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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람된 삶을 향하여 (전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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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된 삶을 향하여
전도서 2:1-10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이며 그분이 우리의 깊은 욕구를 어떻게 채워주시는 분인지를 열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다섯 번에 걸쳐서 우리는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오늘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보람된 삶을 향하여”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삶이란 쾌락을 추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말씀드리므로 주님을 영접하고 믿고 따르기로 한 분들을 일차적으로 도우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쾌락으로 채워도 여러분의 인생은 공허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쾌락을 맛보아도 삶은 아무런 행복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쾌락이란 행복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쾌락이 다 나쁘다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즐거움을 주는 레저 활동들은 다 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여름이면 레프팅도 즐기고 싶고 겨울이 오면 눈썰매도, 스키도 즐기고 싶어합니다. 다만 시간이 없을 뿐이고 이제는 조금 지혜가 늘어서 즐기더라도 칼럼에는 안 써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어찌 나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삶의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기피하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쾌락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적합한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가 즐기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다른 선물처럼 쾌락도 오용 될 수 있습니다. 잘못 추구하면 매우 파괴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대상을 달리합니다.

애기일 때 쾌락을 주는 것하고 어른이 되어서 쾌락을 얻는 것은 다릅니다. 갓난 애기들은 보송보송한 기저귀 입고 엄마 품에 안겨서 배고플 때 젖 먹을 수 있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자라면 자랄수록 쾌락을 얻는 대상도 커집니다. 조금 자라서 걷고 뛸 수 있으면 요즘 아이들은 바퀴달린 신발을 가지고 싶어 하더라구요.

새 스케이트보드에다가 슈퍼맨 옷까지 입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 노인이 되면 욕구가 틀림없이 변할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욕구가 달라집니다. 요즈음 저는 모처럼 집에서 보내는 금요일 저녁에는 아내가 준비해 주는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주일 준비를 하는 것이 잔잔한 기쁨의 하나입니다.

물론 환경만 허락한다면 남태평양의 야자수 그늘아래서 해먹에 누워서 읽고 싶은 책을 보면서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즐기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난 자매는 그렇게 고백을 하던데요. “안정에는 결혼이 최곤데요, 결혼을 하고 나서 맛보는 즐거움은 밤에 헤어지지 않아서 좋아요”

그런가 하면 은퇴를 한 분들은 그렇게도 말합니다.“더 이상 자명종 소리에 억지로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참 좋습니다.”아마 그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요즘 유행하는 새벽형 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새벽형 사람들은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는 게 아니고 그 시간이 되면 그냥 일어나진다고 합니다.

한달에 두세 번 정도만 자명종 소리를 의지한다고 해요. 안 듣고도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다가 요새 새벽바람이 좀 불어서 그렇죠, 또 어떤 사람은 일찍 못 일어나는 사람이 너무 바람이 세게 부니깐 사흘 동안 남편 따라서 일찍 일어나다가 나흘째는 드러누웠다고 합니다.

유행에 민감한 대한민국 백성들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시면 기질적으로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쉽게 일어나고 또 일어나면 정신이 맑습니다. 그런데 올빼미형의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고 작심해 봐도 사흘가면 잘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아침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릴 때는 피하세요.

여러분의 상황에 맞추어 하는 게 훨씬 승산이 있는 것 같아요. 하여간 그 연세에 은퇴하면서 자명종 소리에 이제 일어나지 않아서 참 좋다고 말씀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즐기려고 들면 추운 겨울날 부엌에서 주전자 물 끓은 소리도, 오뉴월 감나무 잎새에 듣는 빗방울 소리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생을 즐기는 것을 시샘하는 분이 아니시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베푸신 것을 누리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까 예배드리면서 찬송 부르는데 앞에 있는 꽃을 쳐다보니 그냥 눈물이 울컥 날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쳐다볼 여가도 없이 살아가니깐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비록 실낙원의 인생길에도 즐기려들면 하나님께서 남기두신 선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쾌락만 추구하면 우리의 삶은 공허해 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쾌락이라도 거기만 매어달리면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돈만 있으면 즐길 것이 즐비해 보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줄기차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어떤 값을 치루고 서라도 쾌락을 추구하라고 말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도 쾌락을 추구하라고 소리칩니다. 세상의 소리는 끊이질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세상이 다 한 목소리로 합창을 해도 성도들은 과연 그러한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들어보아야 합니다. 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하여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오늘 “보람된 삶을 향하여”라는 제목 아래 먼저 단순한 쾌락과 참된 행복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먼저 어떻게 하면 진정한 행복을 우리가 얻을 수 있을까요?

