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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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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하지 말지니라

본문: 출20:13

옛날 함경도 어느 고을의 사또가, 자기 어머니를 때려 숨지게 한 천인공노할 불효자를 잡아다가 목을 베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놈이 주둥아리를 놀려, "내 어머니를 내가 죽였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되레 큰 소리를 치며 대드는 것이 아닌가. 기가 찬 사또는, 그러나 사형 집행을 중지시키고는 그 날로 녀석을 사랑방에 들여앉혀 놓고, 인격 높은 훈장을 한 분 모셔와 그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녀석은 자기를 죽이지 않음에 감사하여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천자문, 동문선습, 명심보감, 사서삼경 등을 배우면서 그는 천륜과 인륜을 깨달았고, 사람의 도리를 알게 되었는데, 하루는 느닷없이 사또 앞에 나아와 엎드려 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천하에 죽일 놈이오니 저의 목을 베소서." 사또가 그제서야 불효자의 목을 베었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무서운 죄인임을 잘 알지 못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6계명이 나와 어떤 관계인가를 올바로 깨닫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제 6 계명은 아주 단순한 명령이지만, 특별히 현대에 있어서 수많은 윤리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살인은 물론이요, 사형제도와 자살, 낙태와 안락사, 전쟁, 그리고 미움과 분노, 폭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제 6 계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 6 계명은 특별히 현대의 우리들에게 더 많은 어필을 하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계명은 단지 “죽이지 말라”라는 말뿐입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선택의 자리에 섭니다. “무엇을 죽이지 말라는 말인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은 당연하겠지만, 이 명령에 동물을 죽이지 말라는 표현도 적용된다는 뜻인가?” 등의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동물을 죽이는 문제는 성경적으로 볼 때 엄격하게 금지된 사안은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위해 동물을 허락하셨습니다(창9:3). 또한 제물로서 동물들은 끊임없이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무조건 동물을 죽이고 먹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모든 동식물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 다음에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런 점에서 채식주의는 성경적인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이 순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생물에 대해 합당하게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지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이나, 즐거움을 위해서 함부로 생명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는 모든 생물을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잘 돌봐주는 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출23:5).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은 궁극적으로 인간 생명에 대한 경외감에서 극대화됩니다. 모든 생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지만,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1:26~27). 이런 점에서 인간의 생명은 여타의 어떠한 생명보다도 더 독특하고 유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매우 중대한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성경은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입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에서도 모든 인간의 가치를 동등하게 부여하고 있습니다. 왕이나 종의 생명의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고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칼로 우리야를 죽였으니, 칼이 네 집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삼하12:9~10)”고 말씀하십니다. 아합왕의 멸망에 있어서도 동일한 접근이 가능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나봇을 죽였습니다.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피를 흘린 것 때문에 아합의 피를 취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21:19).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고백해야할 신앙고백이 바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생명을 주관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리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든, 타인을 죽이는 것이든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명령으로 6계명을 주셨는가? 6계명은 과연 어떤 절차로도, 어떤 인간의 생명을 취할 수 없다는 것 즉 인간 생명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입니까? 분명 인간의 생명은 이 땅위의 어떤 다른 생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생명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결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절대성은 상대적인 절대성일 뿐,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절대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생명이 절대성이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생명체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물이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주신 것이라면 짐승을 죽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개인이 아닌 정부에 검을 허락하셨다면 그 정부는 인간의 생명을 제한할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비합법적인 모든 살인은 불가합니다.
비합법적인 살인의 대표적인 몇 가지 경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낙태입니다. 우리나라에만도 한해 약 200만 명의 태아가 낙태를 당한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이 생명을 자의로 제한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살인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 안에서 불법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묵인할 수 없습니다.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사회 환경이 낙태를 더 많이 시행하게끔 하지만 교회는 절대 이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낙태란 태아가 달이 차기 전에 죽어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낙태라고 부르는‘인공 임신 중절’은 자연 분만 시기가 되기 전에 모체로부터 인위적으로 태아를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과거에는 인공 유산 수술을 위험하고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거의 모든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의학이 발달되고 사회적으로 인구폭발에 대한 억제 요구, 또 개인의 편리 때문에 낙태를 손쉽게 하게되었습니다. 낙태를 그렇게 서슴지 않고 행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낙태를 그저 핏덩어리 하나 제거하는 간단한 수술로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태아는 수정된 순간부터 독립적인 인격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생명입니다(창1:26-28, 시 136:13-16). 수정된 태아는 1개의 세포가 수정된 지 23일째 되면 이미 심장이 형성되어 뛰기 시작하고 45일째 되면 뇌가 구성되어 뇌파가 감지된다. 12주정도 되면 이미 몸의 모든 형체가 생길 뿐 아니라 손톱도 생기고 지문도 발견되며 성구별도 뚜렷해진다. 5주된 태아 손에서 다섯 개의 손가락이 식별되고 눈의 색소가 형성되면서 눈이 거무스름하게 됩니다. 뇌파가 감지되고 기록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낙태는 너무 쉽고도 공공연한 일로 마치 간단한 수술로 몸의 귀찮은 부분을 떼어내듯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임신한 날로부터 34주 내에는 낙태할 수 있도록 법으로 명시되어 있으나 이때가 되면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따라서 낙태는 분명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요, 살인입니다.
