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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특권 (행 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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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특권 (사도행전 8:26-40)

  요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독실한 신자인 멜 깁슨이 감독하고 제작한 이 영화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장면에서 시작되어 십자가 처형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 12시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부활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되자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하고 외친 것을 부각시키는 것은 반유대주의라고 반발해서 그 대사를 영어자막에서 지우기까지 했습니다. 메시야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반유대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라고 아주 거센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저가 사지(死地)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가고 털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이사야 53장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34절에 오면 내시가 빌립에게 묻습니다. <여기 말하는 ‘저’가 누구입니까? 여기 말하는 ‘저’가 선지자 자신을 가리킵니까? 아니면 타인을 가리킵니까?>. 여기서 ‘저’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지요? ‘저’는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저’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인정하기를 죽는 것만큼 싫어합니다. ‘저’가 ‘예수님’이란 것을 싫어하다가 이제는 이사야 53장 전체를 다 싫어합니다. 아예 이사야 53장은 눈을 막고, 귀를 막고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아예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킨스버그라는 브라질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유대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 랍비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폴란드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어렸던 어느날 이사야 53장을 읽다가 7절 말씀에 와서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시처럼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양처럼 순하게 끌려가고 순종했다고 했는데 ‘그’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물었더니 아버지가 대답을 하지 않고 손에서 성경책을 빼앗으면서 뺨을 사정없이 막 후려치는 것입니다. 솔로몬 킨스버그는 왜 맞았는지도 몰랐어요.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화를 내고 뺨을 때릴까.
시간이 흘러 그는 영국으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그를 통해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저’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저’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것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솔로몬 킨스버그는 ‘저’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성경 전체가 다 이해가 되기 사작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어린양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이렇게 살을 찢고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내 구원을 이루셨구나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감격하여서 마침내 그는 브라질 선교사가 되어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사지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털깍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과 같이 끌려가서 우리의 허물 때문에 가시관에 찔리고 못에 찔리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서 상하셨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영육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한몸에 걺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32절에 있는 ‘저’가 바로 예수님이신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로몬 킨스버그처럼 그렇게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가 예수님임을 믿는 그때부터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사명을 주십니다. 날 위해 대신 죽으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과 성도들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지킵니다. 다른사람들은 핍박을 피하여서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집니다. 흩어져서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마치 모닥불을 막대기로 치면 그 모닥불의 불티가 사방으로 튀어서 거기서도 또 불이 붙는 것처럼 흩어진 성도들이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여서 온 사방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사마리아 성에는 빌립 집사님이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니까 귀신들이 소리치고 떠나갑니다.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시몬이라는 마술사도 예수님을 믿고 돌아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기도했더니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그 놀라운 성령강림이 다시 사마리아에 임하게 되고 거기서 고넬료 가정으로, 에베소로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가 퍼져 나가게 되는데 이방사람처럼 취급했던 사마리아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복음이 확산되어 나갑니다. 사마리아 온 성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말씀 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입니다.

1. 전도는 우리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시마리아 전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본문 26절에 보세요.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거기는 광야였더라>고 했습니다. 가 보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가진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39절에 보면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라고 했고 40절에 보면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서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하고 세례를 주어서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누가 주도해 나갑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시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26절에 있는대로 천사를 파송해서 빌립에게 지시하십니다.

29절에는 성령께서 <병거로 가까이 가서 말하라>고 하십니다. 39절에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습니다. 전부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한 영혼을 구원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주도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에 나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보내시고 70명을 보내실 때에 그냥 보내지 아니하시고 능력까지 주셔서 보내셨던 것처럼 오늘 내가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나 혼자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동원되어 도와 준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도의 현장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심을 실제로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39절에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가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끌어 가셨다는 말은 <데려가다, 잡아채 가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아주 실감나게 나오는 장소가 어딘가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을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휴거라는 것입니다. 그때 <끌어올려>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바로 여기의 <주위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킬 때에 저 높은 곳으로 새끼들을 데리고 나가서 떨어뜨립니다. 아직 날개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날개짓을 하지만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땅에 닿을 찰라에 어미독수리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새끼를 낚아채서 끌어 올려갑니다.  그때 사용하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사용된 <이끌어 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이후에  주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아소도에 간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을 공중으로 확 끌어올리듯이 빌립을 끌어올려 아소도에 다시 내려 놓았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끌어올리다>라는 말에 시간적인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하면 2만분의 1초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빠르게 낚아챘는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휴거시킬 때에도 얼마나 빠르게 데리고 가실지 2만 분의 1초의 속도로 공중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들을 확 채 가듯이 성령께서 빌립을 확 이끌어서 아소도까지 이끌어 가셨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었다는 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천사가 빌립에게 남으로 내려 가라고 했습니다. 또 내시의 병거 가까이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끝났을 때에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낚아채듯이 주의 영이 빌립을 2만 분의 1초로 순간적으로 낚아채서 아소도에 데리고 가서 내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런 성령이시면, 이런 초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면 천사를 시켜서 내시에게 바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안시키고 바로 내시에게 <자, 이 말씀은 이런 뜻이다...>이렇게 가르켜 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흰옷을 입고 나타나셔서 <나는 예수다...>하시면서 내시에게 바로 복음을 전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전하면 우리가 전하는 것보다 복음이 더 잘 전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는 다 성령께서 하십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은 다 천사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결정적인 일은 천사가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도 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하지 않습니다.