1. 첫 째로 일시적인 쾌락과 지속적인 행복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같다고 착각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 두 가지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4-25)

모세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낸 지도자입니다. 흥미롭게도 모세는 애굽 임금 바로의 궁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고 왕자로서 모든 혜택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허나 지금 바로를 거슬려 그 백성 히브리 사람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려 합니다.

방금 인용한 구절을 한 번 더 살펴봅시다. “믿음으로”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 믿음이란 여러분의 전 생애를 예수님께 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전 생애에 걸쳐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영원을 그 분께 거는 것입니다. 그가 약속대로 여러분을 하늘나라에 인도하실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그 분께 인생 전부를 걸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지은 적이 없는 완벽하신 분께서 우리 때문에 죽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오늘도 그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새 힘을 공급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새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선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 의미와 목적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바로 믿음으로 사는 풍성한 삶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께 여러분의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 전부를 걸고 살았습니다. 무엇을 순종했기에 하나님은 모세의 그 믿음을 귀히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4-25)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여러분이 눈여겨 봐야할 구절은 “잠시 낙을 누린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죄악에도 낙을 누리는 요소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수준에 죄를 짓는데도 순간적인 쾌락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근심하고 탄식하고 염려하고 한숨쉬고 절망하고 소리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도 일말의 쾌락은 있다니까요.

순간적이지만 즐거움도 있습니다. 2천년 전에 가출소년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이 있을 때는 즐거웠습니다. 들어가는 업소마다 황태자 대우를 해줬습니다. 술집이든 카바레든 자기를 위해서 최선의 서비스를 해 주려는 예쁜 여자들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소위 어깨들도 수행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집 떠나니깐 참 시원하고 좋다는 기분이 들었을지 모르죠. 아마 그 순간 그 순간에 인터뷰를 했다면 “야, 집 떠나기로 한 것은 정말 멋진 선택이었어요. 나는 지금 만족합니다. 온갖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하고 살 때는 이런 삶은 꿈도 못 꾸었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돈이 떨어지자 친구들도 떠나갔고 쾌락도 끝났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그때는 무료 급식소도 없었나 봐요. 밤이 되어도 잘 때가 없으니깐 노숙하게 됩니다. 행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모든 즐거움이 다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이 가져다 준 쾌락이란 돈과 함께 사라집니다. 이 가출소년은 버림받고 비참해졌습니다. 삶의 모든 꿈이 깨어졌습니다. 결코 그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거기에 귀착하고 만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부끄럽고도 고통스러운 삶을 어떤 값을 치루고 라도 피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종말이 끝장이 찾아 왔고 처절했습니다. 

한때의 쾌락은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이 두 가지 목표를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 얻고 싶었으나 갑자기 종말이 왔고 고통으로 삶을 몰고 갔습니다. 성경에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친구의 좌우명은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겁니다. 그는 부지런히 살다가 뜬금없이 어느 날 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깐 엄청 많은 것을 가지고 있거든요. 올해 농사되는 것 보니까 어디에다 저장을 해야 할지 걱정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큰 창고하나 짓고 나서는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자고 그렇게 좌우명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영혼을 찾아 가버렸어요. 그래서 그 사람 얘기 나올 때 마다 “어리석은 부자”라고 사람들이 부르잖아요. 어리석은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 어떻게 그 부자 혼자만의 얘기일까요.

죄를 짓는 것은 마치 카드 긁는 것과 같습니다. 긁어서 물건을 살 때는 꽤 재미가 있습니다. 애인을 위해서 이것저것 쇼핑백에 담아 보면 기분이 괜찮잖아요? 돈을 지불하는 것도 아닌데. 사인만 해 주면 되고 많은 사람들이 90도 각도로 절을 하면서 잘 가시라고 인사도 해 주고.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달 딱 지나면 연락이 오는 것입니다. 돈 내라고. 그러고 또 한달이 지나면 돈 내라고 연락이 또 와요. 그렇게 또 한달이 지나면 또 와요. 저도 한 카드회사에서 너무 권해서 차 기름 넣고 하면 적립된다고 해서 카드 한 개를 발급 받았어요.

