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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딤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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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디모데후서 1장 3절


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서 내게 들은 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
키고

(서론)

  오늘날의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교회에는 바
른 윤리와 바른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즉 올바른 윤리성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하마르티아’는 ‘과오’라고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즉 비뚤어지는 죄
를 지을 수는 있어도 ‘아노미아’(불법) 법이 없는 것은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 ‘십계명’이 우리의 법과 기준이며 올바른 척도입니다. 그래서
늘 십계명을 우리 마음의 심비에 새기고 “내가 십계명에서 얼마나 비뚤어졌는가?”라
고 반성하는 가운데에, 날마다 회개하고 계속해서 바로잡고 또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와 같은 십계명에 대한 윤리 기준이 없는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교회는 신령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윤리적인 교회라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
으면 교회가 교회답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
게 되고 성령의 교통도 있고 기도 응답도 있고 성령의 치유하시는 역사도 있고 이렇
게 될 때에 우리가 전도도 힘을 얻고 선교도 강해지고 봉사도 기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신령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윤리적인 교회요 아무리 신령한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가 진리성을 떠
나서는 안됩니다. 이 진리성이 교회에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른 진리를 떠
난 교회는 아무리 윤리적이고, 또한 아무리 신령해도 이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13절에 간단하고 명료한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사도 바울이 2차로 로마에서 투옥이 되서 마지막 죽을 때가 다
되었을 때에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준 최고의 말씀입
니다. 우리말로 보면 대단히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깊습니다. “Hold fast the Form of sound Words”, 이것을 문자 그대로 번역을 하
면, “건전한 말씀의 형태를 굳게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즉, 건전한 말씀에는 형태
가 있다는 말이고 건전한 말씀의 형태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Ⅰ. 바른 말씀의 본 

  건전한 말씀의 형태는 우리말 성경에는 바른 말씀의 본이라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
에는 ‘The Form of sound Words’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건전한 말씀의
형태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어
떤 교리를 요약해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서 디모데에게 준 것일까요? 그렇다고 볼 수
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바울이 그런 신앙고백서를 남겨 놓았다고 한다면 그 고
백서는 문서 형태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귀중하게 여김
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서 형태로 된 고백서를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겨주지
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내게 들은 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라” 할 때에 이
바른 말씀의 본은 바로 계속해서 디모데를 가르쳐 온 것을 의미합니다. ‘너는 내가
가르친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을 것이다. 내가 네게 진리의 체계를 계속해서 가르치지
아니했느냐? 그 진리의 체계는 건전한 것이고 그것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진리의 체계를 확실히 믿고 사랑하고 그것을 굳게 붙들어라!’ 그
런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바른 말씀의 본’ 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가르친
진리의 체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본’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는 ‘Form’, ‘형태’ 라고도 번역이 되고 혹
은 ‘패턴’, ‘유형’ 이라고도 번역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계시를 주
시고 그 계시를 지금 디모데에게 가르친 것인데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계시는 아무
런 체계도 없고 아무런 형태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유형과 체계를 가지고 있다
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의 교리는 건전한 것인데 이 건전한 교리는 일정한 시
스템과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2000년 넘어선 교회의 역사를
보게 되면 수 없이 많은 형태의 교리적인 시스템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시스
템을 저 사람은 저런 시스템을 이야기 했는데 예를 들면 종말론이라는 교리 하나만 봐
도, 구원론이라는 교리 하나만 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교리적인 시스템이 건전한 것이냐 이것을 판단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되고 묵상해야 되고 생각해야 ‘아하! 이것이 옳은
것이구나!’ 성령께서 가르치셔야 ‘아하! 이것이 옳은 체계구나!’ 하는 것을 우리
가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리 체계가 건전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저는 최소
한 다섯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일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한 구절
만 인용해서 교리를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인자라 하지 아니하였느
냐?, Son of Man, 인간의 아들이니까 고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 한 구절
가지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
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서 1장 21절에 “우리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을 가
지고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행위로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행득의’를 주장한다고 한다면 그 것은 그 한 구절로 보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
되지만 성경 전체의 교리적인 시스템과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르거나 건
전한 교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단자들은 언제나 올 때에 성경 한 구절을 가지
고 옵니다. 그래서 성경 다른 구절과 조화가 되지 않는 해석을 해 가지고 그걸 가지
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불건전한 교리 체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리
가 건전한 말씀이냐 하는 것은 성경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은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
이 나옵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세상이라 함은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라’ 이렇게 해석을 해가지고 ‘고로 하나님은 온 세
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셨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언뜻 그 구절
만 보면 그 해석이 맞는 것 같지만 그러한 해석도 다른 구절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
이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은 옳은 해석이라 볼 수 없습니
다. 하나님이 어떻게 온 세상 사람을 똑 같이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받은 은혜
도 각각 다르고 여러분이 받은 사랑도 각각 다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
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다 똑같이 받는다고 그런 현실적이
지도 않고 진실도 아닌 것을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 구절을 가지
고 왜곡된 해석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가 건전해 지려면 성경의 전반
적인 가르침과 일치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건전한 교리는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낮추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
경 말씀은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낮춥니다. 인간의 부패성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것
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생각해봐도 알지만 우리가 우리를 높여서 되겠습니까?
우리 속에 사악한 죄성이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자신을 자
꾸 미화시키고 높이고, 반면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낮추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심히 교
만하고 부패한 교리 체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리든지 하나님을 높여
야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라야 그것이 건전
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건전한 교리 체계는 경건성을 향상 시키는 것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어
떤 교리를 배웠는데 사람이 더 죄 짓게 되고 죄 성이 더 강화되고 그리고 죄를 지으면
서 더 합리화하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거짓된것입니다. 제가 이단에 속한 사람을 보
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술을 마십니다. 그래서 “술을 왜 마십니까? 왜 그렇게
소주를 막 들이키십니까?” 고 물었더니, “우리는 천국 갈 구원의 표를 끊어 놓았기
때문에 소주를 마셔도 아무 상관이 없다” 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하! 그
대의 가르침은 잘못된 가르침이요 그대의 교리는 건전성이 없는 교리요 그대가 믿는
교리는 악을 조장하는 교리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제가 따끔하게 충고를 하였
습니다. 건전한 교리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 높이게 만들고
하나님께 더 감사하게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엎드리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교리의 체계입니다. 

