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2-33)

  • 잡초 잡초
  • 539
  • 0

첨부 1



설교제목 내니 두려워 말라
성경본문 마태복음 14:22-33


설교내용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 합니다. 그러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시간을 보면 밤 사경이라 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12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캄캄한 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어부출신입니다. 바다에 익숙합니다. 노를 젓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풍랑 앞에 제자들은 그 어부의 기술도, 어부의 경력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풍랑과 인간은 상대가 안됩니다. 비교가 안됩니다. 지진, 홍수, 태풍 이런 재난 앞에 인간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우리가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각종 사고소식 또 죽음의 사실 앞에 인간은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는 것이 당연한데도 죽음의 공포 앞에 우리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거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제자들이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풍랑을 만나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조용합니다. 생명을 포기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려고 하는 자, 살아 있다는 의식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신세대 유모어에 보면 ‘호랑이에게 물려 가면 정신을 잃어야 안 무섭다’라는 게 있습니다. 정신이 깨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이큐가 90이하인 사람들에게는 자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똑똑한 사람들, 아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연휴로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우리가 예수를 안 믿었다면 오늘 서울에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흥청망청 모두 휴가를 즐깁니다. 그러나 경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국제경제포럼이 열렸는데 세계의 대가들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국은 10년 후에 먹고 살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10년을 기점으로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에 중대한 위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10년 후에 먹고 살 기술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를 진단하고 갔습니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만 경제를 아는 사람은 걱정이 태산이라는 것입니다. 국가경제를 아는 사람, 국가경제의 책임을 진 사람들은 밤잠이 안 온다고 합니다. 아니까 그런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려고 하기 때문에 죽음은 두렵습니다. 풍랑은 두렵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영적인 건망증을 가지고 두려워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바로 어제 저녁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인 기적을 행하신 기사가 나옵니다. 그 기적의 현장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예수님의 은혜의 현장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의 그런 능력을 체험하고도, 은혜를 경험하고도 그들은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 풍랑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절망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잊으면 안됩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자는 불안합니다. 두려워 합니다. 우리가 잊을 것은 실망을 잊어버리고 실패를 잊어버리고 상처를 잊어버려야지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잊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제자들이 경험했던 오병이어의 능력은 잊으면 안됩니다. 그 주님을 의지한다면 풍랑 중에서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데 그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라

  고 박정덕 목사님은 우리 교단의 훌륭한 목회자요 부흥사입니다. 그분의 간증을 보면 그분은 한국동란 때 참전을 했는데 이런 표현을 합니다. “나는 한 20번 이상 죽다가 살아났다.” 전장에서 바로 자기 앞에 있던 전우가 포탄에 맞아서 머리가 깨어지고 몸이 찢어지면서 피를 흘리며 죽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아, 나도 죽는구나’ 그 공포가 오더랍니다. 앞에 있는 전우가 죽으니까 이젠 자기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데도 뒤에 있는 전우가 포탄에 맞아죽고 옆에 있는 전우가 포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자기도 죽은 줄 알고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까 살아있더랍니다. 그런 고비를 수없이 겪었다고 합니다. 그때 “내가 너를 보호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신다면 이 몸을 바쳐서 주님 앞에 충성하겠습니다’ 그 믿음을 다짐했답니다. 그가 목회 중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 전장에서 하나님이 내 생명을 보호하시는 그 장면을 기억하면 어떤 고난도 겁이 나지 않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잊으면 안됩니다.

