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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반자 유다의 항변 / 애 3:55 ~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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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반자 유다의 항변 


구약의 말씀: 예미야 애가 3: 55 ~ 59
  주님, 그 깊디 깊은 구덩이 밑바닥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때에, 주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주님, 주께서 내 원한을 풀어 주시고, 내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 주께서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을 보셨으니, 내게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7:19 ~ 2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가 복음서 14:17 ~ 21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가셨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그들은 근심에 싸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께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 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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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40일 동안의 수난절 행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본문은 유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난절을 유다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었고,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우리 다 알고 있습니다.

흔히들 가룟 유다의 배반이 없었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을까, 십자가는 가룟 유다 빼놓고는 불가능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건 상상의 질문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 안에 등장하는 배우 중에 이름이 가룟 유다라 하는 사람이 선택받은 것일 뿐, 가룟 유다가 없어도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 가룟 유다입니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식사를 하면서, 이것은 교회절기로 치면 수난주간 목요일 밤의 이야기입니다만, 식사를 하면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분위기는 침울합니다. 인간 최악의 상황,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와 함께 빵에 손을 대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성서 말씀대로 가지만, 나를 배반한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나 음성의 색깔에는 배신감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한테 엄청난 배신의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배신하고 배신당합니다. 이 배신의 역사가 혹시 우리의 정치사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역사를 수놓았던 사람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들의 역사가 배신의 역사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생물의 역사 자체가 배신의 역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특별히 권력을 갖고 재물을 갖고 싶어 하는 우리 인간에게는 배신이란 늘 있는, 항상 있을 수 있는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배신을 겪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걸.” 그런데 저는 예수의 이 말씀이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게 좋았을 걸. 나도 그대도 창피한 일이다.” 저는 이 성서 본문을 묵상하면서 오싹한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오셔서 “차라리 네가 목사가 안 되는 게 좋았을걸.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서 무슨 목사야?”라고 말씀하시면 어쩌나 싶기도 했습니다.

성서에 쓰인 이야기나 말씀을 남의 것으로 듣지 말고 오늘 내 것으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보십시오. 가룟 유다는 왜 사랑하는 스승, 그렇게 따랐던 예수, 믿었던 메시아, 자기의 구세주, 유대민족의 구세주, 세계 만민의 구세주인 그분을 왜 배반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배반의 이유를 따져봅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이런 생각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유일한 지성인이었고, 셈도 밝아서 예수 집단의 회계 일을 맡았습니다. 계획도 잘하고 돈 셈도 빠르고 머리 회전도 빨라서 조직력이 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가룟 유다는 충실했던 유대인, 애국시민으로서,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식을 깊이 가진 사람 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가 정치적인 독립을 가져다줄 지도자, 정치적 메시아일 수 있겠다 생각하고 나사렛 예수를 따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 ‘나는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십자가는 패배입니다. 십자가는 중죄인을 죽이는 형틀입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손발에 못을 박습니다. 금방 죽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최소 여섯 시간 이상이나 걸리는 처참한 처형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중죄를 지으면 이렇게 죽는다! 예수께서는 다른 죄수들과 달리 가시관도 쓰고 창에 옆구리도 찔렸습니다. 고통이 가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여섯 시간 만에, 그러니까 아침 아홉 시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오후 세 시에 운명하셨다고 성서에 쓰여 있습니다. 만인 앞에서 천천히 아픔을 씹으면서 죽어가는 사람.