  네 번째로 교리 체계가 건전성을 가지려면 올바른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구원의 도리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영혼에 관한 천국과 지옥을 결정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나 귀중합니다. 혹시 종말론이 조금 잘못되었더라도
구원론은 잘못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 전체의 핵
심의 교리는 ‘구원은 여호와께로 남이니라’(‘The Salvation is of the Lord’) 입
니다. 구원의 주도권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
어서 인간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예수 믿을 때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로 그 사람을 천국백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서 건지셔서 천국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 이것이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성경 한
두 구절을 왜곡 해석하여 인간이 자기의 자유 의지로 스스로 구원에 기여할 수 있다던
가 구원을 준비 할 수 있다던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던가하는 가르침은 지극
히 불건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옳은 체계가 아닙니다. 거짓된 구원의 교리
는 거짓된 전도 방법을 낳는 것이고 거짓된 전도 방법은 거짓된 확신을 주는 것입니
다.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거짓된 확신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까? 그것은 거짓된 구
원관을 그들이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건전한 교리 체계는 삼위일체를 명확히 제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서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신 최고로 중요한 교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
세돈 4차에 걸친 종교회의를 통해서 확신시킨 것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세분
이시며, 이 세분 하나님은 100% 신성을 가지셨고 동일 본질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입
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하나님은 세분이시며 또 한 분이시고, 또 한
분이시며 세분이시다’고 믿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
를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단에 속
한 사람들이 다가와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대화 좀 해봅시다!”, 그러면 “여보시
오! 2000년 동안 틀렸다고 수없이 많은 주의 종들이 이야기 했건만 당신은 그 말을
안 듣고 나를 미혹하려 합니까?”라고 단호히 거절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이단자들과
는 어떠한 대화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경건하고 도덕적인 종교라고 할지
라도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무조건 이단입니다. 그래서 최소한도로 삼위일체는 인정을
해야 그 다음부터 우리가 건전한 교리 체계에 들어와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역사상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친 교리 체계는 400년경에 아프리카 히포
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이 다시 정립을 했고, 이것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심하게 부패
시키고 복음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에 마틴 루터가 다시 발견을 했습니다.
다시 발견한 진리를 요한 칼빈이라는 사람이 다시 정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
는 감리교의 조지 휫필드라는 분이 설교를 했고 침례교회의 스펄전 목사님이 설교를
했고 또 20세기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라는 목사님이, 그리고 혁혁한 수많은 위대
한 설교자들이 가르치고 전수해 온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건전한 교리의 전통에 확고히 서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건전한 말씀의 유형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되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
다. 비록 신령성이 조금 모자라고 윤리성이나 질서성도 때로는 조금 흔들릴 수는 있지
만 진리성 하나 만큼은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건전한 말씀의 본을 침례
교인들이 잘 정리한 것이 필라델피아 고백서라는 것입니다. 이 필라델피아 고백서는
32장으로 되어있는데 서른 두장을 이제 우리가 올해 2월호 ‘은혜지’로부터 시작해
서 성서론부터 제가 32개의 교리의 기초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들을 쭉 연재해서 해설
을 해 놓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여러분이 ‘은혜지’를 보시면서, 그냥 ‘아이
고 이거 골치 아프네!’ 하고 지나가지 마시고, 꼭 줄치면서 읽으시고 그것이 건전한
교리의 본이다 생각을 하시고 제가 간단하게 해설도 해 놓았으니까 그 해설도 읽어보
시고 묵상하시고 그래서 요동치 않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올 봄에는 남전도회가 주최하고 영암선교연구원이 주관하여 성서적인 구원론에 관
한 다섯 강좌를 개최할 것입니다.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할 것인데, 총신대
나 합신대의 교수님으로 계신 그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들을 모셔서 우리 교회의 성도
님들을 대상으로 다섯 강좌를 개설하고자 합니다. 이 행사에 대해서도 여러분들께서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꼭 참석해서 들으시고 굳건한 진리의 교리위에 서시기 바랍니
다.


