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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래도 춤은 추어야 합니다! / 삿 2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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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은 추어야 합니다! / 사사기 21:16-24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여 년 전, 우리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강대국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 백성이 그 나라를 탈출한 사건인데요, 그것도 60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한 날 한 시에 탈출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저 유명한 출애굽 사건이지요. 그 후 저들은 천신만고 끝에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들은 그 곳에서 200년 동안이나 왕을 세우지 않고 평등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냅니다. 그 200여년의 기간을 가리켜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랬습니다. 사사시대엔 왕이 없었습니다. 하여 외적이 침입하는 등의 국가적 대사가 발생하면, 왕 대신 사사를 세워 그 위기를 극복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고, 심한 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면, 심한 때는 무정부상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들의 사사시대는  200여년 만에 그 종말을 고하고 맙니다. 해서 이스라엘 왕조가 탄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본문의 이야기는 사사시대의 갈등과 반목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레위 지파의 한 사람이 둘째 부인을 두었는데, 어느 날 그 여인이 집을 나가 친정으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참다못한 이 사람, 그녀를 찾아갑니다. 가서 장인 어르신께 정중히 인사 여쭌 후, 그녀를 위로하고는 마침내 그녀를 다시 데리고 옵니다. 다행히 장인 영감님의 대접은 융숭했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베냐민 지파 동네를 지나게 되었는데, 날이 저물어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 하룻밤 묵어갈 집을 찾았습니다. 감사하게도 어렵지 않게 마음씨 좋은 어느 영감님의 집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필이면 그날 밤, 그 집에서 큰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 동네 망나니들이, 밤중에 찾아와, 이 여인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들은 손님의 여인을 끌어내어 밤새도록 욕을 보인 후 동이 틀 무렵에야 돌려보냅니다. 소돔 성의 이야기가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이 여인, 벌벌 기다시피 하여 그 집까지 오긴 왔지만, 그만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거기 엎드러져 숨을 거두고 맙니다. 도대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당한 레위 지파의 이 남자, 천인공노할 만행에 치를 떨면서, 이미 싸늘해진 자기 부인의 주검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 남자,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자기 부인의 시체를 열두 토막을 내어, 전국의 열두 지파에게로 하나씩 보냅니다. 베냐민 지파의 만행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 끔찍한 사건을 보고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각 12지파의 총회를 소집합니다. 장소는 미스바, 해서 미스바 총회가 회집된 것입니다. 총회로 모인 저들이 베냐민 지파를 심문합니다. 그 때 베냐민 지파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으면 사건은 거기서 일단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완전 무장을 하고는, 오히려 이스라엘 총회 전체와 맞서 싸우려고 덤빕니다.

할 수 없이,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로 결정합니다. 그것도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멸하기로 의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위“베냐민 지파 멸종 작전”이 감행됩니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온 족속들을 거의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는 총회로 다시 모여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한 충격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그 결정을 직접 들어옵니다. / 21:1 / (읽기) / 이로써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한 지파가 지금 완전히 멸절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열한 지파가 한 지파를 상대로, 두 번 죽이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홧김에 이런 결정까지 내리긴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이 좋을 리 만무했습니다. 해서 저들은 자리를 옮겨 하나님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의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 낸 직후인데 승전가를 부르며 자축하는 대신 울며불며 회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인데요, 다시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 21:2-3 / (읽기) / 그랬습니다. 저들은 미스바에서 벧엘에 자리를 옮겨 날이 저물도록 대성통곡을 하며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어찌하여 이스라엘 동포 가운데 한 지파가 없어지는 이런 엄청난 일을 우리 스스로 자행하게 된 것입니까?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씀입니까?”그랬습니다. 저들은 12지파 중 한 지파가 이지러진 사실을 놓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민족의 제단에 엎드려 저들은 합심하여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빌고 또 빌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와 민족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일방이 일방을 몰아붙여,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 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서로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이 번 사태의 원인 제공자는 당신들 쪽에 있다고 서로 삿대질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한 달 앞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정말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많은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위기 앞에서, 먼저 벧엘에 모여 대성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중요한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러 모였던 곳은 총회가 소집되었던 미스가 아니라 벧엘이었다는 점입니다. 벧엘이 어디입니까? 야곱이 돌단을 쌓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던 곳,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렇습니다. 위기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여기 하나님의 집에 나와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사회가 흔들리면 흘들릴수록 우리 성도들은 먼저 제단에 나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망연자실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다급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위기에서 건져 주십사고 하나님께 빌고 또 빌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 크리스천들을 세워주신 이유요, 우리 성도들이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위해서 해야 하는 가장 중차대한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상한 시국입니다. 비상한 각오로 새벽마다 나와 더욱 간절하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의 기도 소리가 이 땅의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기도의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민족의 위기 마다 기도의 제단을 쌓았던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 전통이 우리 대에 와서 끊겨서는 아니 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함성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영력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여 우리 민족의 내일을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분명 역사의 주관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자, 다시 성경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울며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 민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다음 날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대 화합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민족의 화해를 위한 아름다운 자리에 참여하지 않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저들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베냐민 지파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용서할 수도 없는데, 저들과 화해를 한다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고집이었습니다. 저들은 바로 길르앗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총회는 다시 한번 회해를 거부하는 저들을 쳐서, 오히려 화해의 제물로 삼기로 결정합니다. 하여 민족의 화해를 거부한 길르앗 사람들을 쳐서 멸하고, 그 가운데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 400명을 잡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처녀 400명을 베냐민 지파 중 남은 자 600명의 아내로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화해를 거부한 길르앗을 쳐서 그들의 딸로, 베냐민 지파의 멸절을 막아 보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방법은 민족 화해의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없었습니다. / 21:14 / (읽고) / 그랬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자의 수가 모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살아남은 장정은 600명이었는데, 사로잡아온 길르앗 처녀는 모두 400명이었기 때문입니다. 600대 400으로 상징되는 또 한번의 시행착오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는 한 지파가 사라지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네 딸들을 베냐민 지파에게 내어 줄 수도 없었습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저들에게는 딸을 주지 않겠노라 서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진퇴양난의 딜레마였습니다.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 이스라엘 장로들의 고충을 들어보겠습니다. / 21:16-18 / (읽기) / 17절에 보니, 지난 번 전쟁 때 도망하여 목숨을 건진 베냐민 사람들이 있군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땅과 아내를 주려고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세워주신 한 지파가 완전히 사라지는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총회의 장로들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절묘한 대안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 대안이 바로 실로에서 춤추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실로에서 춤추는 여인들, 저들을 희생양으로 하여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 화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해마다 실로 성소에서 여호와의 절기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 때 많은 실로 여인들이 이 절기 축제의 자리에 나와 춤을 추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춤추러 나오는 처녀들을 민족 화해의 제물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베냐민 자손들을 불러 은밀하게 일러 줍니다. “이보시게, 여보게들, 모년 모월 모시에, 실로로 가게, 거기 가면 축제 때에 처녀들이 춤을 추러 나올 걸세, 그러면 포도밭에 잘 숨어 있다가, 춤추러 나오는 여인들 한 사람씩 보쌈을 해서 데리고 가 아내로 삼으란 말이시. 뒷일은 걱정하지 말겐, 우리가 다 정리해 줌세. 또한 우리도 눈 감아 줌세. 혹시 그 처녀의 아비나 형제가 와서 무어라 하면, 하늘의 뜻이니 조용히 하라고 하면 되네, 뒷감당은 우리가 할 터인,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게나.”

