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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친구 (삼상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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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삼상 18:1-5)

낙원에서도 이것이 없으면 낙원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창세기를 보세요. 하나님이 좋았다고 하시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었어요. 산과 들과 나무와 모든 생물을 만들었어요. 그리고는 사람을 만들었어요.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만들어 그 사람을 거기 두셨어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위에는 천체가 빛났고 땅 위 모든 좋은 것들 중심에 있는 낙원은 모든 행복으로 넘쳤습니다. 사람에겐 모든 게 다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좋지 않구나.”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창2:18) 사람이 본래가 혼자 살 수 없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급히 여자를 만들었어요.

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나요? 혼자 살 수는 있지요. 하지만 낙원의 모든 것으로도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혼자는 안 됩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그리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그래서 사람은 절대로 혼자 있을 수 없어요.

1. 사람은 혼자서 온전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의 친구로 하와를 만드셨나요? 그렇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와는 아담의 배필입니다. 그러면 아담은요? 아담 역시 하와의 배필입니다. 서로가 그렇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서로가 배필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신이지만 반드시 삼위가 함께 있으며 교제하여 완전한 신이 됩니다.

세 위는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주며 서로를 완전하게 누립니다. 이것이 이상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그러하시니 그 형상을 닮은 인간도 그렇습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친구가 됩니다. 완전한 친구가 못되면 오래 유지되지 않습니다. 성적매력이나 재산이나 학벌 심지어는 신앙까지도 친구가 되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행복한 결혼이 안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모를 의지합니다. 자라나면 부모를 돕기도 하지요. 나중에는 오직 돕기만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부모를 이용 대상으로 압니다. 그저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해요 차츰 부모를 이해하면서 도우려고 합니다. 부모가 약해지면 모시고 도와드립니다. 그러나 그분들과 교제해야 서로를 누리고 행복을 맛보는 걸 아십니까?

세상에 나가서도 처음에는 모두 이용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용할 수 있어야 교제를 시작합니다. 사귀다가도 얻을 게 없으면 곧 돌아섭니다. 어느 날 두 친구가 캠핑을 갔어요. 저 앞에서 곰이 달려오는 거예요. 한 친구가 운동화를 신고 일어서자 다른 친구가 말합니다. “네가 곰보다 빨리 뛸 수 있냐?” 뛰면서 말합니다. “너보다만 빠르면 되.”

이런 사람을 친구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기에 아예 친구를 안 사귀고 움츠러드는 사람도 많아요. 그러다가 교제의 초보 단계로 들어갑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어려움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정도의 친구는 누구나 몇 명씩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서로가 돕고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관계도 끊어져요.

그러다가 더 관계가 깊어지면 계약 단계가 됩니다. 이제는 상대가 내게 유익을 못주어도 친구입니다. 친구대신 부부라고 해도 좋고 스승과 제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관계는 계약을 표현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결혼 서약을 하지요.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돕고 의지한다.” 이렇게 서로는 사슬로 연결이 딥니다.

이렇게 계약을 맺은 뒤에도 얼마든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어요. 상대를 이용하려고 할 수 있고 또 내게 유익을 주어야 내 것을 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진정한 계약은 그런 생각 없이 그냥 사랑하고 자신을 줍니다. 따지지 않아요. 그때 계약에서 오는 기쁨과 능력을 경험합니다. 아직 이 단계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결혼도 친구 관계도 있지요.

하지만 계약을 잘 이행한다면 완전한 삶이 됩니다. 부모 자식이건 결혼관계이건 회사의 직원이건 다 적용됩니다. 이용하려는가, 주기도 하려는가, 참된 교제에 들어가겠는가? 신자는 마음먹고 조금만 노력하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계약의 단계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것을 다 주고 손해만 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수준의 기쁨과 능력을 누립니다.


2. 완전한 친구의 관계

계약적 친구 관계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그런 친구였습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음번 왕이기도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날 다윗을 만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대표로 거인 골리앗과 싸우는 것을 본 다음입니다. 다윗이 왕 앞에 불리어 자신이 어디 사는 누구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때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상대를 시험해 보기 전에 이미 계약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래서는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그는 다윗을 향해 계약적 친구 관계를 선언하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변함없이 완전한 친구가 되어줍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사울왕은 다윗의 원수였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다윗을 그대로 두면 자신의 왕위를 잃습니다. 그러면 자신과 가족들은 모두 죽습니다. 한 하늘 아래 두 왕은 있을 수 없지요. 다윗이 잘 되면 자신은 못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다윗이 망하고 죽어야만 자신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그대로 두기만하면 죽게 되어있어요. 그럼 요나단은 왕이 됩니다. 하지만 참된 친구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아요. 친구 잘되는 것이 내 기쁨이요 친구 아픔이 곧 내 아픔입니다. 모든 계약적 관계는 그러합니다.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자신보다 더 기뻐하고요, 제자가 그렇고 부부간이 그렇습니다.