Ⅱ. 건전한 말씀의 본을 굳게 붙들어야 할 이유

  이와 같은 모든 노력이 바로 건전한 말씀의 본을 지키고 가르치기 위한 노력인 것입
니다. 우리가 왜 건전한 말씀의 본을 굳게 붙들어야 됩니까?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교회적인 이유도 있고, 또 불신자들을 위한 이유도 있습니다.

  1. 개인적인 이유

  개인적인 이유로는 첫째로 건전한 교리체계만이 우리가 거할 수 있는 올바른 터전
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11편 3절 말씀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고” 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은 “기초가 무너져서 없는데 의인이 할게 뭐있냐?”
는 말씀입니다. 교리적인 건전한 기초 없이 무슨 전도를 합니까? 무슨 메시지를 전도
한다는 말입니까? 교리적인 건전한 기초 없이 무슨 신앙교육을 한다는 말입니까? 뭘
교육합니까? 교리적인 건전한 기초 없이 무슨 설교를 합니까? 정치, 철학 얘기합니
까? 문화를 얘기합니까? 뭘 얘기합니까? 교리적인 건전한 기초 없이 무슨 선교를 한다
는 말입니까? 교리적인 기초 없이 하는 선교는 안 하니만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
리적인 기초가 없는 선교는 새로운 이단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선교는
안 하는 게 훨씬 나은 것입니다. 따라서 건전한 교리체계만이 올바른 우리 신앙의 모
든 것이 건설될 수 있는 올바른 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건전한 교리체계를 통해서만 우리 성도들이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됩
니다. 이 교리가 불건전하면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질 않습
니다. 이 교리가 건전하게 들어서게 되어야 그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깨달아지기 시작하고 ‘아하!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 말씀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본인이 영적인 성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를 기를 때에도 나무를 올바른 터에다가 심어서 뿌리를 내려야 1년, 2
년, 10년, 20년 지나면서 나무가 성장을 하는 것이지, 나무를 심는데 올해는 이산에다
가 심고 ‘이 산 인가봐!’ 하며 심고 내년도에는 뽑아가지고 ‘저 산 인가봐!’ 하
고 심고 또 일 년 지나서 ‘아니야, 재작년 그 산이 맞는가봐!’ 해서 거기다 심고 이
렇게 해서 ‘이 산 인가봐, 저 산 인가봐, 아니야 아까 그 산이 맞는가봐!’ 이러면
서 자꾸 자꾸 옮기고 매 년 옮기고 하면 아무리 좋은 나무도 크게 성장할 수가 없습니
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올해는 이 교리체계 배우고 내 년도에는 저 교리체계
배우고 후 년도에는 저 교리체계 배우고 이렇게 해보면 결국은 어떠한 신앙의 성장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건전한 교리의 터에 탁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쭉 양분을 흡수해
야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가 왜 건전한 말씀의 본을 붙들어야 됩니까? 만약에 건전한 말씀
의 본을 붙잡지 않으면 그것은 불건전한 악을 따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 침례교가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의 침수례가 진리가 아닌데, 제가 여러분에
게 신자의 침수를 주고 있다면 저는 불건전한 것을 행하는 것이고 불건전한 악을 행하
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건전한 진리의 본을 딱 붙잡지 않으면 불건전한 악
을 행하게 되는 것인데, 그건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의 교리가 진리
가 아닌데 가르친다면 저는 불건전한 악을 가르치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불
건전한 악을 피하려면 건전한 말씀의 체계를 굳게 붙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건전한 말씀의 본을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불건전한 교리는 불건전한 인격과 삶을 낳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
도인이라 하면서도 삶이 지저분하고 더럽고 하는 사람은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이
믿는 사상이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된 오류를 믿기 때문입니다. 오류
가 진리를 낳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류는 언제나 오류를 낳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
수 믿는다하면서 그 결과 삶이 방탕하면 그 사람이 믿고 있는 교리가 불건전하기 때문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건전한 교리는 불건전한 삶을 낳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으
로도 언제나 교리적인 바른 말씀의 본을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
은 ‘아이고, 나는 말씀의 본이고 뭐고 관계없다’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닙니다. 그
렇게 되면 영적성장을 경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칼빈이 정의하기를, “나
는 교리가 건전하고 뭐고 관계없고 주일에 나와서 그저 잠간 앉아서 졸다가 그냥 가면
된다”는 부류를 가리켜서 ‘니고데모파’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도 영적성장을 경험하고, 오류의 삶을 피하고 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진리의 본
을 붙들어야만 하겠습니다.

