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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들 (눅 6: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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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12-16
제자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본다면 사람을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채권자형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녀들은, 부모는 나에게 당연히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낳았으니 먹이는 것이 당연하고, 공부시키는 것이 당연하고,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부모에게 그렇지 못할 바에야 왜 나를 낳아서 고생시키느냐?고 대드는 패륜아도 가끔 있습니다.

직장 생활하는데도 그렇습니다. 나의 수고에 대해 당연히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고마울 것도 기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수고에 비하면 내가 적게 받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이렇게 채권자의 자세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독립형입니다. 내가 치사하게 누구로부터 받을 것도 아니요, 또 귀챦게 줄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너요, 나는 나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마음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나하고 싶은대로 하는데, 왜 간섭이냐?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만만하지만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입니다.

셋째는 윤리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최선을 다 해 살면서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무감이 지나치면 마침내 자만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교만을 낳습니다. 남 위에 자리잡습니다. 사회가 어두운 까닭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면서 살아갑니다.

넷째는 채무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빚진 자로 살고 있다. 부모 형제나 스승으로부터, 또 많은 사람으로부터, 무엇보다 하나님께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은 다 남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내 것이란 없으며, 모두 남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들입니다. 이미 받은 것도 다 갚기에는 일생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저의 친구 하나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따고 명문 대학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참 힘든 귀한 자리입니다. 그 친구를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했습니다만, 이 친구가 어느 날 그 좋은 자리를 다 정리하고 귀국했습니다.

왜 그 좋은 조건을 다 버리고 귀국했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조국에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살았어. 그런데 그것을 갚지 않은 채 편안히 살자니 마음이 괴로워서 돌아왔지”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까? 무엇 하나, 처음부터 내 것인 것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소유하고 즐기는 모든 것은 다 부모님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심부름 잘하면 엄마가 칭찬도 해주고 용돈도 주곤 했습니다만, 조금 크니까 자기 수고에 대해 엄마가 보상을 안 해 줍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습니다. “엄마는 어째 내가 심부름해도 칭찬 안해줍니까? 내가 잘 한 일을 왜 알아주지 않습니까? 나는 몹시 섭섭합니다.”

편지를 받은 엄마는 답장을 썼습니다. “나도 너한테 섭섭한 것이 많구나. 내가 열 달 동안 너를 뱃속에서 키웠고, 낳아서는 젖먹여 키웠고, 학교 보내고 도시락 싸주느라고 애쓰지만, 너는 왜 나를 알아주지 않니? 나는 분명 이 모든 것을 공짜로 너에게 해주었다”

답장을 읽은 아이는 엄마 앞에서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더랍니다. 자,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채권자가 되어서,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빚진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주세요, 주세요, 복 내려 주세요, 축복해 주세요, 큰소리 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꼬? 성숙한 모습으로 빚진 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인은 두 가지의 신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값없이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품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사는 성숙한 신앙인들은, 받은바 은혜에 어찌 보답할꼬? 이 은혜의 빚을 어떻게 갚을꼬? 늘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으로 보답하자, 제자 됨의 길을 걷자 하고 결단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 어떤 신앙의 상태에 있습니까? 늘 하나님께 달라, 달라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받은바 은혜와 축복을 어찌 갚을까 노력하고 있습니까? 성숙한 신앙인은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제자 됨의 도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 보면, 예수님은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날이 밝자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 영광스런 이름이 성경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시고, 그 성품과 장점을 다 아셨으며, 그 개개인의 특성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12제자를 아신 예수님, 이 예수님은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아십니다. 이 자리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지만, 예수님은 결코 단체로 우리를 보시지 않습니다. 나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아십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이 세상에 아무리 잘난 아이들이 많아도, 우리 부모들은 그 가운데 있는 내 자식이 제일 귀합니다. 어디에 있어도 내 자녀를 찾아냅니다. 짐승들도 우리 보기에는 다 그 놈이 그놈인 것 같지만, 어미는 자기 자식을 틀림없이 기억한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마치 이 세상에는 나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나만이 가장 소중한 존재로 기억하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내 성격을 아시고, 내 눈물을 아시고, 내 기도 제목을 아십니다. 남몰래 흘리는 내 눈물을 아시고, 나만의 고민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하나하나 부르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 나를 아시고 나를 부르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12제자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이 많은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학벌이 화려한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권력가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부요, 세리요, 직업도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때론 재물도 필요합니다. 학식도 필요합니다. 사회적 위치도 때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인간의 조건을 구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입니다. 과거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자로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항상 우리 신앙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주님은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보잘 것 없어도, 나는 초라해도, 내 믿음은 형편없어도, 주님을 믿고 따르며 섬길 나의 미래, 나의 열심, 나의 변화된 모습을 예수님은 찾고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은혜가 있고, 나를 향한 격려가 있습니다.

