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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란 무엇인가(28)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 /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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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28)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 
마6:25-34

오늘 아침 염려와 근심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피조물인 인간이 짊어지고 다니는 짐과 같은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표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염려가 죄악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염려는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용하는 죄악이다.” 미국의 어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Worry is wickedness. It is atheism. 염려는 악한 것이고 염려는 무신론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인간은 염려하고 근심하며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며 불행하게 살아가고, 건강, 공부, 직업, 결혼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참새나 백합화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참새나 백합화는 사람들처럼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불행하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들 중 하나는 원망과 불평이고 다른 하나는 염려와 근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이방인들과 불신자들과 현대인들의 삶의 특성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예수님께서 책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화된 한국 사람들이 덜 현대화된 브라질 사람들보다 염려와 근심을 더 많이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죄악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28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 염려와 근심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염려와 근심은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우리를 먹이시고 마시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26절을 읽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드리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들보다 귀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8절 이하의 말씀을 읽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들의 백합화와 들풀을 입히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들풀보다 귀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입히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믿는 아기들은 아무 염려나 근심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줄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비록 가난한 거지일 찌라도 아기들은 아무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지 아빠나 엄마보다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무식하게 믿었기 때문에 비교적 염려와 근심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38선을 넘을 때나 6.25 전쟁으로 피난을 갈 때나 돈 100불을 가지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갈 때나 때로는 생활비가 부족하여 일을 할 때나 귀국해서 정보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할 때나 도둑을 맞을 때나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별로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무식하게 그저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30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들의 염려와 근심의 대부분은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입니다. 미국의 어느 심리학 팀이 근심 걱정의 내용을 조사했는데 근심 걱정 거리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일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아직 걸리지 않은 병에 대한 근심 걱정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에 대한 근심 걱정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재난에 대한 근심 걱정이었습니다.

미국의 교육자인 카네기 박사가 어렸을 때 염려와 근심에 쌓여 자주 울곤 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그가 살던 미조리 농촌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어린 카네기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왜 우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산 채로 땅에 묻힐 것 같아서 울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계속해서 염려와 근심에 빠지곤 했습니다. 천둥과 벼락에 맞을 가봐 염려했고, 나이 든 친구 화이트가 자기의 코나 귀를 자를 가봐 염려했고, 커서 결혼할 여자가 생기지 않을 가봐 염려했고, 결혼할 수 있다면 아내에게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할 가 염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가 염려했다고 합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는 내가 걱정했던 걱정 거리의 99%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일에 대한 쓸데 없는 걱정을 기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우라는 말은 기 나라에 쓸데 없는 일을 가지고 걱정하는 우 라는 사람에게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기 나라에 살던 우 라는 사람이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땅이 꺼지지 않을까 하는 근심 걱정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를 걱정하는 그의 친구가 그를 찾아가서 그를 위로하면서 함께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 나라의 우 라는 사람으로부터 기우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염려는 것은 우리의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침해하는 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죤 하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다.” 우리의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라고 고백하면서(시31:15)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불행이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알고 믿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위로와 행복이라고 기록했습니다. “Ignorance of God’s providence is the ultimate of all miseries; the highest blessedness [and abundant comfort] lies in the knowledge of it”(기독교강요1권 17장 11절).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믿지 않는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을 모두 다 주께 맡겨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길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평생의 걸음을 걷게 하시 마 약속을 하셨고 우리들을 평생토록 안아 주시 마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40세가 될 무렵 하나님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의 걸음을 걷게 하셨다”는 신8:2의 말씀을 읽고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너를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라”는 사46:4 말씀을 읽고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을 누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키시마 약속하신 시편 121:8 말씀을 읽고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을 누렸는지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지키시리로다”(시121:8).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432).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의 손길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에게서는 모든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고 감사와 평안과 기쁨이 마음에 차고 넘치게 됩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455장). 우리의 내일이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염려와 근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염려와 근심은 백해 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을 해 보아도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까 염려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27절을 읽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여기 키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키를 말할 수도 있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인간의 키나 수명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건강 때문에 염려하면 건강이 더 악화됩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면 소화불량에 걸리고 불면증에 걸리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신경질과 짜증을 내게 됩니다. 결국 웃음이 없는 불행한 병자가 되고 맙니다. 염려와 근심은 마음과 몸과 뼈를 상하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다윗과 욥은 근심으로 눈이 쇠하고 어두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눈이 근심으로 인하여 쇠하며”(시6:7).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욥17:7). 염려와 근심은 결국 마음을 상하게 하고 몸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죤 루복이라는 사람은 “하루의 염려는 일주일의 노동보다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또한 말씀을 죽게 만들고 신앙을 죽게 만들고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13:22).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이제 염려와 근심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 세 가지를 간단히 말씀 드리므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첫째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중요 합니다. 내가 지고 가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고 불신앙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5:7).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시55:22). 염려와 짐을 감추고 숨기면서 자기가 맡아 지고 가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교만이고 불신앙입니다. 모두 들어내고 주님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성도들에게도 알리고 성도들에게도 맡겨야 합니다. “너희 짐을 서로 지라”(갈6:2)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선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나라와 나의 집의 필요를 먼저 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의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셋째 하루하루 수고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기고 염려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괴로움을 지니고 수고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수고하면서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수고에는 괴로움이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수고와 괴로움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루하루 수고하고 괴로움을 지니는 것은 인간의 삶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수고를 좋아하고 노동을 좋아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오늘날 놀고 먹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노동과 근로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 나라에 있어서 먼저 있어야 할 것은 근로이다. 근로로야 민심이 안돈 된다. 근로를 떠나서 당심과 불평에 떠들썩한 민심은 언제든지 안돈 되지 못한다.” 마6:33,34을 읽으므로 설교를 마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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