  2. 교회적인 이유

  건전한 교리의 체계만이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교회가 갈라지
고 상처받고 분리되는 것은 진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미국 침례교의 첫 조상인
로저 윌리암스라고 하는 분의 글을 보면, 한 가톨릭 수도승이 성경을 갖다 내던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성경을 탁 내던지면서 수도승은 “이 성경 때문에 교회는 갈라
지고 교회가 싸움이 나고, 교회가 분열이 되어 수많은 교파가 생겨났다”는 말이었습
니다. 그래서 로저 윌리암스는 그 책에서 그런 나쁜 놈의 수도승이 어디 있냐고 한 스
무 번쯤 욕을 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갈라지고 싸우고 분열되고 상처 나
는 것이 어디 진리 때문입니까? 오류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잘못 믿기 때문이
지, 잘 믿으면 왜 분열되고 상처가 납니까? 바로 믿으면, 바른 진리의 본을 따르게 되
면, 교회는 어떤 상처가 있어도 치유되고 다툼이 있어도 치유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는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교회가 건전한 교리 체계를 유지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건전한 교리
에 축복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불건전한 교리는 축복 받는 것 같아도 조만간 무너지
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불건전한 것을 아무리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처럼 높이 쌓아놓
았다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에 가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류는 잠시
커지는 거 같아도 곧바로 분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작게 시작하는 것
같아도 작은 겨자 씨앗 같아서 결국은 큰 나무가 되어 수많은 새들이 깃들 수 있는
큰 거목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분열과 다툼이 완전
히 치유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교리 체계를 붙들고 그것을 배우고 가르쳐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또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건전한 교리 체계를 붙들어야만
됩니다.
 
  2. 불신자들을 위한 이유 

  기독교를 제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집단은 유대교인과 회교도인입니다. 회교도와 유
대교도들은 유일신론자들 입니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그것만 믿는 종교
들입니다. 그래서 유대교도들도 하나님의 유일신론만 믿고 삼위일체를 믿지 않습니
다. 회교도들도 ‘알라만이 신이다’ 해서 유일신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본 기독교는 다 불건전한 기독교였습니다.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정교나 온갖 성상 만
들고 성화를 그린 것을 보고 회교도들이 기독교는 우상숭배 한다하였던 것입니다. 그
래서 동로마 황제에게 “당신네 동방정교 우상숭배 한다. 우리는 회교도들이지만 우상
숭배는 안한다. 우리는 우상 다 부숴버렸는데 기독교 국가 와서 보니까 당신네는 온
통 우상숭배하고 있네?” 그런 거 아닙니까? 그래서 황제가 “안 되겠네. 진짜 우상이
네”해서 교회를 보고 “우상을 파괴해라” 그랬더니 교회의 목사들과 성도들이 반대
해 787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엽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상이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립
니다. 그리고 그만 동방 정교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때부터 계속적인 우상숭배로 빠
져버렸습니다. 더 이상 교회라 할 수도 없는 진리성에서 벗어난 집단이 된 것입니다.
역사를 볼 때에 하나님의 얼마나 큰 심판들이 그 집단에 임했는지 볼 수가 있는 것입
니다.

