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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낙원에 있으리라(가상칠언 2) / 눅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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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3:43 낙원에 있으리라(가상칠언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사람들은 내세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답을 다른 종교나 철학 과학에서는 제대로 주지 못합니다.

논어 선진 편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께서 살아 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질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 하시었다.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묻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계로 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감문사 왈미지생 언지사-季路 問事鬼神한대 子曰 未能事人이면 焉能事鬼리오.敢問死하나이다. 曰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한용운님의 알수 없어요 라는 시도 불교의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철학자 쇼펜아워는 공원 밴취에 앉아 인생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가에 대하여 골몰히 생각하다가 공원 관리인이 누구며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하자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여기에 앉아 있지를 않지 하고 어둠 속으로 살아졌다 합니다.

과학도 우주의 비밀 인생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이라 하여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낙원(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했습니다(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8)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 51:3)한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입니다(I. H. Marshall).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눅16:22)한 말씀에 나사로가 들어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을 낙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2)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4) 한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이 낙원입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하신 부활 이후 영원히 복을 누릴 천국이 낙원입니다.

  낙원은 행복과 안식의 것입니다.

전통적인 관념은 낙원은 의로운 자들이 기업을 받아 찬미 부르는 행복한 곳으로 밝혔으며 초대 교부들도 모든 고난의 요소가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르쳤습니다.


낙원은 기쁨의 곳입니다.
낙원은 밤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3)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5)

낙원은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낙원은 완전한 곳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계 21:16)

스다디온 올림픽 스타디움의 단위로 가로 세로 185미터 크기의 면적을 말합니다.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1500마일(2,200km)입니다. 484만 평방 킬로입니다. 우리나라 남북이 22만 평방 킬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면적 22배입니다. 장광고가 다 같습니다. 이는 완전한 세계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곳이 우리가 들어가 살 곳은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낙원에서 주님은 강도에게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두 번째 말씀은 한 강도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혼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흉악한 두 강도와 함께 달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욕보이기 위해 강도와 함께 매달았습니다. 강도들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자기들의 뜻대로 남의 것으로 참으로 호화스럽게 살아온 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들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강도와 같이 죄악 가운데 살며 마지막 까지 자기를 고집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인생의 한 면이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생의 종말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1)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마 25:32)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3)하시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고 합니다. 이는 지옥의 형벌을 말합니다.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4)고 합니다. 이는 천국의 복락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1. 오늘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을 먼 장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말씀은 이 말씀을 하는 바로 그날 그 시간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눅23:40) 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사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라는 히의가 있습니다. 그보다도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간 수양을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을까?라고말하기도 합니다.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범률상의 죄로만 알 뿐이요, 그것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줄로 압니다. 기도를 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니..."하나,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지적합니다. 구원은 자신이 죄인음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된 오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0)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죄를 짓든 그가 예수님의 의를 보고서 하나님 두려운 줄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의 오늘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 곧 두려워함이 지식의 근본이요 축복의 원천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죄 값이 당연함을 깨달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눅 23:41) 
죄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기자 자신의 죄값이 당연한 것으로 깨닫고 죄 값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아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를 발견한 오늘입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의를 발견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부인한 레난(Renan)은 예수는 어느 방면으로 보던지 독특하다 했습니다.

로메인씨는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지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도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숭배 한다고 했습니다.

밀(J.S. Mill)은 누가 예수님의 말씀과 그 생활을 생각해 낼 수 있으랴 이는 갈보리의 어부들은 못 할 것이요 바울도 못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스트라우스(Strause)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다 라고 했습니다.

괴테(Goethe)는 복음서는 참되다 그 이유는 거기서 예수님에게서 오는 도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메튜 아놀드(Matthew Anold)는 예수님의 의로운 길 밖에 다른 더 좋은 것은 인류가 생각 해 낼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렉키(Lecky)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가 되시고 인류의 마음을 개조하는 독일무이한 분이다. 모든 철학자와 모든 도덕가들은 다 그 앞에서 빛을 잃는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죄하시고 의로우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낙원의 복을 누립십시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내세를 맡긴 오늘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 23:42)라고 합니다.
이는 육신의 생명이 떠난 후의 그의 존재가 계속 할 것을 믿은 것이요 내세를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고 자신을 맡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맡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 돌 맞아 죽을 자리에서 용서 받은 여인이 맡깁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 부름 받은 사울이 맡깁니다.
세리 삭개오가 맡깁니다.
우리도 맡기고 마지막 시간에 일하려간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최선을 다하며 낙원의 복락을 누립시다.


  2. 네가

1) 강도였던 네가

강도 인생은 매일 같이 주먹과 칼로 나의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이라 하면서 강도질을 하던 자입니다. 강도는 남의 것을 빼앗고 해하고 모함한 자의 표상이요 오늘 범죄 한 모든 인류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강도와 같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는 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강도 경제적인 강도 문화적인 강도 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어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하는 천국 백성이 된 줄 믿습니다.

  2) 변화된 네가

두 강도는 각기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한 강도는 너와 나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의 죄는 유보해 놓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살고 싶어 단순히 죽음을 면케 달려는 무리한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변화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변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됐습니다.

이 강도는 지금까지는 자기의 힘과 재주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변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하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그리스도의 왕 되심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에 대한 자세가 변화 되었습니다. 현실 만족을 위해 살았던 그가 내세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미 칼럼니스트 최효섭 목사는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항상 날씨가 청명하다. 그곳은 변덕 장이 들이 없기 때문이다. 천국은 전등불이 필요 없다. 모두가 빛이 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미료가 필요 없다. 모두가 소금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쟁과 싸움이 없으며 오직 칭찬과 사랑만 있다. 그곳은 폭탄선언이나 깜짝쇼가 없고 항상 평온하다. 천국의 사람들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감사의 기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천국행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는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 욕심쟁이, 남을 헐뜯는 사람, 거짓말쟁이, 화를 잘 내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화합을 깨뜨리는 사람은 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다” (천국 비자-인터넷정보클럽)

천국은 문턱이 매우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만’과 ‘거만’으로 치장한 사람은 천국의 낮은 문턱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겸손한 사람을 위해 예비된 아름다운 낙원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를 의지하고 천국 낙원에 들어가는 모두가 됩시다.


  3. 나와 함께

예수님은 죄인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속에 내주 하시어서 함께 동행 하시며 기도를 들어 주시며 슬픔 가운데서 위로 하시며 마침내 영광 가운데로 데려 가십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5)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말씀은 한 달 뿐이 아니라 일년이나 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3)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설립한 양로원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방문해서 노인들에게 양로원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방문객이 여왕이 한번이라도 이 양로원을 방문했느냐고 묻자 노인들은 가끔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방문객이 “그러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은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묻자 노인 한 분이 “아니, 예수님이 왜 오십니까? 예수님은 오시는 분이 아니고 처음부터 여기 계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처음부터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계시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성 버나드는 “예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 오신다든지 걸어오시는 것은 못 봤어도 예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는 항상 빈 의자를 곁에 놔두고 예수님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 약속 믿고 더욱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재림의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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