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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개의 십자가 (막 15: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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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개의 십자가(막15:20-32)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람은 별로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발생한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반적인 상식과 평범한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종교가 있는 반면에 전혀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일반적인 상식과 인간적인 평범한 제한적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종교입니다. 특별히 십자가는 세상적인 생각과 철학과 이론과 지식으로는 그 깊은 진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십자가를 더 깊이 이해하고 도 깊이 묵상하고 그 십자가가 더 크게 확대되어 내게로 다가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귀한 상징은 아무래도 십자가입니다. 로마 사회의 교양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금기로 삼는 몇 가지 주제가 있었고 1세기 로마 최고의 풍자 시인인 [쥬버날]의 글을 보면 당시 상류사회에서 "십자가"라는 말을 꺼내는 것을 금기로 삼았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고 역겹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귀족사회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에게도 사람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는 십자가형은 피가 거꾸로 치솟게 하는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21:23절에"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만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무시무시한 사형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저주받아 죽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사형방법은 국가를 반역한 사람이나,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적용하여 그를 제거할 때 본보기로 경종을 울리게 하기 위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에게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진리로 나아가는데 거치는 것이요, 수치의 대상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은 정치적인 왕으로 적과 싸워서 자기를 구원하실 것으로 보았는데 허무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였습니까? 어리석은 지혜로 보았습니다.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리란 말도 안 되는 미련한 진리로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것이었기에 구원과 영광의 소망을 가져다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란 기독교 신앙의 역설적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십자가,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십자가, 진리로 인도하는데 거리끼고 거치는 십자가,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 구속하는 화목제단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건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총독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갈대를 가져다가 오른 손에 쥐어 주고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여 합당한 예의를 갖춘다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말하며 갈대를 빼앗아 주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고 채찍으로 수없이 때렸습니다. 기진맥진할 즈음에 다시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골고다로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십자가는 우리 구주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요 좌우에 강도 두 사람도 함께 처형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죄인이었다고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형이 다양하듯이 믿음의 종류도 다양한 것을 봅니다. 물론 세 개의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 서 있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수 십 종류의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세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주님이 진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올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다른 공관복음에 비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골 곳이란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세워졌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운데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똑 같은 십자가인데, 그 세 십자가가 각각 우리에게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비웃는 행악자

예수의 양편에 두 행악자가 같이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죄 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 행악자는 고통 속에 울분을 터뜨리며 예수에게 소리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행악자가 바라는 구원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이 십자가 고통이 없는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용히 자신이 십자가 고난을 당할 것을 알려주셨는데 그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마16:21-24). 사단은 예수님께서 성역을 시작할 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는데 이제 성역을 완수할 시점에 다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하였던 것입니다.

이 왼편 강도의 십자가는 죄의 마지막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십자가였습니다. 모든 죄는 이렇게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죄의 종류가 어떠하든 결국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가 이 왼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회개할 기회마저도 놓치고 죽으면서까지 예수를 조롱하고 불신했던 멸망의 표상(表象)으로서의 죄인의 십자가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은 후에 영원한 지옥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의 완악함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막가는 인생종착을 보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뉘우친 행악자

다른 행악자는 동료를 꾸짖고 나서 예수님을 증거한 후 예수께 자신을 의탁하였습니다.

(1)죄를 인정함: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2)예수의 의를 증거함: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조롱하는 무리들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지키시는 예수를 보며 그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며 그는 예수의 의를 확신하고 동료에게 증거한 것이다.

(3)의탁함: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했고 그래서 그의 나라에 자신도 들어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를 향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피 공로로 낙원에 들어간 첫 번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른편 강도는 같은 죄를 범했으나, 회개한 자의 십자가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란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십자가란 말입니다. 즉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예수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피의 공로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얻고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구원을 바라지 말고 이 행악자처럼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구원은 무엇인가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사람들이 알기로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가 이 땅에 머물 동안 그 누구에게 그 어떤 해악을 끼친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큰 권능으로 많은 병인들을 치유하셨고 사랑으로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싸매어 주셨고, 지혜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지금 가운데 십자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 죽은 속죄(贖罪)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 십자가는 이제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의(義)를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존경과 영광과 찬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희생, 봉사,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든 십자가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병원과, 희생 봉사 활동을 하는 적십자사의 활동이 모두 십자가를 달고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감격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고 운명하였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겠습니까? 죄의 세력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의한 총검의 세력을 사랑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우리는 ① 그의 사랑의 완성을 보게 되었고, ② 순종의 제물로서의 사명 완수를 보게 되었고, ③ 죄인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죄의 값인 사망의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고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대했던 3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매우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십자가 

십자가의 방관자들입니다. 십자가의 방관자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총독 빌라도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회피합니다. 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겁한 형의 전형입니다. 

세상엔 십자가를 몰라서 회피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모두 귀찮고, 거추장스럽고, 속박하는 것 같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형장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치고 다닙니다. 

