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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고전 1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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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말씀: 고전 11:23-29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떡과 잔을 나누며 ‘이것은 내 살이란다, 이것은 내 피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예식을 결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주님이 제정하시고 처음 행하신 예식을 사도들이 받아 행하였고 오늘 우리가 받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될 예식입니다. 기독교에는 크게 성례가 두 가지가 있으니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주님이 먼저 받으셨고 주님이 먼저 성찬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례를 거행하고 성도가 함께 참예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성도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성례식을 행하고 참여하는데 있어서 형편이나 환경,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원하심이 아닙니다.

먼저 성례 중에 세례에 대하여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례가 무엇이냐하면 헬라어로 ‘밥티조’라 하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김을 받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를 물 속에 장사지내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용서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라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 세례 받아서 구원 받은거야!’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 구원의 증표로 세례를 주신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여 영원히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 그 안에 성령께서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세상과 분리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되니 비로소 내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와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는 새로운 출발인 것입니다. 세례는 왜 받아야 하는가?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했으니 바로 하나님이 먼저 행하셨고 그가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먼저 내가 죄인임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발견하고 죄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을 믿는 믿음이 있는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가슴속에 믿음의 확신 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분명하게 입으로 선포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세상에 속했던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접붙힘을 받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니 이제는 내가 세상이 원하는대로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대로 살겠다고 하는 자기선언이요 자기표현입니다.

이제 성찬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셨던 분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 그 예수님이 나의 죄와 허물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심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감사하기에 성찬예식을 행할 때마다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사죄의 확신과 구원의 확신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는 것이니 나는 땅에 살지만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확인하기에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찬 앞에서는 성찬의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무너졌던 부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각오와 결단가운데 참예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 붙들려 있었다 할지라도 ‘주여 나를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옵소서. 주님 안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참예하는 것입니다.

세례가 죄의 대속의표요 구원의 표라면 성찬은 신앙생활의 대속 곧 성도의 구별된 삶의 상징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은혜와 수단이요 통로이니 집례하는 목사도 참예하는 성도도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이 예식에 참예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성찬에 앞서 유념해야 할 것들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예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행할 때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주의 떡과 잔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오늘 예배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오늘 이 예배 중에 우리들끼리만 몸부림치게 놓아두지 마시고 성령이여 임재 하시옵소서’라고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찬예식이나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임재입니다. 우리들이 떡과 잔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나 자신을 드리므로 나를 만져주시고 나를 건드려주시는 하나님이 사랑을 느끼며 이 예식에 참예할 수 있다면 우리는 큰 복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 앞에서 약속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절대 필요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사는 동안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돈도, 건강도,관계도 필요하고 그러나 이 땅에 우리가 필요한 모든 필요들은 환경에 제약을 받습니다.

등산화는 산에 있을 때 필요하지 바다에서는 짐이 될 뿐입니다. 자격증을 따느라고 몸부림을 쳐 따보았지만 미국으로 이민가면 이 자격증 별로 쓸모 없는 것으로 되고 맙니다. 이 땅에 모든 필요는 환경에 제약을 받는다는 이야깁니다. 우리의 필요는 또한 시간에 제약을 받습니다. 어릴 때 절대필요라고 여겼던 것들이 성장해가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몸부림을 치지만 하늘에서는 아닐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필요입니다. 시간과 환경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필요입니다. 어린아이에게도, 장성한 사람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병이 있는 사람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합니다. 다리 밑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호화로이 연락하며 부자로 사는 사람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필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오늘 분주하다하여 순간의 필요 앞에 영원한 필요인 예수 그리스도가 양보되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바라옵기는 여러분의 삶의 가장 중앙에 영원한 필요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잡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내 마음에 받아들이며 내게 오시옵소서 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찬 앞에서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로는 ‘마라나타’ 주님 다시 오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보는 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에게 절대 소망은 ‘마라나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여기에서 진정한 소망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위로는 ‘마라나타’ 주님 다시 오심입니다. 병든 자에게 진정한 소망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마라나타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는 것으로 소망을 뛰어넘어 마라나타 주님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라나타, 주님 다시 오심이 저와 여러분에게 또 하나의 힘이 되어서 세상을 이길만한 힘을 공급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우리가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집이 좀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지금은 약하지만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지금은 얽혔지만 풀릴 것 같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과 형편 앞에서든지 우리가 진정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임은 바로 마라나타, 주님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하나 성찬 앞에서 주님의 부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마다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무엇입니까?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내가 받은 구원의 소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또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전파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는 사람은 주님의 전도명령을 이 안에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그러하셨듯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그러하셨듯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수이기를 원합니다.

