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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 안에서 살자 / 요 8: 31-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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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 안에서 살자

본문 : 요 8: 31- 40

예수님은 내가 진리라고 하셨고,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인 동시에 빛이요 진리입니다. 사랑은 진리가 승리하기를 원합니다(고전 13:6). 그래서 기독교가 들어가면 자연과학이 발전되고 미신과 무지가 추방됩니다. 기독교가 허위라면 기독교가 망하고 비 진리가 승리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비 진리이기 때문에 안 믿거나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무지 혹은 무관심하거나 자기가 창작한 기독교 편견으로 불완전하게 알고 있는 왜곡된 기독교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습니다. 대개는 어두움이 빛(진리)을 싫어해서 도덕적 이유로 예수를 기피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20)
사람이 또 진리를 외면하는 다른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날 랍비가 말하기를,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는 다시 대답합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혀야돼요. 허리를 굽혀야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를 터득해야 지도자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왜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할까요?

1.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나 인격수양의 차원을 넘어선 절대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관해 말하기를 "아무 신앙이나 한 가지만 가지면 되지 반드시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 :12)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힌두교에 심취해 있다가 어떤 자매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유명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교수가 뉴델리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에는 교수까지 모두 네 사람이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했고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교롭게도 네 사람 모두 종교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종교가 달라도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지요. 결국 같은 목적지를 가진,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자 가만히 앉아 있던 교수가 버럭 고함을 쳤습니다. "아니오. 당신들은 같은 배를 탔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나는 다른 배를 탔소!"
그렇습니다. 진리는 거짓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참 목자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 오직 하나의 문을 통해서 자기 양들에게 나아갑니다. 그것이 진리의 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모든 지도자들은 거짓된 목자들입니다. 진리 안에 바로 서십시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누구든지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값없이 의를 얻고 흑암의 권세에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기는 위대한 신분의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 4) 진리 안에는 길과 생명과 영생이 있기 때문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2.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거룩 (성결)해지기 때문입니다.
해외 토픽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시카고에 사는 두 형제가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고 가출을 했습니다. 그들은 쪽지를 한 장 써놓고 집에 있던 통조림을 한 가방 싸들고 나갔습니다. 이 사실을 안 부모님이 놀라서 경찰에 신고를 하려 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가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깡통 따개를 깜빡 잊고 안 가져갔어요."
우리도 깡통 따개를 찾으러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처럼 자기 본위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참 진리인 말씀으로 성화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에 따라 거룩해진 척 할 때가 많습니다. 아이의 진학을 위해, 사업의 성공을 위해,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예배나 기도회에 참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련이 오면 간절해지고 채워 주시면 나태해지는 우리의 이기적인 신앙 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 4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68:5)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3. 진리 안에서 살면 참 자유를 알고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였습니다.
자유에는 외면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유란 루즈벨트가 말했던 것처럼 출판과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가난으로부터 자유, 공포로부터 자유입니다. 우리가 자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외면적 자유의 부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에 관한 헌장을 제정해 선포하고 자유의 여신상도 만들며 보이지 않는 자유를 희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유는 외면적 자유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내면적 자유입니다. 내면적 자유란 죄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입니다. 또 세상의 물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면적 자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영적이고 내면적인 인간 본질의 자유를 강조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진정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본문 33절에“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지금 우리가 자유로운데 무슨 자유를 논하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죄 지은 적이 없는데 왜 죄인이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 내면의 죄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도적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도 위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세계에 들어가 보면 쓰레기처럼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이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면, 억압된 종처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의 종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이 오고 그 죽음의 공포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우리가 허무를 느끼는 것은 인생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본능이 뱀처럼, 안개처럼 있는 까닭은 어둠의 세력이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사실을 부정하며 항의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예수님께서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죄의 종입니까, 자유인입니까?
