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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교회 ① (엡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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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좋은 교회 ①
성경본문 에베소서 2:19-22

설교내용

  좋은 교회는 우리의 소망이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는 것은 복입니다. 성도들은 좋은 교회를 만나고, 좋은 교회를 섬기고, 좋은 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다니기 편리하고 가깝고 건물이 좋고 시설이 좋은 교회, 교인이 많고 큰 교회, 갖가지 프로그램이 있는 그런 교회가 외형상으로 좋은 교회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교회를 좀 더 의미상으로 다가가면 그런 조건보다는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지도자가 있고, 좋은 교인이 있는 교회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 분명히 좋은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대학도 좋은 대학이라고 하면 좋은 교수가 있고, 좋은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좋은 교회는 좋은 지도자와 좋은 교인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많은 압박을 받고 있고, 제 나름대로 노력을 합니다. 나는 과연 좋은 지도자인가? 이것을 기도할 때마다 물어보고,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좋은 교인이라는 이 주제 안에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인이라는 말은 상당히 추상적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교인이라고 할 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좋은 교인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보다 앞서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좋은 믿음이라는 것도 추상적입니다. 좋은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에 잘 다니고, 예배를 잘 드리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이 좋은 믿음인가? 만족하지 않습니다. 좋은 믿음도 매우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믿음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오늘 설교를 통해 말씀하려고 합니다. 진정으로 좋은 믿음을 가진 좋은 교인이 되는 축복이 있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고,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이렇게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경은 66권인데 한 구절로 요약 한다면 마태복음 16장 16절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됨을 가르치고, 하나님 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좋은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믿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심을 믿는 것이 근본입니다. 주님은 나의 주이십니다. 우리 교회의 주이십니다. 역사의 주가 되십니다. 그 분은 주권자입니다. 그 분은 주인이십니다.

  아무도 초등학생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습니다. 제가 비행기를 종종 타는데 조종실에 들어가서 “제가 한번 비행기를 조종해 봅시다”라고 하면 조종관을 내어줄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 인생의 조종관은 예수 그리스도가 잡고 계셔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회장의 교회가 아닙니다. 당회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교회의 주가 되셔야 합니다. 그 분이 주인이십니다. 이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알고 그 분을 주인으로 대우하는 믿음, 예수가 주되시는 믿음,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는 그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은 무지합니다. 만용을 부립니다.

  욥이 고난에 빠졌을 때 친구들이 와서 “너는 범죄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변론을 걸었습니다. 욥은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할 죄가 없다”고 항변을 합니다. 그렇게 변론을 자꾸 하는 것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나타나셔서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욥아, 네가 아느냐? 내가 천지를 지을 때 네가 보았느냐? 나는 바다와 땅과 물고기와 채소와 인생을 지었느니라” 즉 내가 천지를 창조한 그 이치를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네가 할 수 있느냐? 나는 천지를 운행하고 있다, 만물을 다스리고 있다, 나는 참새 한 마리도 뱀 한 마리도 독수리 까지도 내가 가는 길을 알고 있다, 그들을 다스리고 있다,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욥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는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자입니다. 만물을 통치하는 분입니다. 그 분을 주로 모시는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가 되면 안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전도주일을 지켰습니다. 어느 성도가 전도했다고 자랑합니다. “목사님, 이번 전도운동 때 대어를 한 마리 낚았습니다.” “무슨 말이요?” “그랜저 타는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면 소형차 타는 사람은 피라미입니까? 교회는 보이는 가치가 기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 보이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여기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하나님은 이단집단에 가면 교주가 하나님 행세를 합니다. 그것이 보이는 하나님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으로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은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나의 생명과 나의 가정과 나의 가는 앞길을 주관하십니다.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합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가치가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 십일조 백만원 하는 교인 백 명을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성취되었다고 하면 1억원입니다. 그러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겠지요. 한 조건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좋은 기도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여, 푼돈이라도 좋으니 믿음으로 십일조 하는 교인 백 명을 주옵소서!” 이것이 더 큰일을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고 십일조 하는 그 사람이 귀하지 그저 외형상으로 드러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드러나 있는 형식을 가지고 논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깍듯이 모시고 섬길 줄 아는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여러분은 좋은 교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세워감

  두 번째는 오늘 본문 21,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안에서 서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용어는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합니다. “성전이 되어가고”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몸이 성전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모인 교회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사람은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주로 믿는 사람은 함께 모여서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야 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좋은 믿음은 하나님의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믿음입니다.