  이처럼 교회가 불건전한 진리체계를 따르게 되면 다른 이교들도 보고 ‘아! 교회는
잘못됐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예수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바
른 진리체계를 굳게 붙잡을 때에 불신자들이 교회를 달리 보게 되는 것이고 ‘아! 교
회가 하는 말씀을 들으니까 말도 안돼는 말이 아니구나! 아! 교회가 하는 말씀이, 저
것이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다가 어느 순간 ‘옳습니다! 하고 믿게 되는 것입
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건전한 말
씀의 본, 그것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꼭 붙들어야 됩니다.


Ⅲ. 건전한 말씀의 본을 굳게 잡는 방편

  우리가 이 건전한 말씀의 본을 굳게 잡으려 먼저 바른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올바
른 교리가 뭔가 하는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이해 할 수도 없는 것을 굳게 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잡습니까? 그러므로 배워야 됩니다. 오늘날
저는 어떤 목사들도 건전한 교리 체계를 못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서도 못 배
웠기 때문에 목사가 못 배우니까 성도들도 못 배웁니다. 건전한 교리 체계가 뭔지 모
릅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 믿지만 죽을 때도 모릅니다. 모르면서도 모르는 줄도 모릅
니다. 그건 심각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나오고, 목회를 하고, 박사학위 과정을 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다가
드디어 ‘아하! 이것이 건전한 교리의 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전에
는 몰랐습니다. 목사인데 모를 수 있느냐? 모를 수 있습니다. 아, 오늘날도 목사님들
이 모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배워야 됩니다.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난 다 알아!’ 이런 사람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는 이 건전한 교리의 본을 굳게 잡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겸손한 기도가 있어야 됩니다. 이 건전한 교리 체계는 오로지 성령님만
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르쳐도 성령님이 역사하지 아니하시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모두 안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못 배웁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면서 겸손히 배워야 됩니다. 우리교회가 이제 출
판사 등록이 되었습니다. 정식 법인으로 등록이 되어서, 이제 교회에서 세권 내지 네
권씩 계속해서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수준 높은 책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 사서 보시고 읽으시고 처음 읽을 때는 ‘아이고 , 뭐가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어려운 것 ‘고기가 딱딱하다’ 해도 자꾸 먹다보면 그게 참 맛이 있고 ‘우유가 맛있
다’ 해도 나중에 크면 ‘애들이나 줘라’ 이런 것처럼, 결국은 우리 성도들이 성장
을 하기 위해서는 이 건전한 교리체계 딱딱한 것을 자꾸 읽고 맛보고 해야 될 것입니
다. 그러므로 건전한 교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이해와 그리고 겸손한 기도와 거기다가 여기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진리를 기꺼이 믿으려고 하는 믿음과 진리를 사랑하려고 하
는 뜨거운 사랑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건전한 말
씀의 본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해도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만 됩
니다. 진리를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해도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의 믿음의 성
도님들은 이 말씀의 본을 꽉 붙잡아야만 됩니다. 유명한 신학대학교의 교수라도, 박사
라도 건전한 말씀의 본에서 떠난 사람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진리를 떠난
학문의 지식은 단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조금의 지식만을 쌓게 할 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할지라도 건전한 말씀의 본에서 떠난 가르침은 모두 다 헛된 것입
니다. 진리의 말씀을 떠난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은 말씀의 건전한 본을 경멸합니다.
그리고 무시하고 강력하게 조롱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하신 것을 믿으
십니까?” 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합니다. 자기는 술 먹고 담배 피우면서 예
수님의 동정녀 탄생하신 것을 믿는 사람을 경멸합니다. 또한 “아직도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교리를 믿으십니까?” 하고 무시합니다.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
는 이 휴머니즘 시대에 그런 것을 믿으십니까?” 하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리의 체계에서 떠난 세상의 불경건한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고 경멸
당해도 바른 말씀의 본을 붙들겠습니다. 진리의 체계를 굳건히 지키고 전파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자 합니다. 그리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이 깨닫기 위해서 기도하겠습
니다. 이와 같은 진리의 본을 붙잡고 가르치는 일에 우리교회의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
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
(Gresham's law)은 경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곳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
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내가 건전한 진리의 본을 배우고 깨닫고 그
진리의 본을 붙들고 가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진리의 체계에서
떠난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올바른 말씀의 본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가르쳐야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우리 모두가 이러한 결심을 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의 교리를 영원토록 붙드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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