  출애굽기 20장 2-3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 이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은 낭패입니다. 그 배에 예수님이 타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가는 또 다른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항해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셨습니다.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풍랑을 잔잔하게 하셔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예수님이 배에 타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더 낭패입니다. 깨울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다위로 걸어오셨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셨는데 제자들이 물위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밤 사경이라 깜깜해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사람의 형체가 걸어오니까 유령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이건 기절직전에 소리 지르는 그 발악을 말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는데 유령이 나타나니까 ‘이제는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가 보다, 아 이젠 올 것이 왔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 이것은 기절하기 직전에 지르는 소리입니다. 기절 한 사람은 소리를 안 지릅니다. 그러나 기절하기 전에는 소리를 지르고 기절합니다. 예수를 유령으로 알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은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

  그때 주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보면 실감이 있습니다. ‘Take courage!’ 안심하라는 말을 한자말로 보면 마음을 놓으라는 뜻이지만 영어표현은 용기를 내라, 용기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용기를 잃어버리면 두려워합니다. "안심하라 이 말은 용기를 내라는 말입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It is I. Don't be afraid) 용기를 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 대목은 갑자기 일어난 우연의 행동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6장 48절에 보면 똑같은 대목을 마가는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밤에 산에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이 괴로이 노 젓고 있는 제자들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매는 그 고통의 광경을 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이 보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현장을 다른 사람은 다 잊어버려도 주님은 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감당을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은 찾아와 주십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의 주님, 이것이 사랑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끈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잊어버리지만 주님은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등지고 마음대로 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그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찾아와 주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아가페의 손길을 믿어야 합니다. 위기는 다른 게 아니라 그 배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위기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항해를 해야 되는데 주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아주 성급한 사나이입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오라고 명하소서” 엉뚱한 요구입니다. 호기심입니다. 그 난리판에 물위로 걸어오도록 요구했습니다. 주님께서 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 가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면서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은 배에 오르시고 바다와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중요한 관점을 하나 발견해야 됩니다.

  성경 비평학자들은 이 대목을 가리켜서 이것은 믿을 수가 없다, 사람이 어떻게 물위로 걷느냐, 예수님은 육을 가진 사람인데 어떻게 물위로 걷느냐 라고 합니다. 사실 사람은 물위로 못 걷습니다. 역사이래로 물위로 걸어가는 이런 이적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잠시 물위로 걸은 그것은 예수께서 그 순간에 붙잡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곧 바람을 보고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술을 허락지 않습니다. 사람이 물위로 걷는 것은 마술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마술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물위로 걸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위로 못 걷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데 왜 물위로 못 걷는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베드로를 주목하면 안됩니다. 베드로도 물위로 걷었으니까 나도 구하면 물위로 걸을 수 있겠다 해서 엉뚱하게 은사를 구하지 마십시오. 물위로 걸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위로 걸으십니다. 사람은 물위로 걷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풍랑의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각