그런데 그 카드는 자동이체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모르고 있다가  연체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오게 되었어요. 하루에 한번씩 전화가 오는데 너무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왜 카드 빚으로 인해 자살을 하는지 조금, 아주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물건을 사서 애인에게 선물하는 것은 순간적이고 그 값을 치르는 것은 월례행사가 되고 말면, 그것도 돈 있을 때 얘기지 자동이체로 빠져 나가면 문제가 안 되지만 돈은 없는데 계속해서 날라들면 엄청 힘드는게 되고 맙니다.

성경은 결코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잠시 낙은 있다는 겁니다. 카드 긁어서 산 물건을 모든 사람들이 다 바라 보는 가운데 쇼핑백에 넣어 가지고 올 때는 기분이 아주 괜찮습니다. 문제는 그게 오래 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뭐 꼭 나쁜 것이 아니더라도 그런 게 있죠. 배가 고플 때 집에 들어갔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따뜻한 식탁이 준비되어 있으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또 피곤에 지쳐 있는데 목욕하고 깨끗한 잠자리에 누울 수 있다면 잠이 꿀맛입니다. 요란한 불빛 속에서 만나는 여자들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그 분의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죄악 된 쾌락은 후회를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삶의 초점을 쾌락에 맞추면 “향락에 빠져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다(딤전 5:6, 표준새번역)”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여기 저기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향락에 빠져있는 과부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기고 그런 사람들을 뒷바라지 한다고 교회가 헌금 쓸 것은 없다고 디모데에게 그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삶의 초점을 쾌락에 맞추면 인생이 점점 더 공허해요. 무대에 서서 한 곡 딱 불렀는데 곡이 끝나자 말자 온 사람들이 열광하는 박수를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마약과 같이 그 매력에 이끌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데요. 자기가 난리 통에 경무국장인지 경찰서장인지 한번 딱 했는데 사람들이 자기가 가면 모두 거수경례를 하는데 그 맛이 아주 묘하더라고.

환호하는 군중들 때문에 정치계에 한번 발을 디디면 발을 못 뺀다고 하지요. 그러나 거기에 답을 찾으려고 하면 얼마 안가서 식상하고 마는 겁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느냐 하고 여러분이 누구냐 하는 것은 관계가 없습니다.

2. 여러분이 무엇을 하느냐와 여러분이 누구냐 하는 것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두 번째 명제입니다. 쾌락을 무엇을 하느냐에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여러분이 누구냐, Who are You? 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무엇을 하느냐?” 것보다 중요하거든요. 저도 강도사에서 목사 되어 봤는데 하나도 달라지는 게 없더라고요. 150-160명 모이는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2천명 넘는 교회에서 설교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더라고요. 다만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절 다르게 쳐다볼지는 모르지만요.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바꿔놓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 시대에 아주 유명한 솔로몬왕은 너무 유명해서 교회 처음 나오는 사람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읽은 본문, 전도서라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쾌락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온갖 일들을 했습니다. 왕궁을 짓고 도시와 공원을 건설하고 여러 곳에 포도원도 만들어 보았습니다. 정원과 과수원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과일나무도 심어 보았습니다. 나무들이 자라나는 숲에 물을 대려고 여러 곳에 저수지도 만들어 보았습니다.

수없는 남여 종들을 사들이기도 하고, 집에서 씨종들을 태어나게도 하였습니다. 어누 누구도 일찍이 가져 본 적이 없을 만큼 많은 소와 양 같은 가축 떼를 가져 보았습니다. 은과 금, 임금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나라의 보물도 모아 보았으며, 남녀 가수들도 거느려 보았으며, 남자들이 좋아하는 처첩도 많이 거느려 보았습니다.