성도 여러분, 자유가 보장된 곳에 자살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인권이 신장된 곳에 더 많은 내면의 타락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일수록 성적 타락 현상이 적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주면 타락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본문 35절을 보세요.“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종의 특징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거하지만, 종은 아버지의 집에서 일을 하며 영원히 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의 종입니다. 우리의 내면세계에 들어가 보면 억압된 욕망 덩어리를 갖고 본능대로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은 미움, 시기, 질투,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사는 것이 인간의 내면세계입니다. 겉으론 모두 선남선녀처럼 보이지만, 내면세계는 불안하고, 쫓기고, 초초하고, 외롭고,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내면에 의한 것이고 영혼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37- 38절을 보세요“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예수님의 참 제자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만큼 진리에 대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만큼 내면에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분을 바꾸십시오. 종의 신분에서 영광스러운 아들의 신분으로 바꾸십시오. 그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진정한 자유, 최초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형상대로 자유인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4. 진리 안에서 살 때 참된 행복과 평안,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된 행복은 진리와 더불어 있고, 모든 참된 기쁨은 진리와 더불어 있습니다. 진리를 떠나는 날 행복도 기쁨도 함께 우리 곁을 떠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6- 27)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1: 3- 4)
사도요한은 말씀중심으로 사는 생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영국속담에 "진리와 기름은 항상 위에 있다. 진리는 모든 만물을 정복한다. 그리고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그대의 삶에 새로운 향기를 발할 것이다. 살 맛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초오서는 "진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최고의 것이다 그리고 삶의 진가(眞價)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말씀 안에는 참 자유(自由)와 평안(平安)과 평화(平和)가 넘치는 것입니다. 언제나 만족한 삶을 살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5. 진리(眞理)는 변치 아니하고 언제나 새롭고 신비하고 확실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시카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학생 하나가 딱 따라나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많은 책을 쓰시고 많은 연구를 한 평생 하시고 또 가르쳤는데 당신이 그 동안 연구하고 배운 심오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는 말하기를 어렸을 때 부르던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일세."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이라고,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한 진리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요 우리가 확실한 지식을 얻는 데 필요한 책입니다. 우리가 성경 외에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후에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부모님을 통해 우리의 생년월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후에 부모님이 우리에게 잘못 말씀하신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을 통해 과거의 무엇을 확실하게 안다고 할 경우에도 우리의 기억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을 통해 현재의 무엇을 안다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연결된 하나가 잘못되면 다른 것도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다는 것이 후에 발견된 어떤 것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우리는 미리 우주의 모든 것들을 다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 존재가 우리에게 참된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둘째 조건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우주와 인간계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아시고 변치 않는 확실한 지식의 무한한 창고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실 뿐 아니라 절대 거짓말을 하시지 않습니다(민23:19). 모든 것을 아시고 절대 거짓말하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에 관한한 우리가 가진 어떤 지식보다 더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지식은 확실하지 않으며 이전 지식보다 더 확실하다는 상대적 확실성의 지식에 불과하지만 성경에 계시된 진리는 최고의 확실성, 즉 변치 않는 절대적 확실성의 지식입니다.
프랑스의 작가이며 저널리스트인 끄로드. 모르강의 "인간의 증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세계 제2차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폐결핵으로 석방이 되었으나 계속하여 지하저항운동에 참여하여 활약하다가 독일 비밀경찰에 의하여 다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동료들과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조국 프랑스의 국가를 힘차게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인간을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히 죽이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진리는 죽일 수 없습니다. 진리는 확실하고 영원합니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는 불확실성의 시대와 ‘우리는 아무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철학적 회의주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은 성경뿐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우주관,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 성경이 제시하는 신관,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관,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관, 성경이 제시하는 인식론, 성경이 제시하는 모든 것은 절대 확실하고 변치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절대 확실한 진리로 우주와 인생을 걸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성경뿐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연극배우 친구를 가진 어느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배우는 연극이 상연될 때마다 많은 관객을 끌었으며 목사님은 대조적으로 교회에서 몇 사람되지 않는 교인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배우인 그의 친구에게 "자네는 관객을 많이 끌어들이지만 내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네. 그 이유가 뭘까? 자네 말은 꾸며낸 이야기이고 내 말은 불변하는 진리이기 때문일 거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배우 친구는 "나는 꾸며낸 이야기를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자네는 진리를 꾸며낸 이야기처럼 말하고 있다네 " 하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생활태도나 방식을 통하여 또는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행부족으로 진리를 꾸며낸 이야기로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예수님은 낡은 율법주의 형식 종교, 고정 관념에 대한 종교를 다 깨뜨려버리고 살아있는 진리의 빛을 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진리 안에서 살아 우리 신앙이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기쁨이 충만하며, 진리로 더욱 거룩해지는 삶을 살게 하소서! 이 세상에 저희를 파송하신 주님의 뜻을 분명히 인식하여 기쁨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며 사는 삶이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특히“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어둠의 세력, 죽음의 세력, 질병의 세력은 떠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하시고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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