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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과 반대 앞에서 (느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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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반대 앞에서
느헤미야 4:1-6

뉴욕이 번창하자 맨하튼 섬과 부르클린을 왕래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습니다. 다리가 없던 때라 사람들은 배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워낙 물살이 세서 다리를 세울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존 뢰블링이라는 기술자가 교각 없는 다리를 설계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전문가들이 존을 보고 공상가라고 놀리고 비웃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존 뢰블링은 아들 워싱턴 뢰블링과 함께 교각 없는 다리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난공사였습니다.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존 뢰블링은 공사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아들 워싱턴 뢰블링은 뇌를 다쳐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면서 중환자실에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뢰블링 부자의 꿈뿐만 아니라, 교각 없는 다리도 좌절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겨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었던 워싱턴 뢰블링은 침대에 누워서 자기 아내의 팔을 두드리며 대화를 시도했고 침상에서 다리 공사를 진행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워싱턴 뢰블링의 열심에 감동 받은 공사장의 사람들도 침식을 잊어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기를 13년, 마침내 브루클린 다리는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83년의 일입니다.

교각 없는 다리를 한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의 조롱도 거센 물살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한 죽음과 장애도 맨하튼 섬과 브루클린 사이에 교각 없는 다리를 세우겠다던 뢰블링 부자의 꿈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 다리는 교각 없는 최초의 다리라는 것 보다 수많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세워진 다리로 더욱 유명합니다. 인생의 거친 돌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운명에 맞서 극복하며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했던 사람들이 오늘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 길에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장애물은 지치게 만들고 때로는 그 앞에 주저앉게 합니다. 우리 중에도 지금 삶의 어떤 희망을 가지고 가다가 장애물 앞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했는데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거야.’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진행하다가 상황이 더 악화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방황하지 않고 잘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더 큰 방황의 여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인생의 거침돌 앞에 중단하고 멈추어 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기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계속해서 함께 나누고 있는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어려운 과정 속에서 만나는 계속되는 거침돌에도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침돌을 디딤돌로 만들면서 하나님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만났던 장애물, 거침돌은 무엇이었을까요? 거침돌을 어떻게 디딤돌로 삼을 수 있었을까요? 느헤미야의 지혜가 필요한 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느헤미야의 거침돌은 첫째 아이러니하게도 느헤미야 자신이었습니다. 환경보다 환경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자신 때문에 어떤 일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비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변덕스러운 반대자였던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왕의 배려로 말미암아 통과할 수 있는 조서와 왕의 재목을 쓸 수 있는 권한 그리고 군대와 마병까지 받아 예루살렘 성에 도착합니다. 느헤미야는 도착하자 마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3일간 기도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밤에 홀로 몇몇 사람과 성문이 얼마나 훼파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탐색하고 난 다음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고 동기 부여가 되면서 성을 건축하자고 일어나는 순간에 결정적인 방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껏 예루살렘 성을 쌓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사람들이었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는 확신을 분명히 하고 일을 진행할 때조차 장애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도우셨다고 생각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장애물을 만났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뜻이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이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일이란 말인가? 이렇게 힘든 걸 보니 아닐지도 모른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나타났을 때 느헤미야도 이렇게 생각하고 중단했다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역사가 새롭게 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라 할 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누어 주어라.” 말씀하셨고, 말씀하는 대로 순종했더니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이 흥분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주님 말씀 믿고 순종하면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는구나.’ 하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가는 길에 태풍을 만난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게 불었는지 생명을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단순히 태풍을 만난 것 보다 도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믿고 따랐는데도 불구하고 만났다는 사실이 더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불다가도 중단되어야 할 태풍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셔서 직분을 맡았지만 할수록 어려움이 계속 다가옵니다. ‘이건 아닌 모양이야, 내가 맡지 말아야 될 것을 맡았나 봐.’ 마음먹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교회 출석하지 못할 일이 계속 생깁니다. ‘역시 나는 교회와 상관 없는 모양이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실까요? 마가복음 6장 5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태풍이 부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여전히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는 그 길에 장애물이 나타나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좌절하고 돌아설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내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주님은 찾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면 스스로의 노력 때문인 줄 알고 교만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을 아시고 미리 배려하신 섭리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게는 이보다 조금 더 진전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했습니다. 무려 4개월 동안이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저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누가 바꿀까……. 하나님 왕의 마음을 바꿔주십시오. 응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을 뿐만 아니라 왕의 조서를 주어 가는 길이 순탄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는 거침돌이 하나님 살아계심과 능력을 백성들에게 증거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거침돌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지나고 보니 오히려 디딤돌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디딤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던 어려운 일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왔다 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 그리고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좌절하고 있습니까? 마치 늪처럼 빠져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디딤돌을 찾으십시오. 그것은 늪 속에서도 반석처럼 든든하게 서게 할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던 느헤미야에게 이스라엘 백성 마음 속에 있는 실패의식은 거침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 십 년 전에 성을 건축하려고 해봤는데 안되더라는 패배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것을 통해 물리적인 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나누어지고 분열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보다도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전통 있는 교회가면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전에는 안 그랬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자기 경험 속에서 안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 마음을 움직여 동기 부여하기는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실패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실패한 일과 실패할 일을 주야로 묵상하며 피하려다 보니 무기력해집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가장 나쁜 위험은 의심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무기력해져 있는 위험입니다. 이런 위험은 신념을 포기하고 희망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됩니다. 또한 그것은 냉소와 불신을 퍼뜨리고 모든 인류를 위하여 선한 일을 하는 위대한 기회에 대해서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실패한 사람들은 일을 자꾸 미룹니다. 신중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신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빅터 키암은 일을 미루는 것은 기회를 죽이는 타고난 암살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꾸 뒤로 늦춥니다. 그래서 시간과 생산성과 잠재력을 도둑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사람에게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실패도 실수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일만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변화를 싫어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왜 시도해야 하는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 연민과 변명에 빠집니다. 때로는 우울해 지기도 합니다. 변명은 새롭게 삶을 헤쳐나갈 가능성을 포장해 버리기 때문에 실패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생각이 많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생각이 하나로 일관하지 않고 분산되어 엉뚱한 일에 에너지를 씁니다. 이렇듯 실패한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실패한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어떻게 세웁니까?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18절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며 함께하심을 알렸습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당한 고난과 어려움 보다 힘든 것은 혼자라는 생각, 외로움, 고독입니다. 고독을 느끼면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마치 척추 동물의 척추가 없어진 것 마냥 바닥에 주저앉는 낙담을 경험합니다.