셋째, 12제자들은 성격이나 직업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다양한 제각각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사교적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야망이 큰 젊은이였고, 빌립은 계산이 빨랐습니다. 바돌로매는 경건하고 조용한 성품이었고,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도마는 합리적이었고, 야고보는 별로 이름없는 제자였습니다. 셀롯인 시몬은 저항 운동가였습니다. 그리고는 출신도 알 수 없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가룟 사람 유다가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북부 갈릴리 출신입니다. 소위 상놈 출신입니다. 그런가 하면 배신자 가룟 유다는 남부 출신으로 예수님 일행의 헌금 보따리를 맡을 정도로 꽤나 똑똑한 제자였습니다. 

특별히 셀롯당은 당시 로마 정권으로부터 독립 운동을 하던 당입니다. 셀롯인 시몬과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세리 마태가 함께 제자가 되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만남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다 한 식구였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고, 예수님의 뜻을 함께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서로 성격이 다르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는 어려우나, 예수님을 서로 사랑할 때 서로가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귀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12 사람을 제자로 택하신 분명한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첫째 목적은 함께 있기 위함입니다. 이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전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복음을 전할 일군을 필요로 하시며 나를 부르고 계신 줄 믿습니다.

셋째 목적은 귀신을 내어 쫓고자 하심입니다. 오늘날에도 악령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때론 실패하기도 하고, 때론 넘어지고 배반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 제자들의 열정과 헌신의 삶으로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세상 만민이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주님의 12제자의 일생은 한 가지 공통점으로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교로 그들의 삶을 마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처형되었습니다. 안드레는 희랍의 받드라에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로마의 대박해 때에 끓은 가마솥에 던져 졌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 밧모섬에 추방되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살가죽을 벗기우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칼 맞아 죽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탑에서 던져졌으나 살아남자 톱으로 켜져서 죽었습니다. 다대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셀롯인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 열 두 제자의 고난과 순교와 그들이 흘린 피 때문에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12제자들의 헌신, 그 피 흘림, 그 순교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 세계에 퍼졌고, 드디어는 이 한국 땅에 살아가는 나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얼마나 제자 됨의 길을 걷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넘쳐흐르던 그 순교의 강물이, 이제 내게 와서 멈추어 버린 것은 아닌지요? 제자 됨의 길이 이제 내 앞에서 끊어져 버리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2제자는 모두 달랐습니다. 그러나 다 주님께는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한 가지 열정과 그들의 뜨거운 마음이 주님 앞에 바쳐 졌을 때에 주님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 나도 비록 보잘것없지만, 연약하지만, 내 삶이 주님 앞에 바쳐질 때에 나는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감격 속에서 사는 하루하루만이 영원을 붙잡는 삶인 것입니다.

12제자는 모두 순교했지만, 그들의 삶의 결과는 오늘 우리에게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내가 신앙을 받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에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제자들을 통해 주께서 나에게 참으로 값지게 살아가는 길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 나도 내 몫을 다하고 삶을 끝마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것이 96년도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 신앙인들의 다짐이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남선교회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남선교회 회원들을 들어 쓰시고자 우리를 부르셨고, 나를 믿어 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우리 모두 제자 됨의 길을 걸어가는 남선교회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이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나누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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