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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정적 자아상을 넘어 사명자로 (렘 1:4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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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부정적 자아상을 넘어 사명자로 
본 문 : 예레미야 1 : 4 ~ 10절 


지난주일, “홀로 있기를 배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 보셨습니까? 어떻게 그런 시간을 가지셨습니까? 아니면 너무나 바쁜 일상생활 때문에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셨습니까? 우리는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면서도 홀로 있을 수 있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자기 침대에 누워서도 홀로 있을 수가 있습니다. 홀로 있기를 배우라고 하는 말씀은 자기의 내면을 한 번 들여다보라는 뜻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의미란 도대체 무엇일까? 홀로 있는 순간에 한번 이런 문제들을 놓고 자기를 점검해 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사람이 홀로 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떤 사람들은 외로움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력감 속에서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바로 오늘 읽어 드린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하는 이런 계시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그렇게도 기다리던 경험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그 순간에 우리 인생의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일까요? 이런 경험을 한번 하게 되면 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모되는 것일까요? 더 이상 인생이 두렵지 않고, 더 이상 인생에서 불신앙 때문에 고통 받지 않고 열등감 속에 빠져들지 않는 그런 인간으로 바뀌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때로는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 말씀이 바로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오늘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말씀이구나!’ 이런 감격스러운 경험을 하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아닙니다. 한번 스쳐 가는 것만으로 우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우리의 내면 속에 깊이 스며들어서 말씀으로 적셔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에 선지자로 세웠노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의 반응은 나를 써 주신 것이 기쁘고 감사하여 자신만만하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스스로를 안타깝게 여기며 자기의 연약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노출시킵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열등감을 깨닫고 나 자신을 비하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음에도 우리들은 종종 자기 자신을 아주 형편없는 존재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쥐새끼만큼도 못한 존재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존재인 나, 나를 깎아 내리고 비하하고 어리석게 여기는 그것이 나를 붙잡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그 열등감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삶의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그 두려움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로 보면 “아!” 하는 탄식어입니다. “오! 어쩌면 좋아!”라는, 슬픔과 두려움과 괴로움이 표현되는 그런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나는 어린아이라”고 말합니다. 순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치하고,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뜻입니다. 나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미성숙한 존재입니다. 나는 사물을 분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나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원래 선지자는 말로 예언하는 사람인데 말을 하지 못한다면 치명적인 것 아닙니까? ‘하나님, 어떻게 저같이 말도 하지 못하는 자를 예언자로 부르십니까?’ 예레미야의 속마음에는 어쩌면 이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이런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맡기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나를 꼼짝 못하게 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내 자유가 구속되는 것은 아닐까요? ‘나’라고 하는 인간의 고유성과 정체성이 말살당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소명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재빨리 응답하면서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라” 하셨을 때 “제자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곧 예수를 따르니라”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하나님께 요청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런 모습도 나타납니다. “예”라고 대답하지만 거기에 토를 하나 답니다. 즉, ‘그러나’라는 조건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주여, 내가 주님을 좇겠나이다만은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납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내 부친이 돌아갈 때까지 내가 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나이다.” 그도 뒤로 물러납니다. 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니 제물이 많음으로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게 다가와도,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도,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와 변명을 대며 주님께 내 삶 전체를 드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 내면 세계조차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는 삶을 누리지 못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레미야의 변명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는 어리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치명적인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등감은 참으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겪었던 것입니다. 300명의 용사로 블레셋 사람을 물리쳤던 구약의 용사 기드온마저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이모저모로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나는 내 아비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라고 변명합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두려워했고, 부끄러워했고, 걱정하면서 그의 소명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연소합니다. 나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나는 연륜이 모자랍니다. 나는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구분해 본다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공적인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이 공적으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삶은 우리의 사적인 삶입니다. 공적인 삶, 사적인 삶 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공적인 삶보다 사적인 삶보다 더 중요한 삶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내면세계의 삶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위대한 삶입니다. 이 내면적인 자존감이 결여되면, 열등감으로 채워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실 수 없고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열등감에 내면이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그의 지위가 높으면 높아질수록, 가진 것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위험하게 됩니다. 상처 난 사자같이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사람을 한데 아우르는 포용적인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로서, 공동체를 위한 사람으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 갈등과 분쟁과 다툼만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바로 그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하면, 바로 엄청난 두려움과 열등감이 나 자신의 내면 세계를 사로잡음으로 우리의 공동체에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세계란 무엇일까요? 인도의 전설 중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술사가 쥐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쥐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무서워하는가 하고 보았더니 고양이를 보면서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야 되겠다.’ 하고는 고양이로 바꾸었습니다. 고양이로 바꾸었더니 또 벌벌 떱니다. 무엇인가 봤더니 개를 보면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로 바꾸었습니다. 그랬더니 또 두려워하고 떨고 있습니다. 봤더니 호랑이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랑이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되서도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술사가 이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갖고 있는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구나. 너는 별 수 없는 쥐다. 몸은 호랑이인데도 여전히 쥐의 마음을 가졌구나. 도로 쥐로 돌아가거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겉모양이 바뀌어도 내면 세계의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자존감을 회복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사명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진정한 변화와 개혁은 그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존감이 있어야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로 예레미야를 부르시면서 자기 내면의 고통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어린아이라고 이야기하는 예레미야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새로운 인물로 세워 주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인정하고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알았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너를 인정했고, 너를 사랑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성가를 아십니까? 이 성가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로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어떤 사람의 인정,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고 알고 사랑하시는 것이야말로 억압된 우리의 자아가 해방되는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내는 곳으로 가라.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준 것으로 말해라.” 예언자란 말을 잘하는 사람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가서 그분이 명령하시는 대로 선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언변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게 능력을 주고 너를 변화시키고 내가 네게 주는 말씀을 들은 것으로 세상을 향해서 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놀라운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걸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 여러분들과 접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사람을 두려워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뭘까요? 사람입니다. 사람의 시선을 무서워합니다. 사람의 비난을, 사람의 조롱을 견딜 수 없어서 우리의 삶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격동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요동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용기를 가져라!”