결국 저들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알려준 대로 합니다. 하여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춤추는 여인들로 인하여 민족의 반목과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춤추는 여인들 덕분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봅니다. / 21:23-24 / (읽기) / 23절에 보니, 가장 먼저 베냐민 자손들이 살아납니다. 저 춤추는 여인들로 인하여 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이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무고한 한 여인을 잔인하게 살인했던 죄인에서 건짐 받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 아내까지 얻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서 성읍을 중건하고 새 날을 열게 된 것입니다. 춤추는 여인들 덕분이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일은, 24절을 보니, 그 때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총회로 모였던 모든 백성들이 자기 지파,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저들은 그리운 고향, 그리운 가족을 떠나, 오직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기 지파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가벼운 발걸음, 이 모든 감사, 바로 실로의 춤추는 여인들 덕분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실로 성소에서 추는 춤은 곧 예배였습니다. 저들이 실로에 모여 춤을 추었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저들이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에 모였다고 분명하게 전해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저들이 거기 모인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인들이 민족 전체의 화해를 위한 제물로 드려졌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춤을 추러 나온 저 여인들, 이 판에 무슨 춤을 추느냐는 아우성 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래도 춤은 추어야 한다는 일념에, 오직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춤을 추었던 저 여인들, 바로 저들이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의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드려진 고귀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의 몸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또한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말씀은 또 무슨 뜻일까?

여기서 우리는 사사기의 말씀과 로마서의 말씀을 동시에 읽으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구원의 춤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은, 민족의 제단에 나가 춤을 추라는 명령에 다름 아닌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단지 종교적인 요식 행위가 아닙니다. 아울러 예배에서 봉헌되는 춤은 단순한 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예배란 민족의 화해를 이루는 역사적인 행위요, 그 예배에서 봉헌하는 춤은 세속에서 추는 춤과 전적으로 다른 춤, 곧 구원의 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민족을 구원하는 영적인 춤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다급한 일이 있어도 우리의 구원은 춤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춤은 추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민족을 구원하는 영적인 춤을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춤입니다. 우리의 춤은 예배입니다. 서로 반목하는 무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춤,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건져내는 춤,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내는 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춤이어야 합니다. 하여 우리 모두는 민족의 제단에서 춤을 추는 성도들이어야 합니다.

실로의 여인들, 그들은 온 몸으로 예배를 드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의 춤은 곧 예배였습니다. 민족 사이의 분쟁과 반목과 증오를 풀어내는 한풀이 춤이었으며, 새로운 미래와 희망을 기원하는 축복의 춤이었습니다. 속죄의 춤, 그리고 축복의 춤, 그런 춤으로 예배를 섬기던 저들은, 춤만 춘 것이 아닙니다. 춤을 추다가 자신 몸을 업어 가는 자들에게 자신을 다 내어주도록 순종하며 헌신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희생양이 될 때 거기에 화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희생양이 될 때 민족의 살 길이 열립니다. 해서 우린 계속해서 춤을 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춤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민족을 구원하는 춤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혼신의 힘을 다해 구원의 춤을 추시기 바랍니다. 모든 죄로부터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는 영적인 춤을 추어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언짢아하는 사람들 한 복판에서, 서로를 증오하다 못해 치를 떠는 사람들 한 복판에서, 지역감정으로 동포가 원수로 변한 그 한 복판에서, 여전히 총칼을 마주대고 대립하고 있는 남과 북 그 한 복판에서 구원의 춤을 추어주시기 바랍니다.

하여 우리의 춤과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산제사가 될 때, 그 곳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 민족의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춤은 추어야 합니다. 그래도 구원의 춤은 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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