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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罪)와 벌(罰) / 암 1:3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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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아모스 1장 3절 - 2장 5절       
제 목 : 죄(罪)와 벌(罰)

아모스서는 크게 둘로 구분됩니다. 1장에서 6장까지는 아모스가 받아 선포한 예언의 말씀이고 7-9장은 아모스가 받은 환상(vision)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목할 것은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아모스서는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 대하여 먼저 예언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이 그 내용,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의 죄를 깨우치고 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입니다.

그 주변 나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지도 참조

다메섹(아람)<v.3-5>, 가사(블레셋)<v.6-8>, 두로<v.9-10>, 에돔<v.11-12>, 암몬<v.13-15>, 모압<v.2:1-3>, 그리고 이스라엘의 형제 나라 유다<v.4-5> 이렇게 일곱입니다. 먼 나라에서부터 가까운 나라로 차례로 예언을 합니다.

이 예언들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주변 나라들을 손보시겠다는 것,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손을 보십니까? 죄악 때문이지요? 죄악 때문에 벌을 주시겠다는 내용이 주 내용입니다.

어떻게 벌을 주시는가? 벌을 주시는 방법에 대하여는 거의 같은 표현을 씁니다. 불을 보내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불, 모두 다 불태워 버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을 보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철저성,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심판하십니까? 각 나라의 "서너가지 죄 때문에..." 심판하십니다. " 여러분도 읽으시면서, "...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반복적으로 나오는 표현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정말로 서너가지 죄 때문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도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서 이는 어떤 일의 심각성, 고질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말 안듣고 어기적 어기적 거리는 아이에게 말 듣게 하려면, 너 셋 셀때까지 안들으면 혼난다... 하나, 두울, 셋..셋는데 그래도 안들으면, 넷... 셋도 아니고 넷까지 셋는데 꿈쩍도 안해? 너 한번 맞아봐라.."

셋, 넷의 숫자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가 고집스럽게 반복하는 죄 때문에 매를 맞는 것이지요.

비슷합니다. 서너가지 죄 때문에가 아니라 이 나라들이 고질적으로 행하고 있는 어떤 심각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이 나라들이 고질적으로 행한, 심각한 죄가 무엇입니까?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이니까 아람족속의 죄는 <3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으라"로서 이웃을 잔인하게 정복한 것을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무자비하게 강포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악입니다.

자신의 영토를 늘리기 위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성공과 뜻의 관철을 위하여 강포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기뻐하십니다.

가사는 블레셋의 수도이지요? 블레셋의 죄는 <6절>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붙였음이라"로서, 에돔은 노예 무역을 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이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다가 노예로 팔아먹은 것을 말합니다.

전쟁을 해도 주민들과 재산은 보호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자신의 물질적 풍요를 위하여 사람들을 물품처럼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돈벌기 위하여,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사람을 조작하고, 이용하고 사람의 인격성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입니다.

두로의 죄는 <9절>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음이라"로서, 자신에게 크게 이익이 될 것같으니 약속을 져버린 것을 말합니다. 계약을 파기하는 것, 배신. 그 형제에게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게 하겠습니까? 예) 단테의 신곡 - 지옥에 가면 가룟 유다와 브루투스가 있다고 하지요?

에돔의 죄는 <11절>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로서 마음에 분노와 미움이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을 말합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당한 이후로, 에서의 후손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용서치 못하고 미워합니다.

용서치 못하여 미움의 노예가 된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분노와 증오가 삶을 살아가는 동기가 된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무엇이 동기가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같습니까? 혹시 두려움이나 분노나 증오 아닙니까? 아니면 "질투은 나의 힘"했듯이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하여, 넘부럽지 않도록 비교가 동기가 되어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부정적 정서가 동기가 되어 살아가는 삶, 엄청 피곤한 삶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에돔, 긍휼을 져버리고 노가 항상 맹렬하여 끝없이 분노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암몬의 죄는 <13절>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로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우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말합니다.

모압의 죄는 <2:1절> "에돔왕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음이라"로서, 회를 만들었다는 것은 생선 회(膾)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고 재 '회(灰)'자로서 재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상대국의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드는 것은 다시는 대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잔인하게 복수하는 대표적 상징입니다. 복수를 하는 사람은 자신도 똑같이 보복을 당할 것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들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으려고 합니다. 보복하고 복수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죄는 <2:4>로서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갔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로서 다른 주변 나라들과는 좀 다르게 지적하시지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는지 가르쳐 주지 않고.. 일반적인 불신앙을 지적합니다.

