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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소명2 /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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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1-11                                         
“베드로의 소명 2”(The Calling of Peter 2)         


지난주일에는 오늘과 같은 본문을 가지고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모든 신앙인에게 있어서 신앙의 출발점과 같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이러한 신앙의 출발점의 모습을 오늘 주어진 본문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에 적어도 4가지 질문을 할 수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1. 우리의 소명이 주님의 가르침과 명령에 근거한 것인가?
2. 우리의 소명이 우리에게는 복된 모습으로 주어졌느냐?
3. 우리의 소명에는 나를 부인하는 그러한 자세가 있었느냐?
4. 우리의 소명에는 결단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에는 이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부름을 받은 일이 우리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나머지 3가지의 질문을 한꺼번에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고 할 때 있어서, 그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모습이 우리에게 유익되고 복된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선선히 믿거나 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몹쓸 병에 걸렸다가 그 병이 치유가 되었다든지, 가난 때문에 고생했는데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든지 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일까지 다양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성가대로 봉사하던 나이가 좀 든 어떤 처녀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주일날 성가대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설교 시간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처녀가 결혼하고 싶어서 통일교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처녀로 교회에 다니면서 좋은 신랑을 만나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제대로 안 이루어지니까 통일교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서로 모르던 남녀라도 부부로 짝을 지워준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경우는 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종교에 입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어떤 유익을 우리는 흔히 “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복이 주워져야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과정에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도 한마디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부로서 그 날은 아주 낭패를 본 날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고생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기 잡는 것을 포기하고 해변으로 돌아와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한 사람을 중심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베드로에게 오더니 잠시 배에 올라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더니 배를 조금 띄워달라고 요청을 하더니 그 배에 올라서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피곤하기도 하고 마음도 착잡하여 별로 듣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바로 옆에서 가르치는 말씀이 그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차츰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분의 가르침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느닷없이 자기를 향해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라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의 어부생활 경험으로는 이런 날 깊은 데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밤에 너무 고생해서 고기를 잡을 마음보다는 집에 들어가 좀 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그물을 거의 다 손질을 해 놓았기 때문에 그 그물을 다시 사용하기가 좀 아깝기도 하였습니다. 이래저래 귀찮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베드로는 마음 한구석에서 아까 그분이 가르친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해 버렸습니다.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려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동료 몇 사람과 배를 저어 깊은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한참 노 저어 깊은 데로 가면서도 자기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데 이력이 난 베드로는 어디가 깊은지를 알고 있기에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될 대로 되라”라는 마음으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한참 후에 그물을 걷어 들일 때가 된 것 같아 그물을 끌어올리는데, 베드로는 무심코 그물을 끌어올리려다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별로 힘을 안 주고 끌어올리다가 그물이 무거워 그냥 그물의 힘에 이끌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순간 긴장된 베드로는 옆의 동료를 불러 같이 그물을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묵직했습니다. 지금까지 도저히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물을 점점 끌어올리면서 얼핏 보니 상당히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물을 배 안으로 끌어들이려면 너무 무거워서 그물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작은 망을 가지고 와서 우선 그물 위에 있는 고기들부터 담아서 배안에다가 쏟아 놓으면서 그물의 무게를 줄이려고 하였습니다. 차츰 이렇게 해 나가는데, 그물에 있는 고기를 다 끌어올리면 배가 가라앉을 것 같았습니다. 이때 마침, 동료 배 하나가 멀리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큰 소리로 좀 와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워낙 위급하게 소리치니 그 배도 빠르게 노 저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료의 배가 가까이 오자 베드로는 그 그물을 넘겨주어 그물을 그 배로 끌어올리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는지 그 배도 고기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두 배가 만선이 되어 해변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지난밤의 허탈한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자기도 모르게 사라지고 흥분된 마음으로 모든 피곤이 싹 풀리면서 기분 또한 좋아졌습니다.

