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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군중의 조작된 함성 / 사 59:12~16, 딤전 1:12 ~17, 요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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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조작된 함성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59:12 ~ 16

  주님, 주께 지은 우리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발뺌할 수 없으며, 우리의 죄를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주님을 부정하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물러가서, 포학한 말과 거역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마음에 품었고, 또 실제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졌으며, 성실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정직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성실이 사라지니, 악에서 떠난 자가 오히려 약탈을 당합니다. 주께서 이것을 보셨다. 공평이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다.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께서는 놀라셨다. 주께서는 직접,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반드시 공의를 이루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친히 발휘하실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디모데전서 1:12 ~ 17 >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셔서 내가 맡은 일을 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그분을 섬기는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우리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한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먼저 나에게 끝없이 참아 주심을 보이셔서,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신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 복음서 19:1 ~ 7, 14 ~ 16>

  그 때에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으로 쳤다. 병사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뒤에, 예수 앞으로 나와서 "유대 사람의 왕 만세!" 하고 소리 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 그 때에 빌라도가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그 사람을 당신들 앞에 데려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 주기를 바라오."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신 채로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시오,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보시오, 여러분의 왕이오" 하고 말하니, 그들은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의 왕은 가이사뿐입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그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들은 예수를 넘겨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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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순절이 중반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성금요일이 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이 되고, 드디어는 부활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의 한 장면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와 유대교의 수장인 대제사장 가야바, 그리고 심문장에 끌려온 예수, 그리고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상당히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유대교 백성들은 본래 율법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가진 백성입니다. 율법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켰는가는 구약성서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율법을 지킵니다. 그런 이야기 중에 오늘 본문과 연관시켜 볼 만한 것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로마 총독으로 임명받은 빌라도가 유대 땅에 부임하면서, 로마 황제인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진 기를 가지고 와서 밤에 유대인들 몰래 성전에 게양했습니다. 유대 땅의 상징은 수도인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상징은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다 로마 황제의 얼굴을 새긴 로마제국의 국기를 게양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종교, 정치, 경제 전반의 주인은 로마 황제요, 로마 황제는 신으로 추앙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황제는 유대나라를 정치적으로만 지배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성전 앞의 게양대에 걸린 기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기겁을 했습니다. 분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엄청나게 많은 군중이 성전 앞에 모여서 요즘 말로 하면 데모를 시작합니다. 그걸 막는 로마 군인들과 충돌이 생깁니다. 깃발을 내려라. 못 내린다. 결국 로마의 처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따라서 마지막 담판을 하러 몰려갑니다. 옆 동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 말하자면 수도권 밖에 있는 도시로 몰려갑니다. 거기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총독부가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총독부 앞까지 달려갔습니다.

총독부 건물을 에워싸고 밤낮 5일 동안을 총독에게 호소를 합니다. “성전에 걸린 깃발을 내려달라.” 그러나 빌라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깃발을 내리면 총독으로서는 권위를 상실할 것이고, 식민통치 자체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총독부를 에워싼 유대 백성들과 타협을 했습니다. 5일이 지나고 6일째 되는 날 원형경기장에 나가서 담판을 짓자고 말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계략은 뭐였냐 하면, 빌라도가 재판장석에 앉고 로마 군인들을 대기시켜 놓은 다음에, 나서서 로마 기를 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목을 쳐서 유대인들의 기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다들 원형경기장에 모였습니다. 가이사 황제 이름으로 명을 내렸습니다. 누구든지 목숨을 걸고, 죽기를 작정하고 기를 내리라고 할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형경기장에 작두를 든 군인들이 서있고, 누구든지 나서면 공개처형을 합니다. 살벌한 장면입니다. 빌라도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사람이 아니라 경기장에 모여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다 내 목을 치라며 달려드는 통에 로마군인들이 오히려 혼비백산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황제기 내리기로 결정을 했고, 그 기가 다시는 걸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이야기 같지만 엄청난 상징성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유대백성들의 신앙 열기, 율법에 대한 충성입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야웨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십계명 1계명에 대한 준수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유대백성의 자존심, 민족의 긍지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로마 총독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정치적 장치를 만듭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타협을 합니다. 종교행위는 총독이 임명하는 대제사장에게 맡기고―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 십년을 봉직했습니다―종교가 아닌 모든 국사는 로마 총독이 관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권력 사이에 나사렛에서 났다고 하는 예수라는 이상한 사람이 끼어듭니다. 등장해서 하는 말이 “내 나라는 세상 나라와는 다르다. 내 나라에는 총독도 없고 대제사장도 없다. 내 나라는 하나님의 권위가 통치하는 나라다.”라고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유대 땅 사람들은 너무나 배고프기 때문에 배고픔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했습니다. 누구든지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메시아란 칭호가 부여되었습니다. 상징적인 얘기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5,000명을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 장정만 5,000명을 먹이고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백성들이 배고팠는지가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배고픈 사람들을 기적을 통해서 먹여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눈먼 사람을 흙을 발라서 기도하고 고쳐주었습니다. 앉은뱅이도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 죽은 지 3일이나 되어서 시신이 썩었는데도 무덤을 열고 그를 살려냈습니다. 유대백성들이 보기에 율법으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 도대체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기적이란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이상한 사람 나사렛 예수가 벌인 것입니다.

