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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뇨 (마 21: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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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뇨(마태복음 21:23-27)

요즘 이사갈 때 남자들은 얼른 개를 안고 이삿짐 차 운전석 옆에 앉아야 된답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개라도 안고 있어야 개 데려갈 때 개를 안고 있는 남자 데려가지, 그렇치 않으면 남편 안 데려간답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오늘날의 세태를 잘 풍자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50-60대가 되어서 직장 잃어버린 남자들의 신세가 참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 현대 후기시대라고 말들 하는데 이 시대의 특징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까지 내려오던 전통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도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가르치고 전통을 가르치는 사람까지 그 권위(權威)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해서 임금의 권위와, 스승의 권위와, 아버지의 권위를 얼마나 높여주었습니까?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자식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전혀 토를 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보면 옛날로 치면 임금인 대통령을 존경합니까? 스승의 권위는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구세대라고 해서 상대하지 않고 얼마나 무시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권위가 떨어지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는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집단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자리를 가지고 자꾸 권위를 세우려고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마는 주어진 권위가 아니고 내가 섬김으로 스스로 얻어진 권위는 점점 더 세워져야만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군중과 권력>이라는 책에서 권세를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비유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찬양대로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찬양대의 지휘자가 손을 흔들면 대원들은 다 지휘자를 따라합니다. 지휘자를 주목하고 그 손이 움직이는 대로 큰 소리, 작은 소리를 내고, 시작하고 마치고 하지 않습니까?
지휘자의 권세가 대단합니다. 지휘자의 권세가 왜 대단한가하면 우리 교회의 찬양대는 교회가 허락한 권위가 있습니다. 지휘자는 악보를 따라야만 합니다. 지휘자가 교회가 주는 권위도 없고 악보를 따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지휘를 한다면 누구도 그 지휘자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법(法) 안에 권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법을 떠나서는 어떤 권세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새파란 경찰이 나이 많으신 분들의 차를 척척 세우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국가가 위임한 법 안에서 가지는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지켜오는 전통을 중요시하고 거기에 권위를 둡니다.
세 번째로는 카리스마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신(神)적인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할 때 거기에 권세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세, 예수님의 권세가 바로 이런 권세였습니다.

1. 예수님 가지신 권세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주님의 권세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권세가 나왔느냐,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제사장들이 예수님께 묻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오실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제자들은 자기의 겉 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얹어서 안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도 자기의 중요한 겉옷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실 길 위에다 펴서 깔았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겉 옷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합니까? 또 많은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잘라서 길에 펴서 예수님의 행렬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지를 잘라서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오실 때에 온 성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왕의 대관식(戴冠式)과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매매(賣買)하는 자들을 몰아내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床)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기도하는 내 집을 왜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고 아주 새파란 젊은 분이 당당하게 호통을 치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묵인했던 성전의 비리를 파 헤치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의 체면이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오셔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었을 때 예수님의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이 모습을 보았던 어린아이들이 성전 안에서 “호산나!!”하고 예수님을 향해서 찬송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찬송을 하니까 그 광경을 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얼마나 마음에 시기심이 일어났던지 예수님에게 와서 “저 소리를 듣지 못하느냐, 왜 이렇게 당신 때문에 성전이 소란해야 되느냐? 저 사람들을 좀 만류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만약에 저 아이들이 찬송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일어나서 저 찬송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찬송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길 가에 있던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완전히 말라버렸습니다. 그 소문에 예루살렘에 좍 퍼지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전에 행하신 이적은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에 입성해 올라 오시면서 불과 며칠 사이에 세상이 놀랄 일들을 행하셨는데, 이런 일을 할 권세를 누가 주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당시에는 가르치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정된 랍비(rabbai)들만 할 수 있는데 예수라는 젊은이가 와서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가르치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슨 권세로, 누가 이런 권세를 주어서, 가르치는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에 ‘그 권세의 근원이 나에게서 났다’라고 하신다면 합법적인 랍비가 아닌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쳤으니까 이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라고 말하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체포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반문을 하셨습니다. <나도 하나 묻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 <하늘로서 왔다>는 말은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어서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께로서 왔다고 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뭐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의 세례를 ‘하나님께로서 왔다’고 하면 왜 그가 한 말을 믿지 않느냐, 왜 나를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요,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백성들이 돌을 칠까 두려워서 의논을 했습니다. ‘모른다고 하자.’ 그래서 모르겠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도 <그렇다면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시느냐, 이 권세가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중요한 대답입니다. 이 권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구원받을 수도 있고, 멸망받을 수도 있는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의 권세가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사람에게서 왔다, 요즘 도는 풍문이다, 그저 지나가는 소문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멸망에 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같은 사람은 유대인이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부자였습니다.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대관원들이 다 예수님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일부러 거부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그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이적과 표적,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이런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밤중이지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하다가 불뱀에게 물려서 죽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서 높은 장대에 매달아라.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보면 산다고 이야기 하라. 모세가 만든 놋뱀을 바라 본 사람들은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나도 놋뱀처럼 높은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이다. 모세가 장대에 놋뱀을 단 것처럼 인자(人子)도 달려야 할 것인데 그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나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놀라운 이 구원의 진리, 거듭남의 진리,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순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돌아가실 때 백근이나 되는 향품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랐습니다.