이런 낙담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힘은 무엇일까요? ‘네 삶은 의미가 있어.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았어. 하나님은 너와 함께 하셔.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너와 동행하셔.’ 라는 말에서 의미를 발견할 때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과부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백 년 동안 예언자 없이 암흑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서 드디어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꿈에 나타나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처럼 생각하는 말이 바로 ‘이가보시’,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신다.’하는 임마누엘의 기쁜 소식, 온 백성에게 미칠 크고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놀라운 메시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의미 없는 하루 같다 할지라도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혼자 사는 것처럼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는 것, 예배 시간을 통해 하나님 임재를 체험하는 것, 말씀이 살아서 가슴을 때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로 여기에 소생하는 역사가 넘쳐납니다.

전 설교 때마다 성도들의 얼굴을 주의 깊게 봅니다. 처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분들이 메시지가 선포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고개를 들고 끝날 때쯤에는 찬송을 부르는 얼굴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것을 봅니다. 멀어서 잘 안 보이는 것 같죠? 다 보입니다. 눈 감고 있는 것도 보이고 졸고 있는 것도 보이고 다 보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가,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백성들에게 이것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당신의 삶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또 20절 말씀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에서 알 수 있듯이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침략당하고 짓밟혀 포로되 사람들, 제대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감당할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성전을 건축하는 것도 아닌 성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그럴 때 성 건축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용기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교를 하고 있는 저도 근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 설교하고 있다면 설교하는 행위는 세속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방에서 밥을 하든지, 빨래를 하든지, 직장에서 복사를 하든지 중심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여러분 계신 현장이 성직입니다. 분명하게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 역사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분 가정에 파송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와 할머니•할아버지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여러분 직장으로 파송하셨습니다. 목사가 갈 수 없는 그곳에 여러분은 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요, 그 현장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선교사의 영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된다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보냄 받은 자의 의식이 없으면 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할지라도 보냄 받은 자로서 훈련되어 있지 않고, 신분 의식도 없으면 삶의 현장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직분이나 신앙의 연륜과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하고 훈련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선교사의 영성을 갖추고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등 삶의 현장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 가는 주님의 선교사들 되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입니다.