35절에 보면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내시가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천사가 하지 않습니다. 천사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직접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하지 않습니다. 마치 과일로 말하면 씨 뿌리고, 자라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해 놓으시고 마지막에 과일을 따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빌립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른 것은 성령께서 다 주선해 놓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마지막 그 순간, 결신하는 순간은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상급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여 놓으시고, 성령께서 복음 전할 수 있는 온갖 환경을 다 만들어 놓으시고, 천사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 놓으시고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우리에게 의무가 아닙니다. 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만 주시는 축복이요, 특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사가 볼 때는 얼마나 안타깝고 억울하겠습니까? 자기가 다 주선해 놓고 복음까지 전하라고 했으면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전할 것인데 그것은 자기에게 안 맡겨주고 마지막, 구원되는 것은 사람에게 맡기시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는 것을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이 바로 그 찬송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온 세상 만민들 흉악한 죄에서 떠나라 하시니
  이 말씀 듣고서 새 생명 얻으라 이 기쁜 소식 전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영생의 복락과 천국에 갈길을 만 백성 알도록 나가서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이 복음 전하라 우리게 부탁하셨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축복이요, 특권 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라면 천사가 더 잘 전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더 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우리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전하는 결정적인 일은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남겨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이 축복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현장 속에서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2. 전도의 축복은 순종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영혼구원은 성령께서 주도하시지만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서 이루어지고 축복의 물꼬가 그 사람 쪽으로 틔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시를 구원하려고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잘 전하고 있는 빌립에게 천사를 보냅니다. 26절에 있는 것처럼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천사의 지시대로 일어나서 갑니다. 순종해서 갑니다.

29절에 보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하는 말씀에 순종했는데, 30절에 보면 빌립은 달려가면서 순종했습니다. 빌립의 이런 순종을 통하여서 내시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수백년 세월이 흐른 후에 에디오피아라는 한 나라가 복음으로 변화됩니다.
빌립처럼 순종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고, 가라면 가시기 바랍니다. 빌립의 순종을 좀 더 살펴 보십시다. 오늘 본문 8장 1절에서 25절까지를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전도를 성공적으로 이루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일어나서 <남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곳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가라고 햇습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얼마나 불평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복음 전파를 잘하고 있는데 왜 여기에서 떠나라는 것입니까? 여기는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성 전체가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화 시켜놓고 떠나겠습니다.”하고 얼마든지 이유를 대고 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빌립은 몰랐지마는 주의 천사의 지시를 받고 그대로 일어나서 갔습니다.

사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뜻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 가 구원되면 나라가 구원되는 엄청난 일이 있을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 일을 위하여 빌립을 보내서 내시에게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계획하시고 한창 사마리아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는 빌립을 빼내셨습니다. 빌립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자기의 경험으로도 맞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했더니 내시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고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가 에디오피아에 지금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 나라가 복음화 됩니다. 나라가 복음을 통하여서 부강해지고, 나라가 독립되고, 복음이 들어가는 곳곳마다 경제, 사회, 정치, 모든 문화가 다 바뀌어져서 일등국가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디오피아는 2차 대전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가 다 다른 나라의 속국으로 있을 때 유일한 독립국가였습니다.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내시가 전한 그 복음이 그 나라에 들어가니까 나라가 빨리 개화되고, 독립되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2차 대전 때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았을 때 전 국민이 금식하면서 그 국난을 대처하였습니다.

복음에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의 능력을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복음을 믿어서  내가 변하고, 내 가정이 변하고, 내 가문이 변하고 , 우리 사회와 나라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이 복음 안에 있는 줄 믿고 이 복음의 능력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순종, 한 사람의 전도, 한 사람이 믿어서 이런 엄청난 결과가 오게 되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순종이지만 그래도 순종했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어도 주께서 일어나서 가라고 하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가까이 가라면 가까이  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보아서 가까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하라면 이해가 안 되어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로마서 12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 이 깊고 높은 하나님의 지식을 누가 측량하여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빌립이 그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전하라면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우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고 누릴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26절에 보면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남쪽이라는 말 헬라어 ‘메셈브리만’은 ‘남쪽’이라는 말도 되지만 ‘한가운데’, ‘중간’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래서  여기 남쪽이라는 말 대신에 ‘한낮에’, ‘대낮에’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낮에 ,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는 시간에 광야, 사막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가사는 예루살렘 서남쪽 72㎞ 지점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입니다. 사마리아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 까지만 가도 수백리가 될 것인데 가라고 하는 곳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아니하는 광야입니다. 그것도 한낮에, 태양볕이 내려쬐는 사막이 얼마나 덥습니까? 요즘처럼 좋은 교통수단도 없는 때에 그 광야로 가라는 것입니다. 정말 맥빠지는 천사의 지시였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기에는 너무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갔습니다. 

