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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와 구원 (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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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구원
요 3:16-21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세상과 특히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일관되고 궁극적인 관심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관심과 능력은 오로지 우리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자연과 세상을 다시 구원 즉 원상회복 하시는데 집중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오늘 본문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하)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하)

하나님의 이와 같은 관심은 인간의 타락 이전에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관심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의 창조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생명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었고, 질서가 있었고, 가치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이전의 세상에 대한 표현이 나오는데, 성경은 그것을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가 있은 후 세상은 변하였습니다. 혼돈은 질서로, 공허함은 아름다운 의미와 아름다운 가치로 그리고 깊은 어두움(악과 절망)은 빛(선과 소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깨끗했습니다. 밝았습니다. 건강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절대적으로 불충분하리만큼 완벽했습니다. 세상은 그 깨끗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고 건강한 생명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찬송하고 노래했습니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 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듯하도다 아멘.(찬송 78장)

요즘 벌써 진해에 벚꽃이 만발하였답니다. 제가 산책하는 경희대학교 캠퍼스에도 벌써 목련이 피었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 있는 목련이 벌써 피었는데 저는 주로 밤에 운동 삼아 산책을 하기 때문에 그 목련을 밤에만 봅니다. 그런데 그 밤에 보는 하얀 목련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사뭇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구상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영혼의 눈에 끼였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어지며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보아 오던 손가락이 열 개 인 것도 이적에나 접한 듯 놀라웁고
봄에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는 듯 사뭇 황홀합니다. (말씀의 실상 중)

깨끗하고 열린 마음으로 자연을 보면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예술(art)입니다.


이와 같은 생명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세상은 공짜로 쉽게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을 그냥 말(언어)로 쉽게 창조하신 것으로 오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는 식으로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혼을 세상에 불어 넣으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을 창세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1-2)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신’이란 spirit of God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가 피조물에 당신의 혼을 불어 넣는 작업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의 혼신을 다하신 창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신을 다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안식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저는 하나님의 안식을 ‘하나님의 탈진’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있는 세상으로 창조하시기 위하여,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당신의 혼신을 다 쏟아 부으셨던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탈진하셔서 하루를 쉬셔야만 하셨습니다.

‘전능자의 탈진’은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 된 개념이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전능자의 탈진’이라는 값을 치루고 이루어 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절대로 세상이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는 식으로 말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세상이 인간의 타락과 함께 파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철저히 파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인간의 거부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하나님이 거부되는 공간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spirit이 거부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정신의 거부는 창조의 거부로 나타났고 그것은 생명의 거부 아름다움의 거부로 나타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세상은 다시 창조 이전의 공허함과 혼돈스러움 그리고 깊은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창조와 반대되는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생명과 반대되는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망은 생명을 거부함으로 이 땅에 임하게 되었고, 생명의 거부는 세상과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이 땅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거부하는 모든 곳에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혼돈이 있습니다. 어두움이 있습니다. 깊은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이든 개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정신이 살아 역사하는 곳에는 그곳이 어디이든 그것이 누구이든지를 막론하고 생명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오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남은 인생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이유이고, 제 생명보다 더 귀한 내 자식들에게 무엇보다도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시고 싶은 이유입니다.

생명 주께 있네
능력 주께 있네
소망 주께 있네
주 안에 있네..... 아멘.


성경에 보면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를 떠나 탕자가 되고, 그 방탕함의 결과로 죽게 된 자식이 생명을 위하여 선택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탕자의 구원은 그 지혜로운 선택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탕자는 돼지 밥도 얻어먹을 수 없게 된 비참한 죽음의 자리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용서해 주실까?

그와 같은 스스로의 질문에 탕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으로의 복권을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요구할 염치도 없었습니다. 그냥 종으로만 받아 주셔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밥이나 먹으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를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날부터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사랑이고 사랑은 용서였습니다. 아들의 오랜 방황과 방탕만큼의 오랜 기다림이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어떤 방탕과 방황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모든 것이 회복 되었습니다. 절망은 생명으로, 수치는 영광으로, 배고픔은 배부름으로, 어두움은 빛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적당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으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공허함과 혼돈과 어두움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치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와 과학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그와 같은 기대 때문에 정치와 경제와 과학은 나름대로 엄청난 발전을 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공허함과 혼돈과 어두움은 전혀 개선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공허함과 혼돈과 어두움의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한 준비를 완벽하게 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그래서 살았다 하는 이름만 있을 뿐 실상은 죽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충만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 놓고 계십니다.

타락 이전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지불하신 생명의 대가는 하나님의 땀이셨는데, 탁락한 이후 다시 세상과 사람들을 위하여 지불하신 생명의 대가는 하나님의 피였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셨습니다. 사흘 동안의 죽음이셨습니다.

요즘 멜 깁슨 이라고 하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감독한 The passion of Jesus Christ라는 영화가 화제입니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많은 언론 매체를 통하여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그린 작품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기독교 신앙이라는 면을 빼고 영화의 장면만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이제까지 그 어떤 잔인한 폭력물 보다 더 잔인한 영화라고 평한 것을 보았습니다. 실제로 어느 나라에선가는 그 영화를 보던 사람 하나가 심장마비로 사망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에서 당하는 과정을 너무 리얼하게 처리함으로, 그것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오히려 십자가의 감동을 제한한다는 평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이번 수요일 시사회에 초청을 받아 볼 예정입니다) 그 평에 동의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평을 읽으면서 제가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감동이 아니라, 십자가의 충격이다’

저는 멜 깁슨이 이 영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것이 십자가의 감동이 아니라 십자가의 충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그의 의도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동의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잔인한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느냐고 물으면 충분히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답은 분명히 압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다시 찬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 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 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6-17절)

그리고 성경은 아주 단정적으로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세상과 우리에게 아름다운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탈진하도록 혼신의 땀을 흘리시는 하나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화로 찍으면 세상의 그 어떤 폭력물보다 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살고, 그렇지 않고 여전히 그를 거부하고, 그의 정신과 역행하는 삶을 계속하려고 하는 자는 죽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절)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한 말씀을 인용함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
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4-15절)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망은 인간이 생명의 주를 거부함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의 정신을 좇아 살면 생명이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의 정신을 역행하며 살면 평생 사망이 역사할 것입니다.

생명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절대로 우연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과 아름다움에는 하나님의 피와 땀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땀과 피로 생명과 아름다움을 사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선택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아름다움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탈진하도록 땀 흘리시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기 까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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