  에디슨의 신조는 매우 성경적입니다. 에디슨만큼 좌절과 실망을 많이 겪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조는 ‘어려울 때 요나를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나는 풍랑이 일 때 바다에 던져진 사람입니다. 보통 풍랑이 아니라 큰 배가 요동치는 파선직전에 있는 풍랑에 던져진 요나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그것도 물고기가 그를 삼켜 버렸습니다. 바다에 던져진 사람은 살 수도 없고 물고기에 삼켜진 사람은 살 수도 없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요나는 죽었습니다. 확실히 죽었습니다. 아무도 요나처럼 던져져 삼키워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편에서 요나는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는 요나를 살렸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나사로는 장례식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그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풍랑에 던져진 요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살렸습니다. 물고기가 삼켰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렸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절망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끝났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살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고 얼마든지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풍랑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즘 우리를 위협하는 이념과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부르만이라는 저술가가 아주 흥미있는 조사를 했습니다. 현재 미국의 최고 지성그룹 중에 120명을 뽑아서 조사했는데 지난 2000년 동안 인류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발명이 무엇이냐? 인간을 편리하게 하고 기술을 개발시키고 오늘의 이 역사를 창조하는데 기여했던 발명이 무엇이냐는 것을 다섯 가지 안팎으로 적어내게 했는데 온갖 것이 다 나왔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런 것들이 발명되기 전에는 굉장히 불편했는데 발명되고 우리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면 보온병이 인간을 편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지우개도 글을 쓰고 지우는 게 없을 때는 굉장히 불편했는데 지우개가 나와서 편해졌다는 것입니다. 건초도 푸른 생초만 풀인 줄 알았는데 말린 풀도 오히려 더 영양가가 있는 풀로 보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상하수도, 피임약, DNA 등등 많은데 그 중에 가장 인류에게 공헌한 발명품 두 가지는 인쇄기계와 컴퓨터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세상을 뒤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조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천년을 기점으로 조사했는데 랭킹 1, 2위가 전화와 컴퓨터라는 것입니다. MIT연구소에서도 이런 조사를 했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재미있는 항목이 하나 있습니다. 싫지만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은 휴대폰이라는 것입니다. 휴대폰의 역기능을 말합니다. 범죄에 이용되는 역기능을 두고 싫지만 없앨 수도 없는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없이 편리합니다. 말로 못하는 편리함이 우리에게 지금 주어졌습니다. 그야말로 문화의 혜택, 기술의 혜택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메시지를 들어야 됩니다. 이렇게 편리하고 이렇게 기술이 발달하는 그 배후에 인간에게는 더 큰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해라는 것입니다. 지구촌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사고와 재앙 가운데 99%는 공해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이 앓고 있는 질병, 짐승들이 앓고 있는 질병, 이 자연재해까지도 모두 공해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하동지방을 집회하면서 하동에 있는 발전소를 견학했습니다. 본부장 되시는 분이 집사님인데 저의 집회에 한 시간도 안 빠지고 새벽기도회도 다 나오셨습니다. 아주 귀한 분이셨습니다. 그것도 정중히 초청을 해서 제가 VIP대접을 받았는데 하동화력은 근간에 건설한 최첨단 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산더미 같은 설비를 움직이는 자동화가 다 되어 있는데 그 자동화 중에 제일 자랑하는게 무공해 설비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석탄 이만톤을 소비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찌꺼기가 굉장히 많답니다. 그것을 전부 재처리하여 70억을 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재처리하면 공해물질이 또 나오는데 그것을 또 재처리해서 아주 유용하게 쓴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중으로 내뿜는 연기도 무공해 상태에서 뿜기 위해서 공해설비를 하는데 이 무공해라는 것, 공해처리율 제로라는 것은 없지만 거의 환경에 영향을 안 주는데 까지 그 물질을 전부 처리하는 그 설비가 굉장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못 한답니다. 바닷물이 뜨거워지는 것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답니다. 그 발전소에서 더운 물이 바다로 흘러나가는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물에 살던 고기는 다 먼 바다로 떠나고 더운 물에 사는 고기가 몰려온답니다. 더운 물에 사는 고기가 찬물에 사는 고기보다 양이 훨씬 많아서 고기가 훨씬 많이 잡힌다고 합니다. 화력발전소 근방에 낚시동호회에서 낚시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수십 군데서 청원해 올 만큼 고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락을 못해준답니다. 그러니까 환경생태계가 변하는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못하지만 그래도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설비를 갖춘 그런 설비기 때문에 엄청난 돈이 들고 상상을 불허하는 돈이 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해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서 하동군에 500억을 가지고 그 지역 설비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발전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사한 호화주택에 산다고 죽음의 공포가 면제되는 게 아닙니다. 질병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배출되는 공해가 우리를 향하여 화살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품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겁이 나서 음식을 잘못 먹습니다. 의사들은 오히려 병을 겁내는데 병을 모르는 우리는 용감합니다. 세상이 겉으로 편리해져가고 잘 되어간다고 해서 죽음의 공포가 면제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끊임없는 온갖 시련들, 언제 우리 앞에 닥칠지 모르는 공해의 폐해들, 그러나 우리가 겁낼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하실 때 “내니 두려워 말라”는 이 음성을 새기고 사는 자에게 풍랑을 이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