일찍 예루살렘에 살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음에 원하던 것을 다 얻었습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는 일마다 다 자랑스러워했고 수고하여 얻은 몫이라고, 당연히 자기가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인생을 다 살고 나서 뒤에 이 책을 쓸 때 쯤 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깐 “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전2:11, 표준새번역)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잘 살펴보니까 자신이 애써 이룩한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연기를 붙들려는 것처럼 다 무익한 것이었다고 고백할 뿐입니다. 솔로몬은 하는 일에서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Business에서 만족을 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사고팔고 여행하고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하는데서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는 깊은 행복이나 지속적인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처음 떠나는 여행은 기쁘지만 며칠 여행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때요? 동서남북 다 봐도 내 집만큼 좋은 데는 없구나 하고 생각하죠.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상대적인 빈곤감에 시달리며 무슨 전자오락 하듯이 부를 추구하는 대열에서 벗어나서 평범한 삶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회복하십시오. 왜 우리는 조용히 쉬질 못합니까?

요즘 뉴스를 보면 <떳다! 방>있는 곳에 <묻지 마> 투자가 따라가고 하는 것을 보면 다 돈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 것 안 해도 다 살수 있는 사람들인데 그럽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여러분은 비껴 서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그냥 평범한 삶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회복해 보십시오. 왜 우리는 조용히 쉬지를 못하죠.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차라도 한잔 마시는 여유가 없습니까? 한가한 주일 오후의 휴식을 즐기지 못합니까? 일에 중독 된 사람처럼 바쁘게 오가며 살아갑니까? 집짓고 돈벌고 재물 모우는 일에 정신을 다 빼앗기고 삽니까?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즐기질 못하는 젊은 시절의 솔로몬 같아요. 우리는 그 만큼 머리도 안 좋으면서 말이죠.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외적인 세계를 건설하는데 모든 것을 소진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도 많습니다. 다만 내적인 황폐한 세상을 가꾸는 노력을 너무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닐까요?

다시 한번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전2:11, 표준새번역)

늙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아직도 즐길만한 젊음이 남아 있고 세월이 있을 때에 생각을 한번 바꿔 보십시오.


3. 여러분의 상황과 여러분의 성품은 서로 관계가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마지막 명제입니다. 쾌락은 상황이 좋을 때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여러분의 성품이 올바르다면 언제나 동행합니다.

“만약 . . . 하다면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금 이 상태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상황이 바뀌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번에 복권만 당첨되면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신자들은 복권을 사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복권이 당첨이 되면 행복이 확 찾아오는 줄 압니까?

아니오. 그 다음부터는 걸려오는 전화마다 두려운 겁니다. 옛날처럼 친구가 찾아와도 옛날 친구처럼 친구가 안 되는 거예요. 심지어는 자식들이 와도 ‘이 녀석이 명절이 아닌데 왜 찾아왔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모든 사람들이 자기 돈을 빼앗아 가려는 사람들로 보이니깐 갑자기 불행해 지는 것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행복하지 않는 사람이 일만 터진다고 행복해 질 거라는 것은 보장 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행복은 결코 배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결코 상황이 바뀌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제 아침에 어떤 목사님이 자기 처남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해요. 연봉 1억을 받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요즘 촛불 시위 함께 하고 있대요.

1억을 받고도 만족을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데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이 될 것인지 자기는 굉장히 겁난다고 그러더라고요. 진정한 행복은 결코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에서 발견하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에게 열광하고 환호하면 그 사람으로부터 실망할 것은 결혼해 봤으면 다 아는 겁니다.

그 여자만, 그 남자만 있으면 행복할 것처럼 결혼 서약할 때 누구나 생각했지만 대체로 보면 우리의 평범한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은 바로 그 여자, 그 남자 때문이라고요. 국회의원이건 대통령이건 그 사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투표는 빠지지 말고 하십시다마는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그 중에서 나은 사람이 누굴까? 하고 뽑는 것이지 4년,5년에 한번씩 수없이 속아 왔는데 뭘 이번에 또 기대를 걸려고 합니까?  임시 공휴일 했으니깐 일찍 투표하고 바람이나 쐴 수 있으면 평범한 시민들이 누리는 축복이라고 생각하죠.

이미 우리가 살핀 대로 쾌락은 일시적이란 것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면 어디서 끝이 날까요? 언제 궁극적인 만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물레방아처럼 돌기만 하지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 살짜리 아이 눈에는 언니처럼 자전거를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바라봅니다.