십자가에서 죽겠다는 것은 유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민족을 구원하고 해방할 줄 알았던 스승이, 메시아라고 믿었던 스승이 그렇게 죽는다고 하니 기가 막힌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스승 예수는 유다한테는 배반자입니다. 가룟 유다 입장에서 보면, 사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게 아니라, 예수가 가룟 유다를 배반한 겁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따랐건만 당신이 십자가로 가시다니요. 난 어떻게 하라고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군중들을 먹이고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가신다니요! 당신은 이스라엘 민족의 배반자요, 배반자는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이런 가짜 메시아는 죽이자며, 예수를 팔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도 항상 가룟 유다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 머리로, 자기를 위해서,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예수를 보고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의 배신자가 됩니다. 가룟 유다는 이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만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오늘 가룟 유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이름을 위해 내 방식대로 믿고, 내 뜻에 안 맞으면 버리고 재단하고 자르고 그래서 자기 편의에 따라 믿는 그런 사람은 유다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 건너뛰어서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오늘 가룟 유다의 행적을 통해서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은 이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예수를 단정하고 재단하여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신앙은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최근에 언론을 보니까,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부활절에 상영할 모양인데, 멜 깁슨이란 사람이 제작 겸 감독을 맡았다고 합니다. 이 영화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는데, 제가 뉴스를 보니까 유대인을 대표하는 사람이 나와서, 이 영화에서 예수를 처형하는 방식이 너무 폭력적이고, 너무 선정적이어서, 마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조장하려는 것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말하자면 반유대 정서를 조장하는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일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은 당해도 싸다, 우리 구세주 예수를 죽이지 않았던가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로마카톨릭의 교황은 그 영화를 반유대주의로 보기는 어렵고 반로마주의로 보아야 할 것 같다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종교와 상관없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지난 2월 25일 뉴욕과 캐나다에서 사순절이 시작되는 수요일에 이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는데, 할리우드라는 세계가 아직도 유대인의 세력이 강한 곳이라, “멜 깁슨 큰일 났다. 유대인과 갈등이 벌어지겠군.” 그런 이야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테마 하나를 내걸고 영화를 찍었는데, 그 일로 전 세계가 뒤숭숭합니다.

다시 이천년 전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시죠. 로마제국의 식민지 압제가 극악에 달했던 시절,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 독립운동, 이런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단당한 것을 잘 아는 유대 백성들, 대제사장들, 가룟 유다, 제자들은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자기들을 해방시킬 메시아가 출현하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 예수를 보고 이분이 메시아구나 하고 믿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서는 가룟 유다라는 사람을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배신자 유다는 목을 매어 죽었는데, 목을 맨 밧줄이 끊어져서 언덕 밑에 있는 바위에 부딪히면서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성서에는 마태복음 기록밖에 없지만, 이 가룟 유다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모은 책들이 있습니다. 파피아스라고 하는 사람이 쓴 ‘주님의 말씀’ 제3장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죄 때문에 몸과 머리가 부었는데 몸이 얼마나 부었냐 하면, 마차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큰 문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부었고, 퉁퉁 부은 몸에서는 고름이 나왔는데 고름이 얼마나 많이 나오고 구더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이 사람이 지나간 곳에서는 냄새가 나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코를 막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게 말하자면 유다의 죽음, 죽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우리가 중요한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를 기대를 저버린 배신자라고 생각해서 제사장들에게 팔아먹었던 가룟 유다의 판단, 그것은 저주를 받은 판단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판단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대제사장들에게 팔았는데, 예수를 산 사람들은 예수의 몸값으로 은 삼십을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에서의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이 밭을 가는 황소를 몰다가 잘못하여 황소가 뿔로 종 하나를 들이받아 죽게 하였을 경우, 종의 목숨을 보상하는 값이 얼마냐 하면, 바로 은 삼십입니다.

고난 받는 종 예수의 몸값도 종 한 사람의 몸값과 똑 같았습니다. 대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몸값은 종 한 사람의 몸값과 같았습니다. 예수가 얼마나 무시당하고 멸시당했는지는 이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 제사장의 멸시, 인격 모독이 엄청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한 인간 나사렛 예수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 삼십, 종의 몸값 하나! 그리고 그것을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울음, 막달라 마리아의 울음은 그래서 더 서럽게 들립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까지도 오죽하면, 그를 모른다고 할 정도의 그런 예수!