17절 말씀 한번 볼까요?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처해있는 상황과 현실이 어떠함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자기 형편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실패에 젖어 익숙해지면 자기 생활의 전부인줄 압니다. 서커스단의 코끼리를 쇠사슬에 묶어 놓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주 가는 줄로 묶어 놓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묶어 두면 정해진 선 밖으로 못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코끼리는 커서도 가는 끈으로 충분히 통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면 진짜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삶 어디가 무너졌는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기도의 부분 혹은 신앙의 부분,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의 부분 등 어디가 무너졌는지를 말씀은 깨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 먼저 있습니다. ‘나는 소용없는 인간이구나.’

설교를 하고 나면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목사님! 제 이야기 그만하십시오. 제 집사람이 저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습니까?’ ‘너무너무 비참합니다. 이제 그만 하십시오.’ 이렇게 느끼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의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의로울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모습을 가르쳐줍니다.

노틀담 박물관에는 천재화가였던 램브란트의 그림 두 점이 걸려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램브란트가 무명 시절 그린 그림으로 천재성이나 소질을 전혀 볼 수 없는 조잡하고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옆에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그림을 나란히 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두 그림을 보면서 램브란트가 위대한 화가가 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노력하고 인내했는지를 느낀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들어 어떤 삶의 모습으로 살아야 될지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실패하고 낙담하여 하나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기 보다는 수치와 부끄러움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통해 하나님 자녀다운 삶이라는 목표에 도전을 받으며 점검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점검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 앞에 나 자신을 바꾸고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교만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가 성을 쌓을 때 거침돌은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정체는 10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황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 성을 다시 수축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방해하고 싫어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우리 삶이 하나님 뜻을 따라 무너진 성을 건축하고 기도의 성, 사랑의 성, 비전의 성을 다시 쌓는 것을 구체적으로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단의 무리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모르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반쪽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육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교훈과 신념과 교양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영적인 세계가 정말 있습니다. 이 땅에 나타나는 현상만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겨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인생에 절망과 좌절할 문제가 찾아옵니까? 그렇다면 영적 전쟁을 선포하셔야 합니다. 영적 전쟁의 무기는 기도,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를 만나면 가장 먼저 빼앗기는 것이 다름 아닌 기도하고 말씀 보는 자리입니다. 내 감정의 자리가 기도의 자리를 대신하고, 내 욕심의 자리가 기도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내 경험의 자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겸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보다 육신의 정욕을 도모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는 사람은 목사라 할지라도 어둠의 영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포함한다면 더군다나 여러분은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영적 전쟁이구나. 사단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묶어두는구나.’ 기도의 자리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말씀의 훈련을 다시 받으셔야 합니다. 말씀을 가슴 판에 새기셔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나아가는 지혜로운 주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어떤 선포를 했습니까? ‘너희들은 성 쌓는 것을 방해하지만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선포입니다. 어둠의 영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의 권세를 빼앗을 명분, 권리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냥 내어 줍니다. 그럴 때 여러분, 약속을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어둠의 영들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평안을 네게 빼앗길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을 선포하노라.’ 그리고 하나님 주신 평강을 주장하십시오.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소망 가운데 하나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영적 권세를 주장하셔야 합니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축복하고 가정을 축복하는 하나님 주신 영적 권세가 있으므로 권세를 사용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주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는 세상의 흑암이나 절망이나 정복자이거나 어떤 악한 영들도 끊어낼 수 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주장을 할 때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며 나아가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를 늦추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약속을 주장하였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만만치 않습니다. IMF 관리체제아래 있을 때보다 더 경제적 어려움이 많을 줄 압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끼니를 거르는 분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애인 세 가족이 사는 집에 전기가 끊어져 촛불을 켜고 살다가 불에 타서 죽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있을지 모릅니다. 마음은 이미 무너져 더 이상 살 용기를 갖지 못하고 좌절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느헤미야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믿음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어려움은 찾아온다는 사실, 그러나 어려움이었던 거침돌이 이제는 현실을 딛고 일어서게 만드는 디딤돌이 된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나를 버리지 않고 동행하신다던 하나님 약속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영적인 전쟁에 대해 아시고 기도하고 말씀 보는 자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거침돌 앞에 주저앉지 않고 거침돌을 디딤돌로 만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 삶 위에 넘치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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