군중들이 나사렛 예수를 따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넘어섭니다. “나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합니다. 빌라도와 가야바 눈에는 이 나사렛 예수는 결코 좋은 존재가 아닙니다. 율법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율법 위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가야바 대제사장에게는 예수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로마제국도 초월한다고 합니다. 빌라도 총독에게도 말할 것 없이 문제인물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를 무던히도 따랐습니다. 이 따르던 군중들이 부활절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감람나무 잎사귀를 길에다 깔아 놓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예수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오늘 읽은 복음서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당신들이 추앙하던 왕이오?” 군중들이 대답합니다. “우리의 왕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대제사장이 한수 더 뜹니다. “우리한테는 왕이 없소. 로마의 황제밖에는 우리한테는 왕이 없습니다.” 황제기를 내리라고 요구할 때는 언제고 오늘 이 사건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때 배고픔을 해결해준다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 군중들을 가야바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가 힘을 내서 돈으로 샀습니다. 어제 예수를 따랐던 백성들이 오늘은 가야바의 돈을 받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정반대의 아우성을 칩니다. 하기야 예수의 제자인 가룟 유다도 은 삼십에 넘어갈 정도였다면, 이름 없는 백성들이 넘어간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런 배반과 저주에 둘러싸여 십자가를 집니다. 그러면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빌라도와 가야바 제사장과 백성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습니다.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했습니다. 그 결과는 비극, 십자가라 이름하는 비극이었습니다. 그 비극은 이미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의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제가 저 지난주에 독일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모이고, 북쪽에서 여섯 분의 교회 대표와 남쪽의 교회 대표들이 모여서, 한반도 평화 때문에 회의를 하고서 돌아왔습니다. 회의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막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서울에서 급한 뉴스가 날아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는 보도가 팩스로 이메일로 막 날아왔습니다.