당시 예수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하면 다 잡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제자들까지도 다 도망을 간 그 때에 예수님의 권세를 알고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면서 나는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권세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거듭남의 비밀을 배워서 구원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마태복음만 보면 갈리리 해변가를 거니시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깁다가 그물을 버려두고 따른 것 같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을 함께 읽어보면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고 있는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저 분이 바로 메시야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께 물으니 <와 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듣고나니까 아, 이 분이야말로 세례 요한이 이야기하던 바로 그 메시야 구나! 하고 깨닫고 너무 감격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형님 베드로에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한 번 가 봅시다.”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오니까 예수님께서 <네 이름이 시몬이지? 이제부터는 시몬이라하지 말고 게바라고 해라.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해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까지 얹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어느날 친구와 함께 고기를 잡고 그물을 깁고 있는데 마태복음 4장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나를 쫓으라>고 하시니까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온전히 따라간 것이 아니고 그날 따라가서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시는 것을 보고, 설교를 듣고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자으려고 그물을 던졌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 하고 아침에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배에 잠시 올라오셔서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신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안 맞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얻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이니까, 밑져도 본전이니까 그물을 한 번 내려 보겠습니다.”하고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질 지경입니다. 옆에 있던 친구를 오라고 해서 도와달라고 했더니 고기가 두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기뻐서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평생에 처음입니다. 한달 동안 잡을 고기를 지금 다 잡았습니다.”하고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고 바다의 고기까지 모아오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과 같은 분이 아닌가를 깨닫고 그 앞에서 벌벌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에수님의 그 권세 앞에 벌벌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의 권세를 발견하고 난 다음 그때부터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서 순교할 때까지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제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 그 권세를 깨달아야만 니고데모처럼 구원도 받을 수 있고 베드로처럼 제자도 되고, 사명자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심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만 구원받고, 그 믿음이 있어야만 순종할 수 있고, 그 믿음이 있어야만 축복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세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왔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고 들것을 달아 내려서 예수님 앞에 병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수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느냐, 그런데 새파란 젊은이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니까 이런 망령된 말이 어디있느냐고, 이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수군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우리가 생각할 때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면 사해졌는지 사해지지 않았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말이 더 쉬울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데 일어나서 못 걸어가면 부도수표 아닙니까? 얼마나 망신입니까?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 그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걸어갔다고 하면 그 앞의 말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사실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하시고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시니 이 병자가 벌떡 일어나서 자기 침상을 들고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는데 바로 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바로 내가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일으킬 수 있는, 고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백부장이 나왔습니다. 백부장은 로마군인으로서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교입니다. 이 백부장에게 한 하인이 있었는데 그 하인이 그만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예수님, 제 하인 중의 한 사람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면 낫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래, 네 집에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며 집으로 가자니까 이 백부장이 “예수님, 예수님이 저의 집에 오시는 것을 제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백 명의 군사에게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고, 예수님이 오시니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고 잔치를 준비하라면 다 합니다. 제 말 한 마디에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질병은 나가라! 중풍병자는 일어나라!하시면 제 하인이 일어날 줄을 제가 믿습니다. 그러므로 집에까지 오셔서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말씀만 해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무 놀라셔서 <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이스라엘에도 이런 믿음이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도 아닌 이방인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니 그래,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시니까 바로 그 시에 중풍병 걸린 하인이 벌떡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병자를 일으킬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온 인류가 다 주님 앞에 부활되어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예수님은 바람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결박하고 쫓아낼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할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권세가 있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응답하실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실 권세를 홀로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거부하면 멸망밖에는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받고, 질병에서 치료받고, 가난에서 부요하고, 기도해서 응답받고, 천국의 주인공 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예수님의 권세 안에 우리의 건강문제, 자녀의 문제, 장래문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주님의 권세 안에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이 다 달려있다, 주님께서 쥐고 계신다, 이것만 믿으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권세를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믿으면 그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가 가졌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권세있는 자로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그러므로 가라,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마귀는 예수님에게 굴복합니다. 이 땅의 모든 질병도 다 예수님에게 굴복합니다. 이 땅의 모든 자연만물도 다 예수님에게 굴복하는데 오직 한가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굴복하지 아니하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줄 믿습니다.

