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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이 있는 삶 (막 9: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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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능력이 있는 삶
본 문 마가복음 9장 23~29절 (신약 69쪽)


본문에는 안타까운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주님께 크게 꾸지람을 듣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변화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때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아홉 제자는 산 가까운 마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머무르고 있던 마을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몰려들었습니다.

그 중에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이 나름대로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귀신들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귀신이 나가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기관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능력에 가려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 놓았을 것입니다. 마음 놓고 공격하고 또 조롱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상황이 참 딱하게 됐습니다.

오래 전에 재미있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Between Sunday and Monday” 번역해 보면 “주일과 월요일 사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과 월요일 사이의 간격이 너무도 크다는 것입니다.

월요일만 되면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수 없이 다짐하면서도 또 다시 같은 죄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열매를 맺어드리고 싶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세상 앞에서 한 없이 작은 자기 모습에 속상해 하면서도 또 그렇게 월요일을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아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본문에 나오는 무기력한 제자들의 모습 그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쫓을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막 3:14-15를 보면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미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막 6:7을 보면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들을 파견하실 때 다시 귀신을 내어 쫓을 능력을 더 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을 귀신을 내어 쫓는 사역을 잘 감당했던 경력이 있었습니다. 막 6:12-3을 보면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세상에 나가 사역을 하면서 실제로 귀신을 많이 쫓아낸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귀신을 쫓아내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능력있던 제자들이 그 능력을 다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 번은 심방 중에 심방대원을 기다리느라 길가 한 벤취에 앉아있는데 한 신사분이 다가와 말을 거시더라구요. 얼굴이 벌거신게 대낮인데도 낮술을 거나하게 하셨더라구요. “목사님이시죠! 저는 목사님만 뵈면 큰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전에 교회를 잘 나갔었죠. 서리 집사였고, 교회 회계 관리도 도맡아 했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교회 한 번 빠지고 두 번 빠지다 보니 벌써 5년이 넘었군요. 그래서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입니다...”

설교 준비하다가 문득 그분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믿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은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들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혹 여러분이 그런 분 들은 아니십니까?


믿음과 능력

그러면 어떻게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능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회복하면 능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능력을 잃어버리고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있는 제자들에 대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9절에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주님께서 보실 때 제자들에게 능력이 사라지게 된 것은 바로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 17장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생각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이 왜 귀신을 내어 쫓지 못했느냐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 17:20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다시 믿음을 회복하게 되면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일까요? 왜 믿음이 있어야 능력을 얻게 될까요?

우선, 능력은 주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로 삼으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도하라고 파송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적으로 능력은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무능한 존재입니다. 오직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적극적 사고의 능력”(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이란 책을 읽고, 그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적극적 사고가 믿음의 다른 말일뿐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은 소위 가능성의 사고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 적극적 사고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이 적극적 사고가 우리 마음의 힘이 되어 우리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변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신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이 신념은 내 무능이 드러나게 될 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서 이런 신념은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믿음은 이런 신념이 아니고 신앙입니다. 신앙은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내게는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철저한 자기 고백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능력은 주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나아가 “주님의 능력으로 나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주님을 믿으면 그 능력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도 적극적 사고를 가지게 됩니다. 적극적 사고가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결과요 믿음의 열매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외적인 현상이 바로 적극적 사고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은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능력을 받았습니다. 저들이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주님께 파송 받을 때 능력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저들에게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저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아무에게나 그리고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또 믿을 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통로입니다.

막 5장에 보면 재미있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자가 무리 틈에 섞여 있다가 주님도 몰래 주님의 옷에 손을 댓습니다. 그 순간 병이 나았습니다. 주님께서 갑자기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아시고 살펴보니 바로 이 여인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주님의 능력이 여인의 믿음의 손을 통해 여인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모르게 능력이 이 여인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우리가 믿음을 준비하면 주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세계적인 대토목공사입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지하 500미터에 무려 나일강이 200년 동안 흐를 수량 약 35조톤이 매장되어있답니다. 이 물을 사막인 리비아 전 국토로 끌어들여 옥토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나라 동아건설이 1984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2년에 걸쳐 1차 공사를 마무리했는데 무려 그 길이가 1874키로라는 것입니다.

이 때 사용한 관의 크기가 내부 직경 4미터 관하나 길이가 7.5미터 무게가 75톤의 어마어마 한 규모인데 하루 물 송수능력이 무려 100만 톤의 송수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막에 매장되어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물보다 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능력입니다. 이 물은 관을 준비해야 끌어올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려면 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의 양이 그 관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의 양도 믿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주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되 할 수 있으면 큰 믿음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실만한 믿음이어야 주님의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과 능력

오늘 본문 29절에 매우 의미있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우선 이 말씀은 표면적으로 제자들의 문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저들이 귀신을 쫓아내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썼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해 오던 여러 가지 방법을 썼을 것입니다.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의 머리에 안수했을지 모릅니다. 귀신들린 아이에게 대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을 수 있습니다. 요즘 이상한 기도원에서 하듯이 몸에 손을 댔을 런지도 모릅니다.

주님 보실 때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하다보니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는 줄로 착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하던 방법 그 방법이 귀신을 쫓는 줄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보실 때 이것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해 오던 방법에 의지해서 귀신 앞에 맞서다 보니 옛날과 같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현격히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마 17:20절에서는 믿음이 적어서 능력을 받지 못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왜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을까요? 기도와 능력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기도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께 간절히 간구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주님께서 그 간청을 들으시고 바로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 때서야 주님께서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아이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 믿음이 주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시간에 우리 심령에 믿음이 생겨납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이 회복됩니다. 기도로 세워진 믿음이 주님의 능력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능력의 창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심령을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 심령을 회복시키십니다.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세우십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 강변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기도해 보십시요.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믿음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기도해 보십시요.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옛날 같지 않아!”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기도해 보십시요. 성령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도 외에는 길이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 중에 우리의 믿음을 만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고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당당하고 힘 있고,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능력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능력있는 삶을 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굳건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믿음은 기도를 통해 세워집니다. 기도하며 굳건한 믿음 가운데 능력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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