다메섹 아람의 잔인성, 가사 블레셋의 비인간성, 두로의 배신, 에돔의 분노와 증오, 암몬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몰인정, 모압의 복수심, 유다의 불신앙.. 이런 죄악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시지 않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여러분은 유다를 제외한 여섯 이방 나라들에 대한 죄와 벌을 말씀하시는 본문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즉 하나님께서 어떤 죄에 대하여 심판하십니까?  가만히 살펴보면, 공통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비인간적이고, 몰인정적이어서 사람의 생명,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잔인한 죄악들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그 존엄성을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인식

오늘 우리 나라가 극복해야 할 장벽 중의 하나가 세대간의 인식의 차이입니다. 내일이 3.1절인데 3.1절에 교계에서도 두 집회가 있습니다. 소위 보수세대와 개혁세대간의 차이입니다.

개혁세대는 남북한의 평화적인 교류와 협력, 북한동포돕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보수세대는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위하여 성토합니다.

우리 교회는 거의 다 개혁세대들이라 북한을 괴뢰도당으로 모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다수입니다.

그런데 왜 나이드신 분들이 북한을 생각하면 괴뢰도당이라고 하고 반드시 잡아 죽여야하고 그러는지 이해하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6.25체험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산당들의 잔인성을 목도하고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마저 무시하고 짓밟는 것은 아무리 좋은 미사려구로 그 사상을 설명하여도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임을 양심이 증거합니다.

상식적 인륜을 무시하고 천륜을 무시하고 잔인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 이것은 거부되어야 하는 죄입니다.

예)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

오늘 설교의 제목이 '죄와 벌'인데, 여러분 이 소설 많이 읽어 보셨지요? 읽어 보지는 못했어도 제목은 다 기억하시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라스꼴리니코프 라는 청년, 의협심에 불타는 가난한 청년이 주인공이지요?

그가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채, 많은 돈만 움켜 쥐고 있는 노파를 생각하면, "저런 사람은 살 이유와 가치가 없다, 저런 사람을 죽여서 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죄가 아니다" 생각하고 확신하고 다짐하고 스스로 세뇌하여 노파를 죽이지요?

그러나, 그 노파를 죽인 이후.. 어떻게 됩니까? 그의 심령은 몹시도 시달립니다. 끝없이, 반복해서... 그가 배운 공산주의 이론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켜보지만, 그러나 그의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 죄책감에 그는 몹시도 시달립니다.

아무리 좋은 이유, 구실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상식적 인륜을 무시하는 사상, 사업, 종교는 심판받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이유는, 그들의 비인간성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주변 나라들이 왜 이렇게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이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인격성을 짓밟고 무자비하게 행합니까?

이런 것들이지요? 승리자의 쾌감을 맛보기 위하여, 물질을 얻으려고, 돈을 챙기기 위하여,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앗쌀하게 보복하고자 하여.. 이런 것들 때문에 잔인하게 정벌하고 형제의 등에 칼을 꽂고 양심의 눈을 질끈 감고 그랬지요?

자신의 소유를 넓히기 위하여, 자기들이 더 쉽게 살고 배불리 먹기 위하여 그리고 용서하지 않고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자존심을 드높이며 자신의 마음이 통쾌하도록.. 모두가 다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행해진 일들입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잔인해집니까? 욕망과 야망에 의하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복수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거칠어지고 우리 사회가 왜 그렇게 비인간적이 되어 갑니까? 언어 표현도 점점 더 거칠어지고 행동도 과격해지고 자꾸 목소리가 커지고 더 자극적이고 자극적이다 못해 엽기적이고 왜 그렇게 됩니까?

욕망과 야망을 다스리기보다는 더 부추기는 분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엔니꼬 모리꼬네의 감미로운 음악의 여운이 오래 남는, '미션'이라는 영화 기억하십니까?

영화의 소재가 되는, 1750년대 폭포 위에 위치한 남미 과라니 원주민 선교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의 '구획정리'가 필요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 선교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많은 개종자들이 있기 때문에 교황청의 승인 내지 양도가 없으면 세속국가가 점령할 수 없는 구도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교황청 특사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정치꾼 사이에 모종의 타협이 진행된다.