둘째, 안락사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가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원리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그의 생명의 중지를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의학적으로 논의되어야할 세부적인 원리들이 많이 있지만, 단지 그가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죽음으로 결론짓는 것은 상황주의적인 삶의 해석이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 속에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기적과 또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생명을 중지시키는 모든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안락사를 원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아가듯이 죽는 것 또한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마지막을 보내야 할 뿐,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멈추도록 스스로 결단할 자격은 없습니다.
셋째, 자살입니다. 자살은 살인죄에 해당되는 큰 범죄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편협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자살하는 것입니다. 자살이 용납될 수 없는 이유는 1) 인간은 누구나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창1:26,27) 2) 자신을 죽이는 것 역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출20:13) 3) 모든 생명에 대한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민27:16) 4) 절망하여 목숨을 끊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불신한 것입니다.(시31:15) 5)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불신하는 것입니다.(요14:1) 6) 자살은 삶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반역하는 것입니다.(고후12:8,9) 그러므로 인간이 최종적으로 선택할 것은 자살이 아니라 회개입니다.(계3:19)
예수를 믿은 사람은 자살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주장은 이단일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자살방조죄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고 안 가고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결정(심판)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말하면 마귀입니다. 즉 자살도 같은 맥락에서 자기 자신을 살인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리는 동일한 살인의 범주에 들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자살은 금지되어 왔으며, 초대교회는 자살한 사람들은 교회의 매장지에 매장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살은 하나님을 향해 범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원칙적인 선에서 그러합니다. 성경에 언급된 자살의 경우는 항상 옳지 못한 경우를 언급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가령 사울과 가룟 유다 등의 자살에 대해서 성경은 비판적이지만, 삼손의 죽음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입니다. 이런 경우 자기 희생적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한복음 15:13절에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다 거룩한 가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보다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기 희생적인 죽음의 동기가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자신의 불행이나 고통 등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있을 때 가치 있는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제한함에 있어서 허용되는 경우들은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도 이 두 가지를 모두 허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정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부에 사람의 목숨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어떤 죄인들에 대해서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권한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또한 모세나 장로들에게 이런 일들이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지적합니다. 로마서 13장에서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셨으며,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과 동일하게 간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13:4절은 그 권세 즉 국가가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권세는 하나님의 대리로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칼을 합법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가지고 있는 칼의 기능은 두 가지 입니다. 먼저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단지 한 사람을 멸망시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이웃을 생각이나 말이나 외모나 몸짓으로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는 실제 행동으로 얕잡아보거나 모욕하거나 증오하거나 죽이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일에도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복수에 불타는 모든 마음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또한 내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성급하게 위기에 빠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정부가 무기를 갖추고 있는 까닭의 하나는 바로 살인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언급합니다. 정부가 칼을 가지고 있는 까닭은 보응에 기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막기 위한 동기라고 분명히 지적합니다. 이것이 정부가 가진 칼의 기능입니다. 합당하게 잘 사용된 칼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물론 칼이 어떤 개인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직 정부에게 주어진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성경의 원리를 따라 개인적인 보응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롬13:4에서 언급하듯이 정부도 헛되이 칼을 휘둘러서는 안됩니다. 정부의 악에 의해 칼이 휘둘러질 가능성 때문에 정부가 가지고 있는 사형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것은 시기적절하다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형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부의 검을 쓸 권세에는 전쟁의 영역도 포함됩니다. 성경은 단순히 평화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정부가 안으로 검을 쓸 권세를 가지고 있듯이 국가를 공격하는 적들에 대해서 합당하게 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주 제한적으로 전쟁의 합법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선 합법적인 정부의 합법적인 결정과, 합법적인 목적과 원인, 유익과 비용에 대한 고려, 시민과 군인에 대한 명확한 구분 등을 전제로 할 때 제한적으로 전쟁이 용인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부주의한 살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곧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곳에서의 삶이 이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 땅은 살인의 피로 얼룩질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의 현실에 맞는 규정을 주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지중에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나무를 베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동료를 죽게 만듭니다. 