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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인내 (눅 22: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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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인내
누가복음 22:47-51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시고 동산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 볼에 키스하면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유다야 네가 내 볼에 키스하므로 나를 파느냐 빨리 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잡히심에 분노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칼을 집에 꽂으라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교훈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하게 하라’ 그런 뜻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너희들이 손대면 안된다.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

예수님을 ‘참으신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고 사셨습니다. 참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참으심으로 일생을 일관되게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느껴지는 감동은 예수님의 인내입니다.
‘너희들이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라는 말은 ‘너희들이 세상 살기 힘들어 낙심될 때 주님 바라보라.’ 다시 말하면 ‘가난할 때 주님을 바라보면 참을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주님 바라보면 참을 수 있다. 원수를 만났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 참음으로 이길 수 있다. 실패하고, 낙심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주님을 바라보면 능히 참을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내를 통하여 세 가지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영광의 인내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왜 참았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참았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내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능히 이런 것을 막을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얼마든지 이런 것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을 어떻게 이루겠느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참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할 때 무슨 생각을 먼저 했느냐? ‘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그래서 ‘가만 두어라. 죽고 사는 것이 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된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날 때 나를 먼저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이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저들에게 잡혀야 되느냐 살아야 되느냐’ 그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무엇이냐’ 이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참을 때 안참는 것 보다는 참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참는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그 목적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야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우리는 어떤 때 애매하게 고난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고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참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으리이다.’ 슬픔이나 고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는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고 있습니다. 참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참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참기만 하면 병이 됩니다. 참는 목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한 자매님이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학대하는지 얼굴에 기미가 끼고 체중이 줄었어요. “목사님, 이 자매를 살려야 되겠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예수를 믿으라 권면하면서 “자매여, 시어머니를 생각하고 참다가 이 상처가 독이 되면 죽습니다. 자식도 있으니 살아야 하는데 사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이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어떻게 은혜를 받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학대를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받으면 그것이 독이 되거나, 상처가 되거나, 억울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과 부조리가 있고 납득할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 우리 인생 행로에 무자비하게 휘몰아쳐 올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고난을 참는다고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말씀에 근거하고 있어야 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옳다 인정을 받는다’ 누가 참는 자에게 옳다고 하십니까? 물론 잘 참았다고 옆에서 옳다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옳다고 인정을 받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의 인내

예수님의 참으심은 곧 사랑의 실천이요, 예수님의 참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 하면 예수님을 닮습니다.

닮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미워하면 닮습니다. 미워하면 나쁜 것을 닮아서 나쁜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사랑하면 좋은 것을 닮아서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면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인내하는 삶의 표본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므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게 됩니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죄인들이 예수님을 거역하고, 학대하고, 미워하고, 괴롭혔는데도 참으신 사랑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참으셨습니다. 악한 자를 참으셨습니다. 거역한 자를 참으시고 원수를 참으셨습니다. 불의하고 악한 자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침뱉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런 죄인들까지도 참아주셨습니다. 참아주실 때 의인으로서 죄인을 참으셨습니다. 선하신 분으로서 악한 자를 참으셨습니다.

이 세상은 약한 자가 참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관례를 보면 약한 자가 참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참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참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을 참습니다. 학교 가면 선생님은 때리고 아이는 참습니다. 군대 가면 상관은 때리고 졸병은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하신 분이 약한 자들의 학대를 참고 있습니다.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신 권능의 주님께서 악한 자의 학대를 참고 있습니다. 약한 자가 참는 것은 비굴한 것입니다. 그러나 강한 자가 참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시어머니에게서 학대받을 때 ‘내가 며느리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 그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닮아서 큰 자기 때문에 사랑으로 참아야지’ 그래야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내에게 함부로 말하는 남편 있습니까 작은 자입니다. 참고 있는 아내 있습니까 큰 자입니다. 참는 자가 큰 자입니다.