주인공 가브리엘 신부가 세속 권력이 원주민을 점령하는 것을 몸으로 막으려 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그는 아름다운 죽음으로 한 알이 밀알이 되고 원주민 마을은 처참하게 점령되고 맙니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남미의 원주민을 다 죽이고 승리는 하였지만, 많은 생명을 죽인 죄책감에 양심에 가책을 느낀 제수잇 수도원의 사제와 교황청의 사제가, 기억해 둘만한 서로 대화를 합니다.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것 아닙니까?"
"세상은 다 그런 것입니다."
"아닙니다. 세상이 다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것'이자 '하나님의 식'이 되어야할 '선교'마저도 인간적 욕망과 사업을 통할 때, 자칫하면 얼마나 곡해되고 비인간화되는지 교훈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잔인해지고 싶어서 잔인해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무자비해지고 싶어서 무자비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욕망과 야망을 다스리지 않고, 나의 욕망과 야망으로 양심을 억눌렀을 때, 어느새 잔인해진, 무자비해진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무자비, 비인간성, 증오의 적개심에 대하여 심판, 응징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는 극단적 언어, 거친 행동으로 나타나는 무자비, 비인간성, 증오의 적개심에 대하여 심판, 응징하십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을 해 볼까요? 하나님께서 이런 죄악들, 비인간적 잔인함, 몰인정, 증오의 복수심 이런 죄악을 묵과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러면 거꾸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렵지 않지요? 자비, 긍휼, 인간의 생명을 존귀히 여기시는 것, 용서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존귀히 여기십니다.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며 긍휼을 베푸는 것, 온유한 마음과 부드러운 말로서 표현하는 것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모스서는 정의의 예언서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선포하는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이 아모서 예언의 맨 처음에 정의의 하나님의 심판의 멧세지를 선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고 증오의 복수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무엇이 의로움입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웃에게 잔인하게 행하지 않는 것, 이웃에게 복수하지 않고 이웃을 용서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자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옳음, 정의이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 미움의 칼날에 의해서 죽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정의의 칼날에 의하여 죽었습니다. 

의의 이름으로, 의의 명목으로 인자를 짓밟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인격성과 존엄성을 무시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말하고 과격하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을 무참히 짓밟는 것,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생명과 삶을 존중하는 휴머니즘(=인류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배우고 세워야 하는 우리가 우선적으로 기억하고 싶은 멧세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 모세가 반석을 명하지 않고 두들겨 팬 것...

여러분은, 모세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자기 혈기로, 성질대로 반석을 두들겨 쳤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나침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강함은 과격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순하게 사십시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되어지지 않더라도 이웃에게 자비롭게 대하며 사십시오. 혹시 정당한 화를 낼 때에도 순한 말을 사용하십시오.

순하게 사십시오. 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어떤 명목으로도 무자비하게 보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앗쌀하게 말 쏟아내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말처럼,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 자신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된다고 하지요? 긍휼과 자비를 져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명목으로도 긍휼과 자비를 짓밟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배우고 세우고자 한다면 먼저 순하게 살기를, 부드럽게 살기를 기도하십시오. 뚜껑 열리지 않도록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흙보다 더한 겸허를 지녀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입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참된 용기는 과격한 분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정의의 용기는 겸손의 심령에서부터 자라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저희가 이 예언의 말씀들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주변 나라들의 잔인함, 무자비함, 비인간성의 희생이 되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주변 나라를 생각하면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일본 사람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 예언을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통쾌하고 고소해하고 그런 느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오늘 설교에서 중요하게 기억해야할 사실은, 이 예언들은 주변 나라들에게 선포된 예언이 아닙니다. 이 예언들은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백성들이 들으라고 들려주신 예언들입니다.

왜 이스라엘에게 주변 나라들을 심판하시겠다는 이 예언의 멧세지를 먼저 들려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웃 나라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묵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저 못된 나라들은 왜 심판하시지 않는가?" 이런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그렇게 한스러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인 내가 다 알아서 심판한다. 그들의 죄악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공의의 하나님인 내가 알아서 다 심판한다" 말씀하시고 그러니 어떡하라구요?

이스라엘아 네가 할 것은 원망과 불평, 탓을 그치고 나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깨우치시기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굴곡된 마음을 치유하십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쌓여 있으면,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보지 못합니다.

소위 상처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 한이 쌓여 있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 그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상처, 한과 분노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의 치유를 위하여, 자신의 마음의 건강함을 위하여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진리를 명확히 깨우쳐 주었습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내게 깊이 상처가 되도록 악을 행한 어떤 사람의 죄, 어떤 놈의 악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매여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 맡겨서.. 원망과 불평을 그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에돔이 자신이 당한 것 때문에 분노와 증오를 품고 있는 것에 대하여, 모압이 에돔에 대하여 복수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음을 기억하면, 내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고 나의 길을 가로막고 한, 내게 명백히 악을 행한 사람일찌라도 그에게 악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깨우쳐 주었지요?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2>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당신의 마음에도 죽이도록 미운 사람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픔과 어려움을 겪는 것이 바로 그 놈 때문이다 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 아픈 기억에 당신의 마음이 매이지 않게 하십시오.

그가 내게 행한 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당신의 마음을 한과 증오, 복수의 유혹으로부터 자유케 하십시오.

무엇이 정의입니까? 인자를 사랑함이 정의입니다.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나의 뜻과 야망이 성취되지 않더라도, 조금 가난하게 살더라도 이웃에게 무자비하게 대하지 않고, 몰인정하지 않고, 분노를 내려 놓고 용서하는 사는 것이 의의 삶입니다.

의의 명목으로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이름으로 과격하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마음, 복수의 유혹,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인자를 사랑하며 이웃에게 큰 선을 행하지 않더라도 긍휼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의의 삶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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