이때 그는 심각한 상황에 빠집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은 피의 복수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정식 재판에 회부되기도 전에 또 다른 살인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위기를 막고, 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도피성을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정말 의도하지 않았던 살인의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갑자기 뛰어나오는 사람을 피하지 못해 죽게 만든 운전자의 경우나,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실수에 의해 사람을 죽게 만든 간호사의 등이 제 6계명의 원칙에 따라서 처리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부주의했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우발적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가벼운 처벌을 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해서 “살인자”라는 칭호 또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현행법이 그렇게 하듯이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세상의 역사는 부주의한 살인의 경우는 도피성 제도를 두어서 살수 있는 길을 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더 확대시킨 살인의 개념을 정리해야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에 대해 교훈하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일은 분명 살인의 범주에 속합니다(요일3:15). 또한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것도 사람을 죽게 하는 것입니다(잠14:30). 자기 자신을 복수에 불타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6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까지 제 6계명이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깊은 동기까지도 보심으로 세상의 법률이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셨습니다. 6계명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생각하며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임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나아가서 나 자신과 이웃을 살인하지 않는 6계명의 보다 적극적인 순종은 단지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에 있음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묻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이웃을 사랑과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우정으로 대하며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살인죄에 이르게 되는 동기적, 중심적인 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의 법률은 범법하면 처벌하는 결과적인 것이지마는 그리스도인은 그 이전의 마음의 죄를 통회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주님께서는 범죄의 동기에 대하여 중요시하고 우리에게 교훈하십니다. 가령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에 손상을 끼치게 되는 경우가 어떤 것들입니까?
1. 지각없는 분노입니다. 분노는 혈관이 끓습니다. 살인의 동기는 대개가 분노에서부터 옵니다. 창세기 49 : 6에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1 : 20에도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쎄네카는 분노는 '즉각적인 정신 착란이다'고 하였습니다.
2. 시기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아버지에게 특별히 사랑 받는 것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7 : 20에 보면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잡아먹었다 하자" 요셉은 형제들은 살인을 모의하였습니다. 시기와 살인은 매우 가까운 친척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 5 : 21에 시기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을 육체의 일로 말하였습니다. 분노가 불길과 같다면 시기는 깊은 뿌리와 같습니다. 피를 보지 아니하고는 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잠언 27 : 4에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하였습니다.
3. 미움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미워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까지 떠나지 아니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미움은 마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해충과 같습니다. 구약 에스더서에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모르드개를 미워했고 모르드개와 그의 온 민족을 멸망시키려고 어인을 찍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직접 간접으로라도 살인을 범하는 일이 어떤 것들입니까? 17세기의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토마스 왓슨은 12가지를 들었습니다. (1) 손으로 하는 것. 사무엘하 20 : 10에 요압이 아브엘과 아마사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2) 마음으로 하는 것. 악의는 정신적인 살인입니다. 요한 1서 3 : 15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 다 살인하는 자니 (3) 혀로 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대한 편견을 말하는 것은 살인의 원인이 됩니다(요한복음 18 : 3 0). (4) 펜으로 하는 것.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것이 그 펜으로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를 치열한 전쟁터에 내 보내라 고 하였습니다. (5) 타인이 죽게 음모하는 것. 이세벨이 직접 자기 손으로 나봇을 죽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녀는 나봇을 죽이려고 책략해서 두 사람의 거짓 증인을 내세워서 고발했고, 결국 그 뜻대로 하였습니다(열 왕기상 21 : 9 - 10). (6) 컵 속에 독약을 넣으므로 혹은 음식물에 인체에 해로운 것을 투입하는 것은 모두 살인에 속하는 일입니다. 요사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런 일이 많은 모양인데 이처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7) 법이 허락지 않는 요술과 마술입니다(신명기 18 : 10). (8) 살인을 기도하는 것. 예수님이 나셨을 때 헤롯이 동방박사에게 자기가 경배하러 가겠다고 알려 달라고 한 것. (9) 타인을 죽이는데 동의하는 것.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에 가 편에 투표를 넣은 것처럼(사도행전 22 : 20). (10) 내 권력으로 타인의 죽음을 저지하지 않는 것. 빌라도는 그리스도가 무죄함을 알았습니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권력자 빌라도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손을 씻었지만 그리스도의 피를 영원히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11) 무자비한 것도 살인입니다. (12) 범죄자를 법에 의해 처단하지 않는 것.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살인과 중심의 노여움, 결과적인 살인죄와 동기적인 미움의 죄를 같이 보셨습니다.
요1서 3장 15절에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느니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살인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이웃을 향한 성도의 사랑과 섬김이 회복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주님, 저희들을 도와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우리 마음이 온유함으로 가득차 분노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무조건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남을 불쌍히 여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은 살인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긍휼과 자비로 가득차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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