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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롬 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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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하나님의 사랑 (롬 5:5-11)(2004년 3월 28일)


□ 하나님의 사랑  롬 5:5-11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장 5-11절)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지내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는 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언제나 들어도 가슴 벅차고 감격스럽습니다.
‘목사님! 사랑해요’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절로 힘이 생깁니다.
'이봉씨! 사랑해요’라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지금도 가슴 두근거릴 겁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사랑한다는 말은 싫은 소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러면 주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도 사실은 이런 말을 잘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지금 아마 제 아내에게‘영복씨! 사랑해요’라고 한다면, 아마‘당신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라고 할 확률이 많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좋은 말이지만, 그것을 잘 표현을 못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실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어떤 면으로든지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은 세상 속에 있는 우리들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늘 쓰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그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둑도, 강도도, 사기꾼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처음에는 다 놀랍니다.
‘뭐요?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한다고요?’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으면 모두 이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 집니다.
살인강도 고재봉도, 김대두도 다 이 사랑에 녹아졌습니다.

사랑은 사람만이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動物)들도 자기 사랑하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개(犬)도 자기 사랑하는 주인(主人)을 압니다.
말도, 소도, 원숭이도, 심지어 뱀도 자기 사랑하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저들은 사람에게 품어 나오는 냄새로 안다고 합니다.
사람이 미운 마음을 품으면, 동물들은 벌써 그것을 감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방어를 취하면서 공격한다고 합니다.
식물(植物)들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다 안다고 합니다.
꽃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는 사랑으로 대화를 한다고 합니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이 그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꽃도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한다고 합니다.

지난번 지리산 피아골에서 농촌교회를 목회 하는 목사님이 서울에 사는 우리 장로 목사들에게 들려 준 말입니다.
‘여러분은 꽃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지리산에 피는 야생화를 일일이 카메라로 찍어 보여주면서
‘저 꽃이 지금 뭐라고 하십니까?’물었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랬더니,‘저 꽃에게 먼저 인사를 해 보세요’
‘그리고 웃어 보세요’그랬더니 정말 꽃이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포도를 재배하는 어느 화예 선생님도 식물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거름을 주고 김을 매주면 틀림없이 많은 열매로 보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 많다고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처럼 더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 사랑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이 사랑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고,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요1서3:16)
(We know what real love is because Christ gave up his life for us)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가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영어성경은 번역하고 있습니다.

참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그것이 참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악하고 굳어진 마음은 피를 보아야 사그러듭니다.
상대방이 죽는 것을 보아야 그 분함이 끝이 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제각기 한마디씩 할 수 있습니다.
온통 세상 가요에 비쳐지는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참 사랑이 아닌 것들 뿐입니다.
깨진 사랑, 무너진 사랑, 떠나간 사랑, 눈물의 씨앗일 뿐입니다.
그런 사랑에는 자기 포기가 없습니다.
모두 자기를 위한, 자기만을 위한, 자기 본위 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요즘도 사랑의 실패한 사람들은 사랑이 어디 있는가고 반문합니다.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 보면, “사랑?..., 사랑이란 게, 뭐 말라 비틀러진 것이냐?”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또 그런 것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 정말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 비슷한 것을 흉내내면서 사는 것 뿐이 아닌지......?
그렇게 불타 오르던 사랑도 식으면 원수처럼 등 돌리고 헤어지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서약을 받으면서 눈을 뚫어지게 보면서 묻습니다. ‘신랑 ○○○군은 신부 ○○○양을 그대의 아내로 맞이하여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이 여자를 사랑하고, 도와주며,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키기로 서약하십니까?’하면 '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신부에게도 꼭 같은 질문을 합니다.
‘○○○양은 ○○○군을 그대의 남편으로 맞이하여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어떠한 환경에서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 도와주며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키기로 서약하십니까?’라고 하면 '네!’라고 합니다.
그렇게  서약을 해 놓고도, 헤어질 때 보면,
① 예단 문제로 깨지고, ② 성격 차이라고 깨지고, ③ 기대했던 것 보다 못하다고 깨지고, 아무튼 모두가 상대를 자기에게 맞추어서 맞지 않으니 헤어진다고 합니다.
물론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기본위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있는 것이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모자람을 내가 채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그래도 제일 귀한 사랑이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는 산고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피와 살을 나누어 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산고의 고통이 얼마나 아프고 괴롭습니까?
그리고 핏덩이를 안고, 오로지 그 자식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준 것이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이 숭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랑이든 <십자가의 사랑>을 능가할 사랑은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자식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부모는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식을 죄인을 대신하여 죽도록 내어준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이 죄인의 손에서 십자가에 달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는 아들의 소리를 듣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의 사랑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사랑입니다. 무지막지한 로마병정에게 피투성이가 되어 맞는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무관심으로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현대인의 죄악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공부했다고 하나님이 어떻고, 기독교가 어떻고 하는 사람들이 제일 큰 죄인이란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비이성적(非理性的)인 것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닌 갈릴리의 한 젊은이의 돌출사건으로 보려고 합니다.
마치 역사를 왜곡하려는 나라의 사람들의 심정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3.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보다 더 강한 힘은 없습니다.
굳어진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은 십자가 사랑뿐입니다.
죄인을 회개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십자가 뿐입니다.
로마의 창검(槍劍)도 이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십자가는 핵 폭탄 보다 더 위력이 큽니다.
증오와 미움으로 굳어진 마음을 녹아버리게 하는 힘은 십자가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보는 순간 그 어떤 <미움>도 사라집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 하도다”(138장)
그런 사랑을 주님이 우리에게 실현해 보였습니다.
채찍 맞아 낭자하게 흘러내리는 무죄한 핏방울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아니해도 스스로 나가서 그 사랑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 있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랑을 전하는 전령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수난절기를 맞는 우리들의 의무요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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