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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없기에] 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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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기에> 막3:1-6
새문안교회 2004. 3. 7 주일예배

오늘 본문은 이미 노출되기 시작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의 이견과 대립이 첨예화되게 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이견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일이 가한지 아닌지에 관한 것입니다. 아마도 가버나움일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거기에 한쪽 손이 마른 한 사람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 예외 없이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병 고치는 능력을 알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회당 안에 예수님도 계시고 한쪽 손 마른 사람도 있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치실지 아닐지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으므로 만일 예수님께서 그 한쪽 손이 마른 한 사람을 고쳐주신다면 안식일을 범한 죄로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던(눅6:8) 예수님은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회당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회당 가운데 세우실 뿐 아니라 숨어서 예수님을 엿보던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생각을 만인 앞에 끌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에 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성회로 모여 예배하는 것 외에 일체의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그들의 열심은 심지어는 아프거나 다쳤어도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은 의원을 찾거나 치료행위를 하는 것조차 삼가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 있어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안 하며 안식일을 지내는 것이고,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시면서 바리새인들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물으실 때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말하고,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하고 있던 생각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숨은 생각이 과연 그들이 그토록 중히 여기고 내세우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지를 답해보라고 압박하신 것입니다. 즉 안식일에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악한 일이라고 여기는 그들이 실상 자신들은 안식일준수를 내세우며 속으로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 과연 안식일을 잘 지키는 선한 일인지를 답하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상 밖의 질문과 공세에 바리새인들은 무척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답을 못하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들이 양심이 찔려서 답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악한 일에 대한 뉘우침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 고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시며 탄식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 하시며 그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나갔고 곧바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려는 열심에 찬 사람들이 안식일도 범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까지도 범하는 무서운 범법자들로 돌변하고 마는 이 광경 앞에서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이 물음에 우리는 "사랑이 없기에"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고 공격하신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답을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바리새인들은 긍휼 즉 사랑을 버렸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껍데기만 붙잡고 있었지 율법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을 내버렸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문자만 알고 있었지 율법의 참 정신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면 아무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잘 드려도 되돌아올 것은 화(禍)밖에 없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는 남의 고통에 대한 그들의 무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정신보다 문자를 더 중요시하는 율법주의 사고체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에게서 한쪽 손이 마른 사람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나 동정심이나 관심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쪽 손이 말랐다는 것은 한 손이 성장을 하지 않고 비쩍 말라있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손은 마음대로 쓸 수 없었고, 쓰지 못하니 굳어지고 비틀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한 손이 그렇게 되니 온 몸도 같이 뒤틀린 자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단지 한 손만 불편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불편하고 마음도 편하지 않고 우울해졌을 것입니다. 고칠 수만 있다면 한 순간이라도 빨리 고치는 것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압니다. 그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법을 찾고 절차를 따지며 때를 기다리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법을 찾고 절차를 따지며 때를 기다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법을 찾고 절차를 따지며 때를 기다려야 할 일과 그것을 넘어설 수 있고 넘어서야 할 일을 가릴 줄 아는 지혜와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 뜻은 사랑하라는 데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 자신이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남의 허물을 보지 못하게 만들며 남의 장점만을 찾게 만듭니다. 그러나 미움은 남의 작은 실수를 크게 보이게 만들고 남의 허물만 살피게 하는 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랑이 없었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고침을 받는 일에는 하등의 관심도 없이 오직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는지 아닌지만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세는 결국 안식일에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불신앙적 집단들과 함께 꾸미는 데로 나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심으로써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시고 안식일준수의 참 의미를 새롭게 밝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쪽 손 마른 사람도 살리시고 안식일도 살리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계명도 그렇듯이 안식일을 바르게 지키는 것은 그 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하루가 되게 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행하며 그 가운데 사랑을 베푸는 일로 그날을 지내는 것입니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손 고침을 얻을 목적으로 회당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예배드리러 회당에 와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먼저 예수님에게 손 고쳐 달라고 간청한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를 불러 세우시고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 말씀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예수님도 그 사람도 돈을 벌 목적이나 오락을 즐기려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의 동기 이외에는 거기에서 아무 것도 발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어떤 일도 없었습니다. 오직 한 쪽 손 마른 사람이 고침을 받는 은혜의 역사만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런 은혜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역사 앞에서 못마땅해 할 만큼 바리새인들은 눈이 어두웠고 마음이 완악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힘입니다. 반면에 사랑의 결핍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모든 것을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문제들을 해결불가능의 상태로 몰고 가기도 하고, 어디서나 상황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기를 피한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나가자마자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헤롯당이란 어떤 종교적 분파나 조직된 정치단체가 아니라 헤롯가와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지지하며 그들 편에 붙어 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헤롯당은 헬라문화의 영향과 로마의 정치에 대해 타협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속에서 헤롯당은 언제나 바리새인들과의 협력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의외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공통되는 것이 거의 없고 오히려 서로 대립적이어야 할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손을 잡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눈이 멀자 그들이 손잡아서는 안 될 자들과 쉽게 손을 잡는 자기모순적이고 자기기만적인 행태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과 종교적인 갈등관계에 있던 예수님을 헤롯당과 손잡고 더러운 정치의 힘을 빌려 제거하고자 하는 비열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헤롯당은 헤롯의 이혼과 부도덕한 재혼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미워했고 따라서 그 세례 요한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악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헤롯가문이 로마에 충성하며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영구히 보존하기를 바라는 그들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자칭 메시야라 하는 자들이 나타나 종종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내란을 일으킴으로써 헤롯왕조를 위협해온 터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이 또 민족봉기라도 일으킬까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이용하려한 것입니다. 이것도 사랑이 없기에 저지른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사랑의 결핍은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악마적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나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집니다. 교회 안에서나 신자들 사이에서 법과 절차와 때를 따르는 일은 중요하지만 사랑의 결핍으로 해서 바리새인들의 집단이 되고 마는 위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은 하지 않으며 오직 염탐과 비난과 정죄와 모의만 무성한 회당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관심 없고 결국 주님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하는 범죄집단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소개해드린 바 있는 "사랑이 없으면"이란 글 한 토막을 다시 한번 반복해 봅니다:
사랑이 없는 의무감은 무뚝뚝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책임감은 냉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성은 교활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령은 비열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힘은 난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예는 오만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부는 탐욕스럽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미련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또 우리 자신을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7-8) 했습니다. 열심히 사랑하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함으로써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서로의 좋은 점만을 찾으며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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