3. 우리에게 주신 권세

자, 그런데 예수님만 이런 권세를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권세를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12명을 제자로 부르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전도하기 위해서 내어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면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그런 권세를 주어서 전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전도하러 나갈 때에 혼자 보내지 아니하시고 병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까지 주어서 전도자로 나가는 줄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70명을 2명 씩 짝을 지어서 전도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가서 전도하고 와서는 기뻐서 예수님께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고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귀신들이 나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이런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고 주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이 권세를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권세를 이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이 권세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아무 권세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을 자꾸 관념적으로, 자꾸 이성적으로, 저꾸 도덕적으로만 몰고 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농부가 병아리를 부화시키기 위해서 어미 닭에게 달걀을 넣어 주었습니다. 산에 올라갔더니 독수리 알이 있어서 그 알을 어미 닭의 품에 같이 넣어 주었습니다. 병아리도 부화되고 독수리도 부화가 되었습니다. 병아리는 얼마나 예쁩니까. 노란 깃털이 윤이 나는 어린 병아리는 참 예쁜데 독수리 새끼는 자기 모습을 보니까 털도 거칠고 몸집도 크고 모양이 안납니다. 병아리가 되지 못한 자기 모습을 비참하게 생각하며 얼마나 안달했겠습니까? 병아리도 독수리도 점점 자라납니다. 어느날 하늘에서 솔개 한 마리가 돌면서 병아리를 낚아채려고 하는데 병아리들은 전부 어미닭 품 속으로 숨어듭니다.
독수리 새끼도 병아리를 따라서 도망을 치다가 어느 순간에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었습니다. 독수리는 자기가 병아리가 아닌 것을 그제야 깨닫습니다. 닭이 아니라 새 중의 왕인 독수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공을 날아오르기 사작했습니다. 신분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병아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병아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독수리와 같은 존재로 권세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권세가 있는데 아무 것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경찰관의 손이 특별한 손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가 준 권세가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차가 손가락짓만해도 와서 서지 않습니까? 작은 차만 서는 것이 아니라 벤츠도 섭니다. 큰 트럭도 섭니다. 우리의 손이 별다른 손이 아닙니다. 평범한 손이지마는 주님께서 우리 손에 권세를 주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족이 병들고 구역식구가 병들 때 우리는 손 놀려놓지 말고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믿고 기도하면 주께서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성도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셔서 나았다고 합니다. 저는 기도해주고 나서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나서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서 깨끗하게 나음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손이 별다른 손이 아닙니다.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셨고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제가 목회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께도 다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권세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권세가 내게 있음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고 사용하는 바로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아들만 되어도 얼마나 권세가 대단한지 지난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을 보면 돈을 주려는 사람들이 하도 안받으면 밥 먹다가 화장실에 갈 때 벗어논 겉옷에다 막 집어 넣는답니다. 대통령의 아들만 되어도 그런 권세가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너희가 어느 집에 갔을 때 그 집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면 내가 너희들이 빈 평안을 그대로 이루어주마> 이런 권세까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권세가 뭡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축복권을 우리에게도 주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4장 7절에서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명령하라고 했습니다. 병마(病魔)라고 하는데 병마가 뭡니까? 병을 주는 마귀라는 말입니다. 그 병마를 향해서 명령하고 쫓아내라는 말입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감기는 떠나가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암병은 사라지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가난은 물러가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명령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우리에게 질병이 올 때, 어려움이 올 때, 명령하여서, 대적하여서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권세를 우리에게도 주셨음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묻어두지 말고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도 내가 할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일까지 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런 권세가 우리에게 있음을 믿고, 관념적으로, 머리로만, 경험적으로만 신앙생활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권력의 이동(Power shift)'이라는 책에서 권세, 권력이 이렇게 역사적으로 흘러간다고 했습니다. 문명이 발달되기 전에는 ‘완력’이라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힘, 체력이라는 권세가 있었는데 힘센 사람이 제일이었습니다. 다음에는 ‘경제력’이 권세가 되었는데, 돈이 많으면 양반이 되고, 돈이 권세였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돈을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력’, 지식이 권세였습니다. 기술이 있고 지식이 많으면 권세를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권세 앞에는 많은 돈도 몰려 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도덕적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덕성을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 힘을 못 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靈的)인 권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 권세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그 권세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성도가 될 때에 우리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상실하고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교회와 성도가 아니라 경건의 능력과 그리스도인의 권세까지 회복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만 세상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신앙을 관념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합니다. 도덕적으로 생각합니다. 윤리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기독교라는 한 종교로만 만들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신 이 권세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가고, 가난이 물러가고, 문제가 해결되어서 세상사람들이 너, 무슨 권세를 가지고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예수님의 권세>라고 대답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들을 구원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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