그러나 언니는 오빠들처럼 인라인스케이트를 가졌으면 합니다. 그 오빠는 만족할까요? 아닙니다. “나도 언제나 내 차를 가질 수 있을까?”라고 부러워합니다. 차만 있으면 행복할까요? 운전하는 청년은 길가는 연인들을 바라보면서 “언제 나도 저렇게 애인과 함께 데이트를 할까?”라고 부러워합니다. 데이트를 하면 만족이 됩니까? “우린 언제나 결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소원합니다.

결혼하면 모든 소원이 사라집니까? “우린 언제쯤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라고 기대합니다. 아이만 태어난다고 행복도 태어납니까?  그 태어나는 아이가 크면 한번 물어 보세요. “너, 행복하니?” 하고 물어 보면 그 아이도 역시 또 언니들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바라 볼 겁니다. 물레방아 바퀴처럼 다른 것을 바라면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욕망이란 이름의 궤도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우린 너무 바깥을 바라보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바깥세상이 달라지면 행복할 것처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 세계에 관심을 가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을 우리의 얼굴보다 중시합니다. 얼짱에 혼이 나가는 하나님은 아니시라니깐요.

하나님은 속사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속사람은 때때로 환경이 어떠해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우리의 환경이 나빠져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첫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잘못된 행복관을 바꿔 주셨습니다.

진정으로 복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얼을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그 마음에 평화가 깃든 사람입니다. 주님이 복이 있도다 하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무도 외적인 환경 때문에 복이 있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형편이 최악으로 치달아도 사라지지 않는 기쁨을 가집니다. 여러분, 하박국의 고백을 들어보셨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되면 그 기쁨은, 그 즐거움은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내적인 것과 관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 많이 가졌든지, 아니면 별로 가진 게 없든지, 아니면 다 털어 먹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보람된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합니다.

그 분이 찾아오시면 기쁨이 깃들게 되어 있습니다. 무척이나 많은 것을 찾아서 숨 가쁘게 달리다가 지금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은 없습니까? 거기에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바라던 것을 붙잡아 봐도 공허함 만이 자리합니다. 강아지가 자동차를 뒤쫓는다고 승산이 있겠어요. 혹 자동차가 다른 일로 브레이크를 밟고 세웠다고 해서, 강아지가 자동차를 붙잡았다고 해서, 앞질렀다고 해서 강아지의 기쁨이 있습니까?

가지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부추기는 세상에 속지 마십시오. 9만원하는 신발 3만원에 사면 행복할 것이라고 달려드는 대열에 우리 울산교회 성도들은 참여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세상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한번 장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안 됩니까? 여러분, 신발 없습니까? 여러분의 남편들이 신발 안 사줬습니까?

지금 신은 신발이 있는데도 뭐 그렇게 큐티도 안 해 놓고 달려갑니까? 제 신발 한번 보세요. 양쪽이 다 닳아서 보는 사람마다 불쌍히 여긴다는 소문이 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행복합니다. 지구가 둥그니깐 신발 좀 닳는데 그것 가지고 신경 쓸게 있는가? 제가 시간만 있으면 옥재부 목사님 교회 앞에 가면 뒤축 갈아주는 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안 사용하는 물품을 바자회에 내어 놓는 것도 착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럴 때 좀 어디서 싸게 판다 해도 꼭 필요한 게 없으면 갈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보다 정말 어려운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도록 한번 배려해 보지 않으렵니까?

열심히 찾아서 헤매어도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꿈이 야무집니다. 멋진 식사도 하고 싶고 날씬한 몸매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어떻게 둘 다 얻으려고 합니까? 그냥 40대,50대 아줌마 되었는데 좀 몸집 있으면 어때요? 비행기 탈 때 요금 더 내라고 합니까? 그렇다고 남편이 여러분 싫다고 합니까?