기대치에 못 미치는 메시아, 당연히 팔려야 할 사람, 이게 말하자면 예수를 판 가룟 유다, 그를 산 대제사장의 가치 판단입니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렇게 많이 모여서 그렇게 죽어간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울고 회개하고 새로운 생명을 기원합니다. 예수는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삼일절을 앞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일과 관련하여 우리 과거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85년 전 민족의 독립을 외쳤을 때, 거대한 일본 제국주의 앞에서 우리가 모여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들, 그 만세 소리가 동경에 들렸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는데, 그 소리는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는, 식민통치를 통해서 한반도를 “문명화하려는” 일본의 정책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역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소리가 얼마나 인정을 받았겠습니까? 예수를 은 삼십에 샀던 대제사장들의 가치판단을 생각나게 합니다. 일제가 우리의 삼일운동의 외침의 값을 얼마나 쳤겠습니까? 일본이 지금도 우리 정신대 할머니들 문제를 대하는 것을 보거나, 세계만방을 향해서, 침략하지 않았고 단지 진입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들이 보기에 우리 삼일운동의 값이 은 삼십에 불과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런 대접을 받은 민족의 후예입니다. 우리는 이 과거를 극복하고 새날을 기약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의 가격을 은 삼십으로 매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제사장, 유대인들의 계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산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된 가엾은 나사렛 예수는 유대교와 유대 민족주의를 넘어서 세계를 다 뒤집고, 모든 인간들을 뒤집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한 위대한 사람,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걸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85년 전에 흘렸던 우리 선조들의 피, 그 분노, 민족과 세계의 평화에 대한 희망을 담은 그 외침, 이것들이 일본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은 삼십의 사건이었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지금과 앞으로 오는 세대에서, 온 세계에 평화가 울려 퍼지게 하는, 온 세계에 번영을 이루는 그런 씨앗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만유의 주가 되셨듯이, 우리 민족의 삼일운동의 그 작은 씨앗이 자라서 이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게 될 수는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숙고하고 결단하고 싶은 일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인생의 길〉이란 수필 같은 소설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어느 현자 앞에 두 여인이 불려왔습니다. 두 여인은 다 죄인으로 불려왔습니다. 한 여인은 와서 하는 말이, 자기가 남편을 버리고 바람을 피워서 이렇게 되었는데, 정말로 잘못한 일이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합니다. 그 광경을 보던 다른 여인은 죄를 진 것 같기는 한데, 남편을 버린 일도 없고 큰 죄를 지은 일도 없어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잘 기억 못하겠다면서 히죽히죽 웃습니다.

현자가 두 여인에게 판결을 내리기를, 둘 다 죄를 지었으므로 언덕바지에 가서 자기가 지은 죄 만큼의 돌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을 버리고 바람을 피운 한 여자는 바위만한 큰 돌을 들고 왔고, 다른 여자는 생각이 잘 안 나는 자질구레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서 조약돌 여러 개를 주워왔습니다. 현자가 말했습니다. “자기 죄는 자기가 인식해야 한다. 이제 가져온 돌을 본래 있던 자리에다 갖다 놓아라.” 그러자 바윗돌을 지고 온 여인은 분명히 그 자리에다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조약돌 가져온 여인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몰라서 당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큰 죄만 문제고, 작은 죄, 작은 일들은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있었던 십자가라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사소했던 사건, 단돈 은 삼십밖에 안 되는 사건이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작은 사건이라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하늘이 임하자,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늘의 큰 힘이 임하자, 그 작은 사건은 유대백성도 구하고 온 세계도 구하고 우리까지도 구하는 무한대의 사건으로 확대 재생산되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아주 인간적인 지독히도 인간적인 고통의 음성, 분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없어도 십자가 사건은 있겠지만, 당신들은 왜 하필 가룟 유다의 역할을 하느냐? 그 길을 좀 돌이켜라.” 제발, 왜 하필 가룟 유다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 사건은 아주 작은 은 삼십으로 거래된 사건이지만, 세계를 뒤집고 인간을 구한 사건이 되었듯이, 우리의 작은 사건과 결단 하나 하나에 하늘이 임하면, 하나님이 동행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사건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능성입니다. 수난절 기간 내내 이것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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