저는 한 성도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알든지 저가 나를 알든지 내 주변에는 구원의 울타리가 되게 해 달라고 소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성찬 앞에서 또한 용서의 명령의 보아야 합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듯 너도 형제를 용서하라’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용서의 은혜를 입고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배우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했다고 10년, 20년 지나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채 자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에는 어떤 조건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용서와 사랑에는 어떤 조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용서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가슴속에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하나 때문만이라도 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성찬 앞에서 주님의 각오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처음 성찬을 행하신 후에 기도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처음 성찬을 행하신 후에 고난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주님은 처음 성찬을 행하신 후에 십자가를 지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처음 성찬을 행하시고 쉬러가신 것이, 놀러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처음 성찬을 행하신 후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원함을 무너뜨리고 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 앞에 나 자신이 굴복하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총 앞에 ‘주님, 주님의 살과 피가 내 중심에 들어오듯 내 삶이 주님 중심이기를 원하고 주님이 울타리 안에 내가 있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찬을 행한 후에 사명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찬을 행하면서 굳은 다짐이 필요합니다. 성찬을 받았다면 어제와 오늘이 달라야 합니다. 성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오늘 내일이 똑같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처음 성찬을 행하시고 십자가 동산을 올라 우리를 위하여 물과 피를 쏟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성찬을 받으면서 조용히 다짐해야 됩니다. 성경을 놓아 버렸던 사람은 ‘주님, 내가 성경말씀을 묵상할게요.’ 기도를 놓아 버렸던 사람은 ‘주님, 내가 이제 기도하는 사람이 될게요.’ 사명을 놓아 버렸던 사람은 ‘주님, 이제 내가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 될게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교회 집사님 한 분이 지방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지방교회의 목사님이 그 집사를 어여쁘게 여기셨는지 이명 증서를 띠어 오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에서 그가 이렇게 신앙생활 했다는 서류를 띠어서 보내라고 하는데 이름을 쓰고 그의 직분을 쓰고 그가 몇 년도에 우리교회 등록을 했고 몇 년도에 당신의 교회에 갑니다 라고 이명 증서를 띠어 보내는데 그 밑에 신앙의 이력을 쓰는 난이 있습니다. 그가 교사를 몇 년 했고 성가대를 몇 년 했고 이렇게 이력을 써야하는 난이 있는데 아무것도 쓸 것이 없었습니다. 저와 함께 신앙생활을 7년을 함께 한 사람인데 신앙의 이력에 아무것도 쓸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제가 회계했습니다. ‘하나님, 써줄 게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성찬에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여야 합니까? 오늘은 기회가 있습니다. ‘예수님, 그동안 내가 많이 잘못했거든요 이제 잘 살게요. 주님, 지금까지는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았지만 잘 할게요.’ 다짐을 합니다. ‘주님 그동안은 주님을 위해 수고하지 않고 놀고 재꼈지만 이제는 예수님 위하여 살게요.’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기회가 있지만 주님 오시면 기회가 없습니다. 이명 증서를 보내면서 그가 다시 열심을 내서 쓸 것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시던 내가 가면 기회는 없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목사님 한 분이 홀연히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보며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가는 겁니다. ‘에녹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가야하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이명 증서를 하나님 앞에 내야하는데 하나님께서 ‘전도는, 용서는...묻는다면’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 기회가 없습니다. 몸이 아파 몸부림을 치는 중에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는 사람들은 또 한번의 기회가 있다는 측면에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회개할 기회도 있고 용서할 기회도 있고 그러나 홀연히 어느 날 자다 일어나니 저 세상이고 눈을 감고 잠깐 잤다가 일어났는데 이 땅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의 성찬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여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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