해변으로 가까워지는데 가만 보니, 아까 자기더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라고 말씀한 분이 가지 않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순간 마음에 긴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길래 이런 일을 미리 알고 말씀하셨는가?”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아 기쁘고 흥분되고 들뜬 마음이 싹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해변에 도착한 베드로는 잡은 고기를 부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분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가만히 앉아 계신 그분의 무릎 가까이 간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말은 사람 앞에 해 본적이 없는 베드로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신 그분은 “무서워 마시오. 당신은 이제부터는 사람을 취하게 될 것이요”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순간 알게 된 베드로는 이 분을 뒤따라가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과정에서 받은 복을 봅니다. 어부에게 있어서 복이라면 고기를 많이 잡게 되는 것일 겁니다. 그 복을 어부로서의 베드로는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과 자세와 그리고 하는 일에 있어서 아름다운 진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셨다는 기쁨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그 복의 모습이나 내용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복을 체험하고 누릴 수 있게 되는 현실은 분명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렇게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먼저 발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1. 복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라고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얼토당토 않는 명령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래도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느껴지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ex)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 시대의 수리아 국방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게 된 사건 / 또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자리에서 하인들의 순종으로 포도주가 만들어진 사건.

사실 같은 명령이라도 타당하거나 합리적인 내용이라면 그 말씀이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순종의 진정한 성격을 잘 드러내는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을 통해서 이러한 복의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대체로 이러한 모순적인 명령에 순종한 모습이 많은 것도 그 이유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순적인 명령이 때로는 우리를 난처하게 하거나 당황하게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처럼 말씀에 뒷받침된 순종의 자세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엉뚱한 순종을 강요하여 잘못된 길로 이끄는 거짓 선지자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르고 깊이 있는 이해를 갖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복이란 나눌 때에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그물에 잡힌 고기를 동료 배에 같이 실었을 때에 온전하게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잡은바 많은 고기로 인하여 배가 가라앉아 버리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이 주어져도 그 복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받은 바 그 복에 치여서 그 복을 오히려 화로 만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은 한번만 받고 마는 일회성의 복으로 그치고 마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또 그 복을 어떻게 감당하는가 하는 것에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자손의 복과 넓은 땅의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주시겠다고 까지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신 모습인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받은 바 그 복을 어떻게 감당하는가를 눈여겨보셨을 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받은바 복을 아주 지혜롭게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사람 낚는 어부”라는 소명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복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3. 복을 받는 사람은 이렇게 복을 감당할 수 있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복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뭔가에 현혹되기 쉽습니다. 물질에 현혹되기 쉽고, 명예에 현혹되기 쉽고, 심지어는 종교에 현혹되기도 쉽습니다. 현혹된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잘못 이해하게 되어 결국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에게 속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혹시키는 내용들은 주로 복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도 예수님께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흔히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나갈 때에 그 사람의 진실을 더 잘 알 수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복이 주어질 때, 그 복을 어떻게 관리하고 감당하는가 하는 것에서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가치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를 보십시다. 복을 받은 순간, 베드로가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복이 있게 하신 분의 위대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이 분에게 가면 언제든지 복을 받을 수 있겠지!” 하고 꽉 붙잡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분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분”임을 깨닫고 자기로부터 떠나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현실입니다. 이렇게 받은 복을 통하여 그 복에 묻혀버리지 않고, 그 복을 주신 분의 위대함을 발견함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4. 이러한 자기 발견은 결국 부르심에 대한 결단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베드로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것이 결단입니다. 신앙에는 이러한 결단이 기본적으로 전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단이 없다면 신앙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결단을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 때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고난당하실 일에 대해 말씀하시곤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결단을 하고 따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은 진실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인생은 장난이 아닙니다. 하지만 장난처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사는 대수롭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용기와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소명에는 여러 가지가 같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명령, 복된 모습, 나를 부인하는 데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자기 발견, 그리고 이에 따르는 결단 등이 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소명이 비록 “우리 신앙의 시작 혹은 출발점”이라는 시간적으로는 우리의 삶에서 앞부분에 해당되는 모습이지만 여기에는 종합적이 모든 내용들이 다 망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여정 속에서 이러한 소명을 늘 점검해 보는 자세와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신앙의 아름다운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여러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이러한 신앙의 아름다운 발전을 간직할 수 있는 귀한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모습을 성찰해가는 귀한 모습을 간직하실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그 모습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저희들이 베드로와는 다른 사람들이지마는 저희들도 같은 마음으로 부르시고자 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나아가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고,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삶의 진정한 근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해 주실 만한, 그렇게 가치 있는 인간임을 이러한 소명의식을 통하여 새롭게 간직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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