뜨겁다고 말해보세요. 알아듣나. 그런데 자기가 손으로 만져보고 뜨거우면 그 다음부터는 손앞에 갖다대도 만지지 않습니다. 왜요, 만져보고 깨달았거든요.

이렇듯 인간은 누구나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만져보는 오관(五官)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 들 그것을 통하여 깨달아지는 바가 없다면 눈, 귀, 코, 입, 손은 액세서리(accessories)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토록 감각기관을 통한 모든 깨달음도 중요합니다 마는 정말 중요한 것은 영적 깨달음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금이 가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소생불능의 상태에까지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밝히 보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몽롱한 꿈속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깨어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고 말씀에 대한 깨우침과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센스와 지각을 길러나가지 않으면 늘 잠들고 맙니다. 깨어 있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은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고 총명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지식이 월등해 지는 겁니다. 유식해 진단 말입니다. 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깨달음(awakening)>과<통찰력(insight)>그리고<지각(perception)>이나 <이해(understanding)>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께서 마음 문을 열어 주실 때 깨달음이 오고 진리를 보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신 29:4, 사 6:9.10) 그리고 우리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은 우리의 강퍅함과 둔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 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고 순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놓아두신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각을 깨워주실 것을 기도 할 수 있어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미련 속에 빠진 한 사람을 만납니다. 베드로이지요. 예수님을 죽을 때까지 따르겠노라 장담했던 베드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용감하게 칼을 빼어들고 달려드는 사람의 귀를 내리칠 정도로 정의감에 불탔던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법정에 끌려가는 현장에도 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베드로가 보여 줄 수 있는 자기의지의 전부입니다. 54절에 보면"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겁한 태도입니다. 이런 기회주의가 언제나 문제를 만듭니다. 가봐서 예수가 불리하면 도망하고 이적이라도 행하셔서 보좌에 앉게 되면 "나는 그의 수제자"라고 나설 참이었는지 모릅니다. 결과를 보겠다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에 시험이 꼬리를 물고 따라옵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가까이 따라가야 합니다. 문밖에 서서 결과를 따라 결정하겠다는 생각은 함정을 자초했으며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행위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시인하는 자에겐 절대로 시험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길만이 나의 길이요, 다른 선택이 없다는 확고한 자신을 가진 자는 모든 시험을 이기지만 다른 길이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망설이는 자는 반드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자기가 이렇게 나약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리는 천하에 몹쓸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베드로는 밤이 깊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줄 알고 슬쩍 대제사장의 집안에 끼여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베드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실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거나 당황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까맣게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지은 사람은 어떻게든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사람들을 피하려고 했으면 불빛이 비치지 않는 뒤쪽에라도 서 있을 것이지 성경에 보니까 "불빛을 향하여 앉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불을 피워 놓은 곳에 함께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을 안고 앉아 있는 베드로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무리들과의 사이에 베드로의 얼굴이 훤하게 보인 건 말하나마나 입니다. 불빛이 번득일 때마다 불안과 초조감에 쌓인 베드로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봅니다. 오늘 성경에는 여종이 베드로를 쳐다보는 것을 "주목하여"라고 표현했습니다 마는 표준 새 번역에는"빤히 노려보고"라고 되어있고, 현대어성경에는 "자세히 뜯어보고"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리 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몇 번이고 다시 보고 기억을 더듬고 또 다시 보고하던 한 여종이 급기야 소리칩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던 자다!"순간 베드로는 당황합니다. 하지만 재빨리 부인합니다. "이 여자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생사람 잡지마!"그리고는 시치미를 떼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듯한 행동이기에 아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또 다른 사람이 아무리 봐도 본 사람이기에 또 한 마디 합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무리 가운데 한사람이 틀림없다"하자 또 다시 베드로는 곧장 받아칩니다."야, 이 사람아 사람 잘못 봤네"너무도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이제 시끄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구석구석에서 베드로를 두고 "맞다, 아니다"하는 의견들이 분분했을법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사람이 와서 성경의 표현대로 장담하며 가로되 "이 사람 말투가 갈릴리 사람말투야, 예수와 똑같은 말투잖아!"하고 강경하게 몰아붙이자 베드로 역시 강한 어조로 되 받아칩니다. "아, 이 사람아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네. 글쎄 나는 저 예수라는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소리치는 순간 닭이 웁니다. 지금까지 그는 예수님께서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확실히 기억나게 해준 것이 한 마리의 닭 우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머지 여생동안 닭이 울 때마다 자신의 부끄러운 영적 흑암의 밤을 생각하고 눈물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마는 그러나 결정적으로 베드로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고 그로 하여금 대제사장의 안 뜰에서 바깥뜰로 나가 엎드려서 통곡하게 했던 것은 <주님의 시선>이었습니다. 오늘 말씀61,62절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베드로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자마자 예수님께서 그를 돌아보십니다. 순간 베드로의 가슴이 철렁해 졌습니다. 이제야 깨달음이 오는 순간입니다. 그때의 감정이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입니다. 목구멍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아올라 옵니다. 주체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못하게 하여 뛰쳐나갑니다.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대제사장의 뜰에서 두 개의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의 여종의 시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바라본 여종의 시선과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그 시선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여종의 시선은 미움과 정죄의 눈총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쬐고있던 모닥불은 따뜻했어도 여종이 던지는 시선은 차갑기가 그지없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시선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여종이나 하인들처럼 다그치는 질문이나 단언적인 정죄의 선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말 없는 눈길이었습니다만 가슴을 아리게 하는 뭉클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노려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원망도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왜일까요? 주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는 사실이 놀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와 닿는 지척에 있으면서 세 번씩이나 저주와 맹세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과연 바라 볼 가치가 있는 자입니까? 그런 인간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바라본들 무슨 유익이나 있긴 하겠습니까? 아예 쳐다 볼 필요조차 없는 배신의 제자가 아닙니까? 더군다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모욕과 힐난과 조소와 비판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당하는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가 안타까워서 한 번 더 돌아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시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시험에 빠져서 이미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행위는 이미 예수님이 없어진 지 오래가 아닙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속에 남아있기나 한 것입니까? <돌이켜 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약해졌고, 비참해졌고, 비굴해 지기까지 했습니다. 사랑은 지혜요, 능력이요, 힘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서 주를 배반한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는 시선으로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불 신앙적이고 내의지로 사는 참으로 한심한 우리를 향하여 그 사랑의 시선을 돌이키십니다. 이 사랑의 시선 앞에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어찌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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