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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얼마나 아프셨을까! (막 14: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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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막14:17-21
제목: 얼마나 아프셨을까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40일을 묵상하며 보내는 절기입니다. 특히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헌신과 결단의 삶을 다지는 기간입니다. 이미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생애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앞으로 주님의 수난과 관련된 말씀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수난과 함께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다지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당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고통받는 당사자가 아니면 어떤 사람도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종종 예수님은 고통에 있어서 우리와 뭔가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이신데 주님은 우리와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 즉 육체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벽한 인간이십니다. 예수님도 피곤하면 말씀을 제대로 하지 못하셨습니다. 아프시면 속에서부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고, 칼에 찔리면 어김없이 피가 쏟아지는 우리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의 성경저자는 이 부분을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라고 설명합니다. 여기 ‘한결같다’는 말이 곧 우리와 똑같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맛보셨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고통가운데 생을 마감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보내는 것이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육체의 아픔’일 것입니다.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지낼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뭔가 자극이 오고, 뒤틀리면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주님도 그 아픔을 몸소 체험하시다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의 고통은 탄생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원래 로마가 십자가형으로 죄수를 처형하려는 의도는 바로 고통을 주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6시간동안 예수님은 그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인간의 몸에 남아 있는 모든 수분을 다 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몸이 바짝 마르고, 마치 타 들어가는 것과 같은 아픔이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주님이 당하신 육체의 고통,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육체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육체보다 더 큰 아픔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편안하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육체의 아픔이라도 잘 견디는 것을 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은 육체도 컸지만, 사실 마음이 더욱 아프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마음의 고통은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아픔이 혹 있지 않습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아픔을 육체와 함께 맛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우선,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같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열렬히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갑자기 돌변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하고, 돌을 던지고, 심지어는 침을 뱉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예수님은 이미 배신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신은 예수님을 실망시킨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바뀔 수가 있단 말입니까?

  둘째,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이 에서 누구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습니다. 순간순간 주님을 위해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입니다. 위기감이 엄습해 올 때 그들은 한결같이 주님과 함께 죽으러가자고 소리쳤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기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배신을 합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무섭고, 칼이 겁나고, 죽음이 두려워, 주님께 대한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린 배신자들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셋째, 베드로는 더욱 주님을 아프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주님 없이 살수 없다고 누누이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거의 떠났습니다. 그것을 몹시 아쉬워하며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하게, 분명하게 믿음을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숨가쁜 현장에서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가히 주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주님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드로만큼은 아닐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배신합니다.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조그만 소녀 앞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합니다. 어째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속을 보시면서 당시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마지막으로 주님에게 비수를 꽂은 사람은 가룟유다 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보다도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입니다. 가룟유다에 대해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배경이 모든 다른 제자들이 북쪽출신이라는 것에 비교하여 남쪽 ‘가룟’이란 곳에서 출생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압제를 받는 이스라엘을 위해 마치 독립군처럼 활동했던 것이 그를 아는 배경의 전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주님의 열두 제자에 속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많은 제자가운데 예수님의 인정을 받아 재정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른 제자처럼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탁월함이 돋보여 귀한 직분까지 주었습니다.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유다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여느 제자와 같이 말이 앞선 사람이 아닙니다. 교만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성급하거나 거칠지도 않았습니다. 제자 중에서 외적인 조건으로만 보면 가장 나아 보이는 사람입니다. 잘 훈련받고 다듬어지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모든 사람이 가는 참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길을 걷지도 않았습니다. 상식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수준에도 못 미쳤고, 양심을 팔았습니다. 뒤에서 비수를 꽂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사람입니다. 인정과 사랑을 받았건만, 그 사랑을 배신으로 되돌렸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본문은 바로 유다의 배신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주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며 사람을 지목한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사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않아도 주님은 자기 길을 가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마치 유다가 주님을 팔아서 죽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계획대로 행하십니다. 그런데 유다가 지금 나쁜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유다를 향해 주님은 화를 선포하셨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주님의 입에서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가장 큰 죄인 중에 죄인이라도 주님은 품으셨습니다.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인간임을 주님은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유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당시 주님의 심정입니다. 얼마나 아프셨는지, 얼마나 실망했는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당하신 아픔입니다. 육체의 아픔보다 더 쓰리고 쓰린 아픔입니다. 주님을 몹시 실망시키고 근심시킨 아픔입니다. 인간 삶에 배신이라는 것은 정말 쓰린 상처요, 아픔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은 유독 인간 삶에 나타나는 배신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의 이야기에서 배신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가정과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바로 배신의 이야기입니다. 요셉도 한때 형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배신당하고, 여호수아도 사람에게 배신을 경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배신의 아픔을 처절하게 맛본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히도벨’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평생 동지, 평생 친구, 평생 동역자로서 늘 함께 했던 둘도 없는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비수를 꽂았습니다. 다윗이 그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다윗은 그 아픔을 시편에서 구구절절이 하나님께 기도로 토해 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윗을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던 배신은 아들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의 사건은 성경에서 배신의 아픔을 가장 크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지금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습니다. 모든 부모의 마음으로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내려앉고, 살 소망이 끊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그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 이후로 다윗은 말수가 적어졌습니다. 의욕도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없던 병까지도 생겼습니다. 아들의 배신, 이것보다 더 아픈 상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배신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아들과 딸처럼 그렇게 사랑하던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비수를 꽂았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이 등을 집니다.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냈지만 인간은 더욱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제는 사람을 만들려고, 참되고 바른 사람의 길을 걷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배신자인 인간을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앞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 주님을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란 말은 ‘나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이제 우리 삶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김이라..."
우리가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을 수 없고,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고, 주님과 사탄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을 하나님과 함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도 좋고 하나님도 좋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주인처럼 여기면, 하나님은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주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을 재물을 추구하는 것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그 재물을 얻기 위한 욕망으로 보았습니다. 결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영어로 하나님을 ‘God' 라고 하고, 재물을 상징하는 황금을 ’Gold' 라고 말합니다. 이 두 단어는 ‘L'만 차이가 있습니다. ’L'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이냐, 재물이냐가 왔다갔다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제 우리는 주님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나에게는 아직도 못된 마음이 있습니다. 늘 틈만 있으면 죄질 생각뿐입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언제나 거칠고,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종종 상처를 줍니다. 내 의지에서 발동되는 행동은 언제나 성급합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요, 천방지축(天方地軸) 입니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언제나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폭풍전야입니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릅니다. 이 모두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모습으로 얼마나 주님을 실망시키고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했습니까?

  사순절의 의미는 이제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주님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기간입니다.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실망과 근심으로 되돌리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계셨습니다. 누군가가 십자가에 주님을 묶고 못을 치고, 가차없이 주님을 향해 채칙을 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없이 자기를 때리는 그 사람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사람은 꿈에 너무도 안타까워 “안돼, 주님을 때리지 마세요, 주님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마세요” 라고 울면서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다가 때리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넋을 잃었습니다. 주님을 때리는 사람은 바로 자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이제까지 주님을 실망시키고, 아프게 하고, 배신한 것이 자기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를 생각하며 주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배신이 가장 아픈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주님을 배반하지 맙시다.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결코 실망시키지 맙시다. 오늘도 주님 앞에서 바르고 참된 삶을 결단하시고, 아름다운 삶을 향해 힘있게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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