좋은 믿음은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지어져간다’ ‘함께 되어간다’ 이 말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저 교회 다니는 것으로 진보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가야 합니다. 함께 지어져 가야 합니다. ‘되어간다’ ‘지어져 간다’의 진행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좋은 믿음으로서 항상 지어져 가고, 되어가는 움직이는 믿음, 발전하는 믿음, 섬겨 가는 믿음, 교회를 세워가는 믿음, 이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믿음은 교회론을 떠나서 논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함께 지어져 가는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함께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이뤄 가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우리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혈연입니다. 좋은 교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주되심을 믿는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의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사명의 회복, 이 두 가지가 이뤄질 때 좋은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좋은 교인이 모여서 좋은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입니다. 우리는 양입니다. 목사도 목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목자이면서 목장주인이십니다. 양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목자이기는 해도 목장에 고용된 청지기이지 양을 위해서 관리하는 사람이지 양의 주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목사의 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양입니다. 목사는 교인을 자기 양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사의 역할입니다.

  양에 대해 알아봅시다. 왜냐하면 좋은 믿음은 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양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양은 항상 목자와 연관하여 설명됩니다. 양에 대한 설명이 많이 있습니다. 양은 이런 성질을 가진 짐승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적용하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첫째, 양은 참 무지합니다. 어느 정도 무지한가? 어리석을 정도로 무지합니다. 양은 길을 잃으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개는 길을 찾아옵니다. 연어도 고향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못 찾아옵니다. 양은 자기 앞에 가는 양을 따라갑니다. 요령을 피울 줄 모릅니다. 앞의 양이 낭떨어지에 떨어지면 함께 떨어집니다. 그 정도로 무지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이 눈앞에 펼쳐 있는데도 그것을 우리가 볼 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그것을 못 보는 양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한없이 무지한 이것이 양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양은 재주가 없습니다. 호랑이도, 사자도, 코끼리도 다 서커스단에서 재주를 넘지만 양이 재주넘는 일은 역사이래로 없습니다. 여러분, 재주 부리는 양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인간의 요령과 재주를 거둬내야 합니다. 그래야 양이 됩니다. 양은 재주를 부릴 지혜가 없습니다. 뒤집어져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은 매우 더러운 동물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가서 베두윈 천막에서 양 구경을 하면서 제일 실망을 했습니다. 저는 양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지 오래입니다. 그림속의 양은 얼마나 깨끗하고 뽀얗고 탐스럽습니까? 옆에서 보니 그렇게 더러운 짐승이 없습니다. 씻을 줄 모릅니다. 악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더럽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런 더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바랍니다. 항상 깨끗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없이 더럽습니다. 그리고 양은 공격형 무기가 없습니다. 뿔 가지고 받을 줄도 모르고, 발톱가지고 할퀼  줄도 모르고, 이빨 가지고 물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끼리는 싸움을 자주합니다. 양 싸움 할 때는 머리를 맞대고 합니다. 밀었다가 당겼다가 말리는 양도 없습니다. 한번 싸우면 길어진답니다. 밀다가 당기다가 하다보면 왜 미는지도 모른답니다. 여러분, 우리 교인들이 가끔 마음 상하고 갈등할 때 보면 꼭 양이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한판 해버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오래갑니다. 교회 안에 시험이 일어나도 오래갑니다. 창칼 가지고 단판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시험이 너무 오래 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양 싸움 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양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 목자 음성은 알아듣습니다. 자기 목자 음성 외에는 어떤 짐승의 아름다운 소리도, 어떤 사람의 낯선 소리도 다 구별합니다. 자기 목자 음성의 휘파람 소리, 말소리를 그대로 알아듣고 따라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듣는 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구별합니다. 제가 사탄의 말을 전하면 여러분은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말을 하면 여러분은 구별합니다. 그 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양의 은사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습니다.
  그리고 양은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양입니다. 우리 성도가 왜 귀한지 아십니까? 우리 숨을 거두는 우리 생애를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끝낼 때 내 인생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서 끝내기 때문입니다. 양은 제물 중에 가장 제물답습니다. 양의 가치는 제물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양은 제물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치가 없습니다. 아벨이 드린 인류의 첫 제사도 양으로 드렸습니다. 왜 성도가 존귀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제물로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는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제물감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제물은 바쳐지는 것입니다. 제물 가운데 관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관제는 마지막 제사입니다. 모든 것을 다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러분, 남겨놓고 가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양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다 관제로 부어드리고 주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제물 되는 삶이 양의 삶입니다.