여러분, 용기는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경험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용기를 낼 수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내 맘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과 부딪쳐 나가며 도전하는 사람들이 용기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런 아주 재미있는 말로 용기를 설명합니다. “용기는 기도하는 두려움이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두려움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다고 해도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는 두려움은 기도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믿는 두려움이기에, 그 두려움이 나를 지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 인생입니까? 현실 어디에서도 절대적인 보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실패가 없는 안전지대는 이 땅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을 날려고 하는 사람은 추락할 것을 각오해야 하며, 차를 몰고 가는 사람은 차가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랑이 거절당할 것도 각오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것,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하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은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고 하는 그 사실마저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용기로 내게 주어진 삶만큼 조심스럽게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11개 부문의 상을 받은 영화를 아십니까? 바로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입니다. 그 왕의 귀환에 관한 내용이 제3편인데 ‘프로도’라는 청년이 반지를 보게 되고 반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이 그에게 생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위험한 임무를 띠고 떠날 위인은 결코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이 반지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째서 이 반지가 제게 들어온 거죠? 어째서 제가 이 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선택된 것일까요?” 그때 간달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는데, 자네가 남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네. 힘이 많아서, 지혜가 많아서도 아니네. 하지만 일단 선택된 이상 자네는 자네에게 있는 모든 힘과 모든 용기와 모든 지혜를 사용해야 할 걸세.”

여러분, 우리가 힘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혜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택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많이 하실 수 있기에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별 볼일 없는 우리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요청받는 이 삶의 자리를 우리는 확실하게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맡겨진 일들을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부지런히 해 내고, 사랑하면서 즐거워하면서 기뻐하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겪게 될 세상적인 실패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때로 우리가 넘어져도 그것이 우리를 무릎 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와 목표를 향해서 다시 일어서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사명을 허락해 주십니다. 사명자로 이 땅에 살도록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고, 저희에게 어두운 그림자들을 다 버리게 해 주시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함으로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 채 저희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이 시간 다시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시고, 아시고, 복중에 있기 전부터 저희를 선택했다고 하는 이 놀라운 은총을 기억하며 저희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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