여기에는 대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집중되는 백성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에게로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당시에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구주가 되시는 것을 너무나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을 파기하는 자라고 몰아붙이며 십자가를 지게 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장로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온 백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백성의 원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라고 욕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남을 정죄하고, 자기는 의롭다고 여기면서 자기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전가하고, 영광 받는 자리에 서기를 원합니다. 

어느 유럽의 한 성당에 유명한 성화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성화 앞에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당에 들어가서 성화를 보았는데 도무지 명화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당을 지키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이 성화가 그렇게도 유명하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성당지기가 말했습니다. "그 성화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서서 보았지요", "아닙니다. 무릎을 꿇고 보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다시 가서 무릎을 꿇고 보았답니다. 그 성화를 보던 사람은 과연 그 십자가의 성화에 큰 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수혜자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하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면 소위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 왔으나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생각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제의 사랑이라는 특혜를 입고 자신의 유익은 추구하면서도 나누어 주는 데는 인색하기만 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형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주님의 십자가를 팔아서 자기 이권의 배를 채우는 아주 흉악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며 그 업적은 대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7:22절에 보면 주님 앞에서 그의 찬란한 업적을 자랑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이 땅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금식을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핍박과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는 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떠나 자기 자신을 숨기시거나 저들에게서 위로를 거두어 가시면 그들은 곧장 불평을 말하거나 낙담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평안만을 위해서라면 잘못 오셨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쉽게 믿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30년 동안 연극단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은 [안톤 레이지]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형적인 미국 여행가들 중에서 모든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어느 부인이, 연극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명한 매우 [안톤 레이지]를 만났습니다. 이 여행자 남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도 한번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내가 카메라로 담아보기를 원했습니다. 극단의 허락을 받아 쉬는 점심시간에 그 부부가 무대로 가서 남편은 십자가를 지고 아내는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십자가를 들어 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남자가 십자가를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유명한 배우 [레인지]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 여행가는 배우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은 연극장이요 당신은 배우입니다. 연극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신앙이란 그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를 메고 따르는데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으며, 땀과 눈물과 수고와 고통을 그 일에 쏟지 않는다면 나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그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도 기억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희생이며 값입니다. 그런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며, 신앙을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는 정도인 것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람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극도로 피곤하고 쇠약해졌습니다. 가시다가 쓰러지고 일어섰다가는 또 쓰러지십니다. 그때 군병들은 시골로서 다녀가는 생면부지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뒤에서 메고 따라오게 하였습니다. 시몬은 부지중에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힘에 대하여는 구레네 시몬이 주님보다는 더 세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십자가를 힘으로 진다면 누군들 짊어지지 못하겠습니까. 자원하는 것이 아닌 억지와, 인색하고 강권에 못이기는 사랑은 그만큼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강권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못됩니다. 강요에 못이기는 사랑이나 헌신,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모양을 갖추는 헌신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으로 져야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억지 사랑이라도 사랑은 실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레네 시몬의 경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의 생애는 위대하게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시몬의 기록에 대하여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왔기에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그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이름이 거명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아내나 아들은 초대교회 시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시몬의 아내는 위대한 바울사도에게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시몬의 아들 루포는 그 이름만 불러도 모두 알아들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주님은 명령 일변도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서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원해야 합니다. 사랑은 온유입니다. 사랑은 인내요, 사랑은 아량입니다.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그 상처 난 손길로 오늘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의 마음 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노크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먼저 내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추아니랜드에 사는 한 원주민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듣고서는 깊은 감명을 받고 이렇게 소리쳤답니다. "예수여, 그 곳에서 비키시오. 그 곳은 내가 서야할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정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야할 자리인 것입니다.

계속 십자가를 타고 가려고 하십니까? 

여러분! 십자가를 지고 가기보다 십자가를 타고 가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 자신이 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야지 타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를 진다고 할 때 이는 남이 저지른 잘못으로 생긴 괴로움을 내가 그 사람 대신에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장본인을 살리려 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와는 반대로 십자가를 타고 간다는 것은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생긴 괴로움을 다른 사람들이 나 대신 겪고 있는데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편히 살아간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타고 갔던 사람들입니다. 아니 지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타고 갈 때가 적지 않습니다. 사순절 기간만큼은 그렇게 타고 가던 십자가에서 내려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함께 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85주년 3·1절을 하루 앞둔 날입니다. 조국의 어려운 상황에서 자주독립을 외치며 민족을 위해 기도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신앙을 되새겨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초기 성도들이 가졌던 역사에 대한 대담한 자유정신, 민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 불굴의 저항의식과 순백의 희생정신 등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만약에 기독교 문화가 기독교의 꽃이라고 한다면 21세기 기독교 문화는 바로 이러한 3·1운동의 자태와 용모와 빛깔을 닮은 꽃을 피우기 위해 전심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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