남쪽의 사람들, 북쪽의 사람들은 정신이 없어서 이게 뭐냐,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난리였는데, 북쪽에서 온 분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뭡니까 그게? 우리는 잘 모르겠습니다.” 탄핵이 무언지를 설명하자, 그분들이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탄핵되었으면 나라가 망할 것 아닙니까? 큰일 났습니다.” 자기들 같으면 난리가 날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약 탄핵이 되어도 우리는 민주적 방식으로 문제해결을 할 것이고, 남쪽은 그것 때문에 망하지는 않는다.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북쪽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보기에 최고의 수장을 탄핵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탄핵되었으면 나라가 금방 쓰러질 텐데 왜 안 그렇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탄핵되었다고 망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아무리 말을 해주어도 못 알아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고 봐라, 안 망하지. 시간이 흐르면 문제없다.”고 말을 잘랐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근심어린 얼굴로 자기들 방에 들어가더니, 그 다음날 와서 또 물어요. 그래서 “안 망한다. 북쪽의 김 위원장이 이런 일 당하면 북쪽은 당장 망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더니, 대답을 안 하는데, 그렇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들은 슬픈 기색을 하면서 우리하고 헤어졌습니다. 제가 그걸 보면서, 체제와 사고가 다르면, 같은 일을 놓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독일에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논의를 했는데, 독일도 역시 제일 큰 정치적 화두는 ‘개혁’이었습니다. 정당마다 개혁의 방향을 가지고 싸우는데, 현재의 수상이 굉장히 몰리고 있었습니다. 개혁의 내용은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독일은 사회보장제도가 너무나 잘 되어 있습니다. 국가 재정으로 시행하는 사회보장제도가 너무나 많습니다. 대학은 등록금이 없지요. 있어 봐야 조금밖에 안 되지요. 누구든지 공부하고 싶으면 끝까지 공부할 수 있지요. 의료보험이 철저하게 잘 되어 있지요. 실업보험제도도 잘 되어 있지요. 모든 것이 보장된 사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국가 재정으로 과거에 물던 사회보장비용을 지불할 수가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러니 사회보장 혜택을 줄이고, 그리고 이제는 국가 재정으로 충당할 것이 아니라 각자가 돈을 내서 보험을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조금 우향우로 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국가 재정을 당해낼 수 없으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개경쟁 사회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자본주의 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걸 가리켜서 현재 독일에서는 ‘개혁’이라고 이름합니다. 경제 체제 개혁!

우리는 개혁이라고 하면 낡은 정치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격심해진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돈이 있는 사람이 많이 내서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사회보장제도를 만드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일의 개혁은 정반대입니다. 같은 개혁이라는 언어라도 나라마다 사회마다 상황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무슨 말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그 말을 하는 쪽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와 가야바 대제사장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 그리고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다 달랐습니다. 서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유대민족만을 독립시키는 정치적 지도자로 온 게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백성 상당수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예수는 아무리 살펴봐도 정치적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바와 백성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먹을 것을 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로마에서 해방시킬 사람으로 믿었는데, 예수님은 민족의 지도자이기를 거부하고 정치 혁명도 포기하고, 이상하게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십자가 형틀로 갑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철저한 비애를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돌아섭니다. 배반한 것입니다. 예수는 배반당한 사람의 위치에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배반을 안 당하셨더라면 아마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먹을 것을 얼마든지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떡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질로만 사는 게 아니고 영적인 소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빌라도도, 가야바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못 알아들으니, 그 죄의 값을 내가 대신 지겠습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인간의 무지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기적을 보여주고 설명하고 알려 주었는데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의 무지의 짐을 예수에게 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기적을 베풀어 주었건만 그걸 그렇게 모릅니까? 내가 5,000명을 먹일 때 당신들은 기뻐했죠? 그리고 호산나를 외쳤죠? 찬양했죠? 찬송했지요? 이제 내가 그 일을 중단하고 십자가 형틀로 간다고 이렇게 배반할 수 있습니까?”

인생살이가 즐겁고 기분이 좋으면 콧노래 부르다가, 좌절이 오고 슬픔이 오면, 너무 쉽게 하나님을 버리지 않습니까? 좀 잘 살다가 돈이 없어 가난해지면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까?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가, 우리 정당이, 우리나라가 좀 좋을 때면 희희낙락하다가 조금 나빠지면,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원망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를 배반한 군중, 그 군중은 예수의 눈에는 너무나도 순박했습니다. 순박한 배반입니다. 그러나 그 군중을 동원한 가야바나 빌라도는 순박한 백성들을 조종하는 교활한 지배자의 대표였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헤아려 보면 이렇습니다. “지도자 된 여러분, 군중을 우매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종교 지도자 여러분, 백성들을 하나님의 선한 말씀으로만 이끌지, 인간의 언어로 그릇 인도하지 마십시오. 이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이여, 백성들을 가만 그대로 두십시오.” “백성들이여 여러분은 몰라서 그렇습니다. 몰라서 짓는 여러분의 죄는 내가 집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이들에게서 생명의 복, 영원한 생명의 복을 거두어 가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수난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배반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반 없이 예수와 함께 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는 없습니까? 부활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진지하게 같이 맛보십시다. 배반 없이. 하늘에 대한 배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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