남편 보는 앞에서 다이어트 한다고 적게 먹는 여자들 보면 남편 재워 놓고 부엌에 또 들어가더라고요. 사람들은 자기가 뭐든지 다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봐요. 그래서 직장에서도 잘 나가야 되고 아이들도 똑똑하고 휴가를 가도 해외로 멋지게 떠나야 하고 좋은 친구들도 가지고 행복한 결혼생활도 누리고 아름다운 집도 있어야 되고 하다 못해서 머리숱도 좀 많았으면 기대하고 이빨도 눈처럼 희기를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가진 것으로도, 이룬 것으로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속적인 내적인 행복과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거기가 바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보람된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먼저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만나야 하는 분을 만나야 여러분의 삶은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만 여러분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과 십리나 떨어져 인생을 살면서 결코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고 생각하는 것은 신기루를 쫓는 것입니다. 내적인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때에 행복은 찾아오는 겁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져도, 심지어 마약을 해도 물론 일시적인 쾌락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본 정신으로 돌아오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찾아오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양심이라고 하는 저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쫓아 정신없이 달려갈 때는 이것저것 생각지 않지만 일들이 끝났을 때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됩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 외에 관계를 가지게 되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양심을 주셨어요. 언젠가는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답하게 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직관적으로.

그래서 시인은 참된 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복되어라! 지은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 사람! 주께서 그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은 복되고 복되다!” 진정한 복은 지은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는 겁니다.

잘잘못을 더 이상 하나님께서 채근치 않으십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고, 정결한 것을 사모하며, 깨끗한 것을 추구함으로 거룩한 것을 사모하고 덕이 있는 것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십시오.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내 허물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께서는 나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셀라)”(32:1-5, 표준새번역)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보람된 삶을 살고 싶습니까?

두 번째는,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서 살아가십시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믿는 진리인 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의심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벌을 주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때리는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사랑의 매를 든다고 하는데 맞는 자녀들은 99%가 그것을 믿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생각이 다 옳은 게 아니라니깐요. “뜨거운 주전자는 만지면 안돼” “길 건널 때는 양쪽을 모두 살펴야 해”의 훈육은 잘못된 태도를 교정하고 나쁜 습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가르치지 않으면 살면서 고생합니다. 훈육은 교정과 보호를 위해서 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말했죠. 달라고 하는데 안 준다고 울거든 가르쳐 주라니깐요. 인생에 살다보면 얻고 싶은 것을 다 얻지 못할 때도 있다고 가르쳐 주세요. 저는 세살난 손녀에게 그렇게 가르칩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5:17)

하나님이 설정하신 경계 안에 살게 되면 많은 불행을 미리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절대적인 옳은 것과 나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집착할 기준을 철폐합니다.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부추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침판이 없으면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이 없으면 우리는 바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복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교회당에 나오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이 복이 있고 듣는 것을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지혜의 책, 잠언 8장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8:34)

아니면 시편을 찾아보십시오. 데이트할 때 기다리고 있는 심정으로, 애인 기다리듯이 그렇게 지혜를 찾으라는 겁니다. 시편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법 지키는 것은 나의 큰 기쁨, 주님의 법 따르는 지름길을 가게 하소서.”(시119:35)

예수님은 새롭게 출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이웃의 재물을 갈취하던 사람이 자기 재산의 반을 내어놓는 사람이 됩니다. 갈취한 것은 네 배나 값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삶이 변합니다. 우물가 여인의 삶도 변했고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삶도 새로워졌습니다. 간음하던 현장에서 잡혀 왔던 그 여자의 삶도 바뀌었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의 말이 그의 삶의 지표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맺습니다. 보람된 새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일시적인 쾌락과 지속적인 행복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무엇을 하느냐와 여러분이 누구냐 하는 것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진정한 행복은 여러분의 상황에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성품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복된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면의지속적인 행복과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주님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 보세요.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 그 어떤 것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창조주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는 절대 세상에서 그 어떤 것을 다 소유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분이 말씀하시는 법도를 따라서 걸어갈 때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차라리 옛날에 몰랐을 때가 더 편해요. 주님을 만나고 난 사람들은 이제는 주님 뜻 행하는 것이 나의 기쁨입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여러분은 제대로 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보람된 삶, 거기에는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보람된 삶, 거기에는 언제나 기도가 뒤따릅니다. 보람된 삶, 거기에는 범사에 감사가 뒤따르는 삶입니다. 이 복된 삶에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오늘 초대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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