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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르라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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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4:18-22)

  민수기 23장 18절에 보면 발람선지가가 모압왕에게 한 말 중에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을 지어다"라는 말이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자세 들으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아하지나 아다이"라는 말인데 "나에게 귀를 달라"또는 "오직 내가 하는 말에만 신경을 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듣는 태도가 좋아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불신도 들음에서 생깁니다. 의심도 회의도 들음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좋은 믿음이 생길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도 여러분에게 이 시간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아지나 아다이" 저에게 여러분의 귀를 좀 빌려주십시오. 오직 하나님 말씀에만 신경을 쓰십시오" 왜냐하면 오늘 중요한 말씀을 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맨 처음에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고난당하실 때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부활하신 후 마지막에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요 21:19,22).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주님을 따라나선 생활인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인이란 어떤 회심이나 성령체험으로 일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님을 따름으로서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것입니다. 회심이나 성령체험은 기독교인으로 출생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출생하여 자라는 과정 속에서 결정적인 턴잉포인트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따르느냐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사사시대의 삼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기생 드릴라의 말을 따르다가 망했습니다(삿 14-16장). 물질을 좇아 발락왕을 따랐던 발람선지자는 나귀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바알신을 따르던 450명의 선지자들은 갈멜산에서 비참하게 몰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나섰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형통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양성서에도 보면 주님을 따라나섰던 이름없는 제자들이 2천년의 오랜 역사속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온 인류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위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주님을 따르는 삶은 "떠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서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창 12:1-). 모압 여인 룻은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죄악된 과거로부터 떠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떠날 때는 아쉽습니다. 새로운 시작은 늘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단절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그물을 버려두고 떠남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따른 일 바로 다음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베드로의 장모가 왜 열병이 났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딸 가진 부모의 입장으로서 베드로 장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느날 갑자기 낮도깨비에게 홀린듯 훌쩍 가정을 등지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낮선 청년의 꼬임에 넘어간 이 철닥선이 없는 사위란 작자가 얼마나 야속했겠습니까? 누구의 귀한 딸 자식인데 데려다가 호강시켜주지는 못할 망정 그 겉에라도 있어주어야 하는데 평생직업도 내 팽계치고 예수를 따라가버렸으니 장모께서 화병이 날 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화병은 열받는 병이요 성경은 그것을 열병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처자식 호강시켜 주는 것도 시원치 않을 판에 배가 고픈 예수쟁이가 되겠다니 얼마나 딱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니 자연 몸져 누울 수 밖에 더 달리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장모가 어떻게 되었지는지도 모르고 돌아다닌 베드로 였음이 분명합니다. 오죽하면 보다못해 다른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겠습니까? 그러나 그 장모는 예수를 접한 순간 모든 시름은 떠나가버린 줄로 믿습니다. 그분의 진리가 사랑이 그녀를 자유케 한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장모는 베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리고 베드로를 용서하게 되었고 화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를 도와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은 때때로 이렇게 사람을 얼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이 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자기 이익이나 명예나 육정이 빚어낸 멸망의 길을 따라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8)는 생명의 말씀, 그 구원의 길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을 하여 유익케 하시며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롬 8:28).

  우리는 가끔 언론을 통하여 철새들이 철을 잊어버리고 다른 철새들은 모두가 다 떠나갔는데 몇마리의 철새만이 남아 있어서 안타깝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강남으로 떠나야 할 철새들이 떠남의 결단을 자꾸 늦춘다면 결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추위 때문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영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도는 우리에게 믿으라고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 십자가 너도 나처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십자가의 도를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도가 아무리 쉽고 간편하고 좋을지라도 십자가를 지는 도를 외면하고 십자가를 지는 도를 버리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도만 가진 사람들은 자꾸 자신은 십자가를 안지려고 하고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까지 남에게 지우려고 하니 십자가가 자꾸많아지고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도는 내가 십자가를 짐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십자가를 지우지 않고 그리고 결국은 아무도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나 교회안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각각 자기 맡은 분량대로 역사하면 결코 일이 쌓여 있지 않습니다.그런데 자기 분량을 하지 않게되면 과적되게 되고 누군가는 그 과적된 일을 하다가 몸살이 나고 불평을 하게 되고 낙심을 하게되는 등 부작용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광교회 모든 성도들은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자신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의 가슴에 십자가를 꽂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자신의 가슴에 십자가를 꽂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최고의 대상은 그 어떤 인간이 아니라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뢰와 같은 야고보와 요한은 최초의 순교자로, 사랑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른 결과였습니다.
  엘리사는 그 스승인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가서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따라가면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도적을 따라가면 도적질할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따라가면 세상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범이요 기준으로서 그 분을 좇아가야 한다.

  구속받은 은혜의 수혜자는 단순히 출생을 한 것뿐입니다. 믿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피덩어리 어린 아기로 출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출생한 아이는 부모를 보면서 배우고 닮고 성장하고 성숙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스승들을 만나서 배우고 익혀 자라고 성숙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백성들은 일생에 걸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날마다 새로운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지배적이지 못한 믿음이나 은혜는 철회될 수가 있고 오히려 최종적인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부름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거절하거나 무시한다면 출생과 함께 사망으로 빠지게 될 뿐입니다.

  3.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예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따르는 것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진리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생명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생명이며 영생을 누리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아무리 열심히 따라다녔다고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데는 공적이 될 수가 없고 실적이 될 수가 없고 공로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따르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길, 또 다른 진리, 또 다른 생명이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악한 마귀사단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예수를 따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단 마귀의 유혹을 따라서 넓은 세상길로 나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넓은 길과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요 멸망으로 가는 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도 사단 마귀를 따라 세상길로 가려느냐?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려가자"했던 것처럼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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