요나단은 둘 사이에 끼인 처지가 됩니다. 아버지를 따르면 다윗을 죽여야 합니다. 다윗을 도우면 아버지를 배반합니다. 여기서 그는 의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합니다. 죄 없는 다윗을 죽이는 것은 의롭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과 아버지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지요.

요나단은 위기에 처한 다윗을 살려줍니다. 그것은 왕위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자기 황태자의 옷을 다윗에게 입혔고 무기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가망 없는 전쟁에 참여합니다. 도망하지 않아요. 아버지와 나란히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참으로 사나이중의 사나이요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요나단은 손해만 보았나요? 그렇게 볼 수 있어요. 하나님 마음에는 아벨처럼, 엘리야 이사야처럼 역사를 넘어서는 영웅입니다. 예수나 스데반 바울 베드로처럼 순교자 같이 죽었어요. 다윗은 평생 노래했어요.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1:26)

이런 친구가 있나요? 나를 향해 의리 지켜줄 누가 있나요? 그런 사람을 어디서 찾겠느냐고요? 부모도 그렇게 못한다고요? 요나단은 예수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는 요나단처럼 왕의 옷을 내게 입히고 자신의 무기 모든 영광과 능력을 내게 주셨어요. 그 의미와 효력을 안다면 다윗 이상의 존재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나도 그런 친구가 되어보자

미국 메이저 리그에 흑인으로 처음 나갔던 사람은 2루수 재키 로빈슨입니다. 그가 설 때마다 관중은 야유를 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에러를 저지릅니다. 어찌나 놀려대는지 경기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숏스탑이었던 피위 리스선수가 그의 옆에 섭니다. 그리고는 흑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관중을 쳐다보았어요. 차츰 야유는 잠잠해졌어요.

나중에 재키 로빈슨이 말합니다. “어깨를 두른 그 팔이 나를 살렸다.” 그렇게 야유를 받을 때 내 옆에 말없이 서 있을 친구가 누군가요? 뉴욕에 있는 딸이 이메일을 보낼 때 가끔 쓰는 말이 있어요. “아빠가 늘 내 옆에 계셔서 감사해요.” 멀리 있어도 절대로 버리지 않고 도와줄 줄을 믿는다는 말이지요. 아버지 보다 더 분명한 친구가 예수입니다.

예수는 날 위해 모든 수치를 마다하지 않았어요. 무서운 고난과 죽음을 당했어요. “저 사람을 대신 한다면 너는 영원히 멸망한다. 지옥에 내리우리라.” 예수는 그것을 받아들였어요. 십자가를 지고 오래오래 죽었어요. 늘 내 옆에 서 계신 주를 느낄 수 있나요? 재키 로빈슨처럼 새로운 힘을 얻어 이겨나갈 것입니다. 전능의 신인 그가 돕지 않겠어요?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다윗, 결국 왕이 된 다윗이 어떻게 했나요? 요나단을 절대로 잊지 않았어요. 요나단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도망하다가 두 다리가 다 부러졌어요. 다윗은 그 아들을 돌봅니다. 자기 가족의 식탁에서 그와 함께 먹었어요. 다시 요나단의 사랑을 돌려주었어요. 모두에게 자비로운 왕이 되어 마음으로 교재하려 했어요.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으로 살아났고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친구 예수가 죄를 대신 짊어졌어요. 대신 죽었어요. 예수의 도움으로 의인 되고 능력자 되고 왕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해하고 믿음을 발휘한다면 다윗 이상으로 삽니다.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은 다 주어버리는 게 아니라 얻는 거에요. 예수를 보세요. 사도들을 보세요.

요나단이 사랑으로 친구에게 모두 줄 때 그 사랑의 기쁨을 누립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기 것을 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줄 때 느끼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신자는 그 이상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곧 능력이요 아가페입니다. 하나님 주신 것입니다. 요나단의 사랑 자체가 하나님 선물이었습니다. 신자는 예수를 통해 그 선물을 다 받았어요.

예수의 도움을 받는 우리도 요나단처럼 영웅의 삶을 살 수 있어요.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 낙원이라도 함께 교제할 친구가 없다면 불완전합니다. 그런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도 그런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나단처럼 예수처럼 나 자신도 남에게 그렇게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나 낙원이 됩니다.

요나단처럼 다윗처럼 그리고 위대한 사랑의 사도들처럼 해 보세요. 그래야 삶이 온전해집니다. 강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낙심하지 말고 되돌려 받으려 말고 계속 연습하기 바랍니다. 세상은 정말로 능력있는 교제자들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 특히 작은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하세요. 요나단처럼 영웅의 삶 하나님 수준의 삶을 도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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