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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렛 예수, 그는 주 그리스도 (행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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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사렛 예수, 그는 주 그리스도
구    절 : 사도행전 4:12

오늘 저는 ‘나사렛 예수, 그는 주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름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였던 여호수아와 뜻이 같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가운데는 아이를 낳으면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그냥 ‘예수’라고 하기보다는 주님의 고향을 앞에 붙여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많았으나 ‘나사렛 예수’라고 하면 우리 주님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이런 구별 없이 ‘예수’는 우리 주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가공인물이 아니고 역사에 실재했던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으며, 서른 세 살 쯤 되던 해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은 다른 사람들과 그 성격이 다릅니다.  우선, 탄생부터가 특이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녀의 혼인 관계를 통해서 출생합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없이 태어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시험관 아기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의 근거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가 없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습니다. 이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하는 일입니다. 마리아 역시 천사가 찾아와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자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때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세주는 무죄하신 사람으로 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아담의 혈통과 상관없는 분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꾄 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메시야를 말하며, 뱀은 마귀, 사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말씀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인류의 철천지원수인 사탄을 멸하실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최초로 약속하신 것이므로 원(原)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한번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언을 몇 개만 소개하면,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메시야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입니다. 또 그는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고 했는데, 이는 메시야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고 했는데, 이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의 탄생에 관해서 구체적인 예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예언이 예수님과 관련해서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이신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근거는 구약 성경의 예언들과 일치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 역시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데,  이사야서 35장 5절과 6절에 “5)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므로 이를 단순히 기적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그와 같은 기적을 행하는 이를 보거든 그가 바로 메시야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메시야가 필요한 이유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인간들에게 메시야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아담의 타락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메시야가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아담의 타락이 없다면 인류는 여전히 낙원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담은 타락했고, 아담의 죄얼은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유전되었습니다. 싫든 좋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구세주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화 되어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무속적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구원에 관한 설교보다 기복적인 설교를 더 좋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구원의 필요성을 올바로, 실감나게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죄의 추악함과 무서운 결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지루하게 여기고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삶을 위한 원리라든가 복 받는 비결에 관해서는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그런 점에서,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은 구원과 관련해서도 모든 사람이 명심해야 할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한 때 있었다는 사실을 인류는 그렇게 빈번하게 회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예수라는 사람이 한 때 그들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류가 언제나 회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는 메시야가 아니지만 예수님은 메시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흔히 기독교를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알지만, 사실상 기독교는 종교 이상입니다. 기독교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편협하고 배타적인 종교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특히, 종교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길이 하나뿐이 아니라 많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비유가 있는데, 그것은 구원을 산 정상에 비유하고 그곳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가지 있는 것과 같이 구원의 길은 다양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길로 오르던지 산 정상에 올라가면 될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비유는 그들이 편리하게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힘쓰고 노력해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것이므로 저들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구원을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으로 비유한 예가 전혀 없습니다. 그 대신 문으로 비유합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인 문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7)…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문’은 ‘구원의 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문은 여러 개가 아니라 단 하나 뿐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구원의 문이십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심으로 자신을 구원의 길에 비유하셨습니다. 서울 가는 길은 하나 뿐이 아니고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다른 길보다 좀 더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도 있고, 빙 둘러서 가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길로 가든지 서울만 갈 수 있다면 구태여 어느 한 길을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각 자의 자유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 사망의 길에 불과합니다. 구원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릇된 예수상(像)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욕구에 적합한 예수상을 만들어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해방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를 빈민들과 억압 받는 계층의 해방자로 내세웁니다. 물론, 예수께서 배고픈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선사업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베다니 동네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향유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를 보고 분 내어 말하기를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하며 그 여자를 책망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고 하셨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 년치 임금을 모은 돈에 해당합니다. 요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오 만원으로 계산할지라도 적어도 천 오백만원이 넘는 돈입니다. 그 처럼 막대한 비용이 나가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다 부어드리는데도 주님께서는 만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그 같은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보살펴야 하지만,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이 보다 더 고귀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개혁자들은 예수님을 구습을 타파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싸운 투사로 여깁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그 당시 유대 종교가들의 위선과 죄를 비난하셨으며, 그 사회에서 배척당하던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회개혁을 목적으로 해서 무슨 언행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하신 것은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이,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박애주의를 실천한 인류의 교사로 여깁니다. 사실상 예수님처럼 사람 차별하지 않으시고 두루 사랑을 베푸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서기관이 “내 이웃이 누굽니까?”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는 평소에 원수처럼 대하는 유대인을 죽는데서 구해준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이웃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박애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를 실패한 이상가 정도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다가 그 당시 유대 사회의 기득권층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에 의해 뜻이 무산된 채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실패한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예수가 실패했지만 자기의 고상한 이상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그 숭고한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만 알았지 부활은 모르는 자들입니다.


진실한 신앙고백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도전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예수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요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승천을 믿지 않으면서도 신학자 노릇을 하고 목사 노릇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만일 어느 신학자가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면 신문이나 방송이 호평을 합니다. 또는 타종교에서도 머리가 깬 사람이라는 좋은 평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가 없는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필수 조건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인 행세를 할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니까요. 그뿐 아니라, 그들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질 이유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견해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전한 것밖에 없으니까요.

정말로 중요한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먼젓번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믿느냐를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예수님과 나 사이에 일대 일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 들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하자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내 것인 양 말씀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고백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하여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주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 선뜻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는지 난처했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주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정작 대답하려고 하니까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했습니다.

시몬의 대답이 올바른 것임은 주님께서 그를 칭찬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7-19)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주님께서 여러분 각 자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복음서를 통해서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을 외워서 대답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의 진실한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고백한 그대로 우리 각 사람이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또한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어떠한 어려운 형편에서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겠는가,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섬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진심으로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주는 교훈

여러분은 세례 요한에 관해서 아실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이 예언에 언급한 “선지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에 출생에 관해서 예언된 분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 두 분 밖에 없습니다.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야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할 사명자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으므로 그에게 세례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그가 헤롯 안디파스가 동생 빌립포스의 아내에게 장가 든 일로 비난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아마 세례 요한은 그가 그처럼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으니 이번에는 예수께서 그를 구해 주실 줄로 생각했나 봅니다. 이는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님께서는 요한을 구하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태도에 실망했습니다. 마음속에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그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예수께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일을 비롯해서 많은 권능을 행하신 것을 고했습니다. 그 때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예수께 보내었더니 저희가 주님께 와서 말하기를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이만저만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그는 메시야를 위해 태어났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러한 세례 요한의 믿음이 흔들리다니, 여기서 우리는 그 역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연약함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요한이 예수님을 위해 행한 일을 볼 때 그가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사실을 의심했다고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감옥에 갇혀 있다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직접적인 대답을 듣기를 원했다고 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대답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2-23)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도 때로 어려운 시험을 만나 고통스러운 날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시련의 기간이 길어지면 믿음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의구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보았자, 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버리고 다른 메시야를 찾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참된 목적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은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구주로 오신 분이시지, 다른 일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현세적인 축복은 이를테면 덤으로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경 말씀에 따라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갈 정도로 넉넉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에게 물질적으로도 복을 주셔서 복음 사업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현실적으로 어렵고 힘든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형통할 때나 역경의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든 때나 우리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공회에 붙잡혀 가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앞에서 심문을 받고 공갈 협박을 받았으나 조금도 겁먹지 않았습니다. 위축되기는커녕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공회에서 외친 사도들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바로 이것이 사도들이 핍박을 이기고 죽기까지 나사렛 예수께 대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근거입니다.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유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위에서 어떠한 마귀의 시험도 능히 이기는 권세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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