동작동에 까다로운 목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 한 분이 어찌나 덕스러운지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했습니다. 한번은 물었습니다. “장로님, 어떻게 그렇게 괴팍한 목사님을 잘 받들고 사십니까?”  “좋은 목사 받드는거야 누가 못하겠소 그런 분 받들어야 재미가 있지”  “무슨 재미가 있어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지 않습니까”  “장로님은 성자입니다.”
크리소스톰이라는 유명한 교부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욕을 당하거나 손해를 본 사람이 보복할 힘이 있으면서도 보복하지 않는 것은 하늘이 준 사랑의 참는 것이다.” 참아야 합니다. 참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참는다고 할 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환난과 역경을 견디는 것이 있고, 악한 자를 참는 것이 있고,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참는 것은 인간관계가 앞서 있습니다. 환난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원수를 끝까지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학대하고 미워하는 자를 끝까지 사랑으로 용납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생을 참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은 어느 정도 참아낼 수 있지만 인간관계에서 수치를 당한다든지, 모욕을 당한다든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이것을 참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환난을 참는 것은 끈기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참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에브라함 링컨을 온갖 나쁜 말로 비난하고 무시했던 스텐톤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링컨은 그를 끝까지 참았습니다. 나중에는 그를 국방장관에 채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한 자를 절대로 가까이 두면 안된다고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스텐톤을 장관으로 채용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링컨이 암살 당했습니다. 스텐톤은 관 곁에서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세계 역사에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여기 누워있다.” 사랑으로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을 이긴 것입니다. 에브라함 링컨의 위대함은 참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수모를 많이 겪었는지 모릅니다. 집권하는 기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당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링컨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기도해야 됩니다.
고도원 집사님의 아침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나무는 한번 자리를 정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차라리 말라 죽을지라도 말이야
    나도 그런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는 사시사철 변한다. 철따라 옷을 갈아 입는다.
    힘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눈비에 시달린다.
    그러나 결코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무 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랑이 그립다.

산에 가면 두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활엽수가 있고 상록수가 있습니다. 상록수는 춘풍추우 비바람이 불고 백설이 휘몰아쳐도 든든이 푸른 상록을 유지합니다. 활엽수는 봄이 오면 잎이 피고 여름이 오면 잎이 무성하다가 가을이 오면 시들기 시작해서 찬바람 불면 우수수 다 떨어집니다. 그래서 활엽수에게는 재목감이 없습니다. 수백 년 뿌리를 내리고 자란 상록수들이 결국 역사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성삼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낙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 더 즐겁게 살 것을’ 하고 후회한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웃고 즐겁게 살아도 될 것을 짜증내고 불평하다가 세월을 허송합니다. 기왕에 주어진 생 즐겁게 살 것을 제 아내에게 한번 웃어주지 못하는 남편, 기왕에 일하는 것 웃으면서 일하지 못하고 짜증내는 사람, 자식을 보고도 한번 웃어주지 못하는 아버지는 참으로 불쌍합니다.

둘째는 ‘좀 더 베풀며 살 것을’ 하고 후회한답니다. 어차피 없어질 물질 남에게 인심 쓰면서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다 사라진 다음에야 후히 쓰고 나누며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후히 쓰고 살 수 있는 사람 복받은 사람입니다. 쥐고 살아도 나중에 죽을 때는 제 것 아닙니다.

세 번째는 ‘좀 더 참고 살 것을’ 하고 후회한답니다. 순간을 참지 못하여 일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부 터툴리안은 “참는 것은 여자를 아름답게 하고, 남자를 가치 있게 만든다. 소년의 인내는 사랑을 받고, 청년의 인내는 칭찬을 받고, 노년의 인내는 존경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살림의 인내

참는 것은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즐거움이 뭡니까?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은 참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음으로 내 인격이 살고 내 생명도 살 뿐만 아니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삽니다.

어느날 장자가 공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몸을 닦는 요점을 한마디로 말씀해 주십시오.”  “백 가지 모든 행동에 참는 것이 제일이다. 왕이 참으면 국가가 편할 것이요, 제후가 참으면 지경이 넓을 것이며, 관리가 참으면 지위가 높아질 것이요, 형제간에 참으면 그 집이 부귀를 누릴 것이요, 부부가 참으면 일생 해로할 것이요, 친구가 참으면 우정을 유지할 것이요, 자신이 참으면 후회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1년에 18만쌍이 결혼하면 9만쌍이 이혼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지 못해서 그럽니다. 참지 못해서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참고 살았습니다. 남편이 별볼일없어도 참고 살았습니다. 참고 살았기에 오늘의 이 나라, 이 역사를 이어갔던 것입니다.
참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요, 주님께 받는 상급 때문입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카네기는 “승부내기는 인내의 두 글자가 제일이다. 조급하면 눈이 흐려지고 화를 내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 참고 기다리는 중에 기회가 온다. 인내는 믿음의 보호자, 화평의 유지자, 사랑의 육성자, 겸손을 가르치는 교사, 승리의 저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참음으로 상대의 인격을 살려내야 합니다. 마음을 참음으로 내게서 예수님의 인격을 살려내야 합니다. 행동을 참음으로 역사 속에서 사회를 건설해가야 됩니다. 참는 사람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가정이 상처나고 파탄납니다. 그러나 말을 참으면 교회가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참는 인내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참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을 이루어 놓아야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야 되며, 나를 살 려내고, 이웃을 살려내고, 사회와 가정을 살려내야 됩니다. 참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지녀야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온유와 절제니”(갈 5:22)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내 안에 이루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됩니다. 베드로도 성급한 사람이요, 요한도 성급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 오래 참는 위대한 인물로 변화되었습니다. 못 참는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 능력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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