  양은 홀로 있을 때는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더럽고 싸울 줄도 모르는, 조그만 쥐 앞에서도 어쩔 줄 모르는 존재이지만 목자가 있을 때는 그렇게 당당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믿음은 목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믿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서 따라가는 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양이 가진 최고의 은사입니다. 미련한 양이지만 목자의 음성은 구별할 줄 안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최고의 은사입니다.

  목자의 도움을 구하는 믿음

  세 번째로 결론적인 믿음의 정의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기도하는 교인입니다.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길은 기도하는 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지만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생각을 주시고, 마음의 평안을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소리로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듣게 되고, 느낌으로 듣게 되고, 판단으로 느끼게 되고, 환경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 하나님의 도움이 이렇게 내게 역사하는구나’를 느껴야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믿음은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목자의 도움을 받는 양이 되어야 하는데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도움을 받는 가장 중요한 길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회수가 많은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처럼 하루 5번씩 기도씩 기도한다 해서 꼭 좋은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새벽만이라도 우리가 집중해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기도의 두 가지 형식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새벽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현실에서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날 하루의 기도를 놓칩니다. 새벽기도를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시편 116편 2절에 있는 말씀대로 다윗의 고백입니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새벽기도’ ‘평생기도’ 이 두 가지를 붙잡고 기도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울 보면 역사를 바꾼 중요한 사건은 전부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매우 상징적입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새벽기도에 심취하고 새벽을 통하여 기도할 때 오늘 우리들에게 절망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풀려나고 살아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새벽의 일입니다. 여러분, 홍해는 갈라져서 길이 났습니다. 요즘 길이 막힌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앞이 캄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길이 나야 합니다. 새벽을 통하여 길을 열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길이 열립니다. 여리고성은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무너져야 할 여리고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너무 나쁜 습관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무너져야 합니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는 인간의 장벽이 무너져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여리고가 무너지듯이 오늘 우리들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무너져야 할 장벽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있기 바랍니다.

  요즘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이 굉장히 인기입니다. 일본의 의사가 지은 책입니다. 이 책에는 성경적인 원리도 제법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 오늘 현대사회를 망가뜨리는 것이 야행성 문화입니다. 밤에 잠을 자지 않고 활동하고, 늦잠자고 하는 이런 것들이 건강도 해칩니다. 서울의 밤은 갈수록 밝아지고 있습니다. 밤 직종에 장사하는 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낭비적인, 소비적인, 나쁜 목적으로 야행성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잠을 자도 새벽 12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는 것보다 저녁 10시에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이 훨씬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아침은 어둠이 물러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새벽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의 어둠을 물리치는 은혜가 임하는 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 믿음으로 살려면 새벽기도를 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기도생활을 못합니다. 새벽기도를 안 하는 성도가 기도한다고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아침형 인간은 우리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율법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길이 막혔다고 절망만 하지 마십시오. 장벽이 있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새벽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역사, 부활의 역사, 길이 열리는 홍해의 역사, 장벽이 무너지는 여리고의 역사는 새벽기도를 하는 성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할지라도 좋은 믿음을 가진 좋은 교인들이 있는 한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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