순종해서 가보았더니 거기에 사람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순종해서 가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대면서 순종하지 않으면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기적을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요나차럼 반항하지말고, 모세처럼 망설이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빌립처럼 순종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의 손길을 바로 그 순종의 현장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기적을 맛보게 될 줄 믿습니다.

왜 우리가 오늘 이런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느냐하면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빌립은 <일어나 가라>하니까 일어나서 갔습니다. <가까이 가라>하니까 한술 더 떠서 달려갔습니다. 오늘 성령께서 여러분들 마음 속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라, 가까이 가라, 전하라>이렇게 말씀하실 때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어나라면 일어나 보세요. 가까이 가라면 가까이 가 보세요. 성령께서 가까이 가야할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가서 전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주변에 마련해 놓으신 줄 믿습니다.

영혼구원에 잠자는 성도는 무관심한 성도입니다. 잠자는 성도들, 병든 성도들, 무관심한 성도를 향해서 주님은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앉아있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야 되는 줄 알면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실천해야 되는 줄 알면서 미적거리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주님은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일어나라는 이 명령에 의지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까이 한번 가보세요. 그리고 한번 전해 보세요.

이 명령을 하신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십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버리신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가까이 가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여 나가서 전하여 주님을 기쁘시게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빌립처럼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라, 가라, 전하라, 그렇게는 말씀하지 않으실지라도 성령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라, 가까이 가라, 전하라>. 지금 어디로 갈 것인가, 누구에게 가까이 갈 것인가, 성령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다르게 지시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떠 오르게 될 것입니다.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연하게 만나게라도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귀 기울이고 성령의 감동에 민감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일어나서, 가까이 가서, 전하세요,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서 순종하면 “아하!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가라고 하셨구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다시 한번 체험하고 감사하며 영광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도 시간에 맞는 순종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서 며칠만 더 전도하다가 가겠습니다라고 했더라면 내시를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이 내시를 만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한낮에 내려가서 광야로 가라고 했습니다. 저도 성도들을 섬기면서 때로는 어느 분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분에게 한번 더 확신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분이 기다려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을 때 두고두고 가슴이 아픕니다. 내가 왜 그때 시기를 놓치고 복음을 전하지 못했던고,  얼마나 가슴에 부담이 되는지 모릅니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감동하실 때는 지금이 가장 적기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허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전할 수 있는 기회,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를 놓친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기회가 지난 다음의 순종은 효과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는 순종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은 즉각 순종했습니다. 즉각  순종하니까 타이밍이 맞아서 내시를 만났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내시를 만났겠습니까?  빌립의 이런 순종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동하면 바로 실천하세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아주 어려울 때는 만원도 큰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형편이 풀리고 모든 것이 회복되어서 괜찮을 때 누군가 그에게 “이제 내가 만원을 드리겠습니다.”하고 줘 보세요. 그 사람에게 힘이 되지 않습니다. 감동되지 않습니다. 한사람에게 복음도 기회가 있습니다. 교회봉사도 효과가 다릅니다. 언제나 때에 맞는 봉사가 효과적인데 그런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50주년 기념사업도 언제나 50주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때가 있습니다. 시기가 잘 맞추어 져야만 효과적인 전도를 할 수 있고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시기를 잘 맞추어서 성령께서 감동하실 때 그때를 미루지 말고 전도하고 순종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은 베드로나 바울처럼 위대한 사도가 아닙니다.  본래 그는 구제하는 일을 위하여서 선출된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복음전도를 통하여 사마리아가 복음화 되고 에디오피아라는 한 나라가 복음화되는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영혼구원, 천사에게 맡기지 않고 성령께서  직접하시지 아니하고 우리 축복을 위해서 남겨놓으신 이 특권, 천사도 흠모하는 이 사역을  내가 감당하리라, 그래서 내가 누리리라고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전파는 처음 교회에 나오는 분들, 정말 복음에 감격을 가진 분은 누구나 다 해야 되겠지만 우리 빌립 집사님을 본받아야 되겠습니다.  집사님 이상 되시는 직분자들은 빌립집사님을 본받아서 한 영혼을 구원하리리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도 집사이니까. 집사이상이니까 빌립 집사님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우리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다 전도에 헌신한다면 부산이 놀랄 것입니다. 내가 만날 내시, 그 사람을 통해서 그 가문을 복음화 시킬 내시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감동에 민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성령의 감동에 순종만 하면 됩니다. 이해가 안되어도 광야라는 힘든 곳일지라도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가까이 가라면 가까이 가고 전하라면 전하는 이 성령의 감동에 민감하게 순종하기만하면 역사는 다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특권 천사도, 성령께서도 하지 않은 이 복음전파를 남겨놓고 우리가 마지막 열매를 따는 축복을 누리도록 하신 주님의 사랑을 다시한번 깨닫고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여서 영혼을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현장, 축복의 현장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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