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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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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마 26:36~46)

지난 1988년 중국의 지리학자들은 히말라야산맥 동쪽에 위치한 해발 8,840미터의 에베레스트산이 지금도 계속 자라나고 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모든 산맥과 산 봉오리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홀로 깨어나 수백만년의 세월을 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자라난 에베레스트 산봉우리를 향해 우리는 세계의 최고봉이라는 영예를 주어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고사성어 중에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본다는 말입니다. 오랜만에 상대방을 보니 발전하고 성장하여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진보가 없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무릇 향상과 진보는 언제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어느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가 하루만 연습을 쉬면 내 실력이 퇴보한 것을 내가 알고 이틀을 쉬면 선생님이 압니다. 그리고 사흘을 쉬면 나의 관객 모두가 압니다.”

우리 믿음 생활에도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딤전 4:15에서 디모데에게 가르쳤습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 더 나아가기를 원하고 뒤로 물러가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는커녕 실상 퇴보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러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구절을 누가는 22:41에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조금 더 나아가신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신 예수를 우리는 사순절에 바라보면서 우리의 영적인 삶도 조금 더 진보하기를 원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제자들보다 조금 더 나아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마음의 고민에서 기도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마다 고민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눅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보면 지옥을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고민의 골짜기입니다. 살아있는 인생은 모두 고민을 가지고 신음합니다. 요즘 자살 신드롬이 생겼습니다. 지하철 투신 자살, 한강 투신 자살, 자살사이트를 통한 동반자살, 고층 아파트의 창문이나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추락사로 인생을 마치려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대만에서도 미국에서도 자살자의 수효는 매년 증가일로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인생의 고민을 극복하지 못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의 고민도 극치를 이룹니다. 28절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하십니다. 죽을 지경에 이른 예수님의 고민은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랑하던 제자들을 데리고 늘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민이 견디기 어려웠으나 그 고민에 결박되지 아니하고 조금 더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조금 더 나아가는 기도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에서 길에서 들에서 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겟세마네의 기도는 깊은 고민에서 자유를 얻게 하였습니다. 모름지기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인생의 고민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맡기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모든 고민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기도는 언제나 고민에서 벗어나게 하는 확실한 처방입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배신의 고민으로 괴로워했던 베드로도 회개하며 기도하였을 때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어거스틴도, 바울도, 요한웨슬리도 모두 고민의 자리에서 기도로 조금 더 나아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기도로 조금 더 나아가 인생의 모든 고민을 해결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미움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의 흑인지도자 마탄 루더 킹목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습니다. 그가 1956년 1월 30일 대중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집 현관에 폭탄이 터졌습니다. 급히 집에 달려가 보니 그곳에는 천명이상의 흑인들이 총과 몽둥이와 칼로 무장하고 폭동 일보직전의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흑인들은 어서 결판을 내자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분노한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킹은 손을 들어 분위기를 진정시키면서 "떠들지 말고 조용하십시오. 성급히 일을 하지 마십시오. 무기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합니다" 라고 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마침내 군중들이 잠잠하여 졌을 때 그는 "우리는 폭력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을 선의로 대하십시오. 부디 당신들의 사랑을 그들에게 알려주십시오". 킹 목사가 말을 마치자 군중들을 "아멘,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하고 흩어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워싱턴 디시의 거리에는 그를 기념하는 나무가 미움과 증오를 극복한 상징으로 서 있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도 배신의 증오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랑으로 조금 더 나아가셨습니다. 스승을 배신하고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하며 입까지 맞추는 가룟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의 제자가 오늘의 원수로 변한 유다의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미움과 증오심으로 가득 찼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원수를 친구로 부를 수 있는 마음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움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나아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속담에 "모기를 보고 칼을 뽑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요즈음 사람들은 너무나 흔하게 자주 칼을 뽑습니다. 나라의 탄핵정국으로부터 사회의 모든 일들은 발끈하며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럴수록 자기를 파는 원수에게도 사랑으로 이기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움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증오를 극복하여야 합니다. 사순절기간에 예수님처럼 미움과 증오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조금 더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자기 주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더 나아가야 합니다

존번연의 천로역정은 제2의 성서라고도 불리워지는 책입니다. 그 책에 흐르는 내용은 온통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 기독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항상 빛을 향해 곧 바로 나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전도자의 말을 듣습니다. 그는 낙담의 늪, 죽음의 계곡, 허영의 거리를 지나는 동안에 자기를 부르는 유혹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고 뛰어 갑니다. 마침내 그는 영원한 천국에 이르고 그가 바라던 기쁨과 승리를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 기도의 결론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자기의 소욕과 주장을 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하는 모습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면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예수님께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고 26:39 에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라고 눅 22:44에 증언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였다고 히5:7에 밝히고 있습니다. 이같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아무런 결단도 없이 수고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하시며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면해보시려 자기주장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조금 더 나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자기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의 결론을 맺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마리아가 자기의 옥합을 깨트린 것처럼 우리 자신이 깨뜨려져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희생이 없이는 섬길 수 없습니다. 자기 뜻을 부인하지 아니하고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유창한 기도와 긴 기도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전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자세가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여러분이 한 생명을 살리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향상과 진보의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는 일에 주저하면 실패의 웅덩이에 빠지고 맙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조금 더 나아가 힘겨운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셨습니다. 기도로 고민을 이기셨습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셨습니다. 결단으로 자기주장을 이겼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사순절기간에 마음의 고민에서 기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미움의 자리에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굽힐 줄 모르는 자기주장에서 조금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시는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들은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돌 던질 만큼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힘닿는 데까지 나아가 엎드리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조금 더 나아가 마침내 승리하는 복된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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